2018년 10월 7일, 성령강림절후 20주
맑은 하늘과 고운 산천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10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허리가 휘도록 겸손을 떠는 벼 이삭들이 온 대지를 뒤 덮은 풍요를 말해주는 계절에, 마음속에 그냥 놔둘 수 없는 주님의 세심한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를 너른 품에 품으시고 다독거려 주사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살 용기를 갖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통념과 신앙
(막10:1-12)
- 도입
오늘의 말씀을 보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주님께로부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섭리에 관한 것으로 대답을 듣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전례대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은 그냥 질문이 아니다. 자칫 이 질문 하나 때문에 예수가 공경에 빠지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노렸다.
잠시 뒤에 이야기 나누기로 하고 말씀을 읽다보노라면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다.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인가? 다름 아니라 12절이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왜 이상한가? 현대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이 당연하다.
11절에서 아내를 버린 남편에 대한 말씀 후에, 남편을 버린 아내에 대한 말씀을 하셨기에, 별로 이상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병행문구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이상한가? 그런데 주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생각하면 이상하다. 과연 당시에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남성중심주의 사회였다. 아무리 무능하고 형편없는 남자라고 해도, 남자가 여자를 버릴 수는 있어도, 여자는 남편을 버릴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 2-4만 봐도,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하고 묻는다. 여기서 사람은 성의 구분 없이 쓰이는 일반적인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남성이다. 그래서 ‘아내’라는 단어가 ‘사람’의 상대적인 명사오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으로 남자가 여자를 버리는 것은 합법화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법에 있지도 않는 것이다. 그마 만큼 그런 사회적 통념은 있지도 않았다. 상상할 수도 없던 개념이었다.
- 통념에 숨어버리는 세상악
모세는 왜 이혼을 허용한 것일까? 단 규정이 있다. 이혼증서를 써주어야 한다. 사실 이 법은 이혼허용법(離婚許容法)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이혼남용방지법이라고 해야 옳다. 이혼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또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일부일처제인 것 같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여러 아내들을 거느린 이야기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할까?
사회적인 구성비에서 남녀의 차이가 있었다. 남자들은 전쟁과 부역으로 많이 죽곤 하는 시대였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이런 상황은 담고 있다. 기업이나 유산은 남성에게 남겨졌다. 고아와 과부는 남자나 가장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사회문제로 통합과 화합이 깨질 경우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적인 사회적 선택은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였다. 고대 중동지역만이 아니다. 세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도 이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형사취수제(兄死醉嫂制) 같은 것도 있었던 것을 보면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실정이었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여자들은 언제 건 함부로 맘대로 소박맞거나 버려질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런 것을 상황윤리, 상황논리라고 한다. 모세역시 이런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혼을 하려면, 다시 말해 한 여자와 혼인관계를 파기하려면 반드시 합당한 사유나 이유가 없이는 안 된다. 대표적인 것인 간음죄이다.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내를 내버려서는 안 된다.
인간이 만든 법은 항상 왜곡되고 변질되기 일쑤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통념이 되고 만다. 이런 의도로 만든 법도 나중에는 아내나 여자를 합법적으로 내버리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인간이 악해서 그렇다. 세상의 악은 통념이라는 이름 속에 숨는다. 악마는 세상통념 속에 자신을 은폐하고 접근하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 거기서 예수님과 만난 여인의 사연을 들어보면, 그는 다섯 남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버려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마저도 남편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5절에서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말씀하고 계시다.
악이 통념 속에 숨어 버리는 결과는 무엇인가? 통속적이 되어 하나님과 그 나라와 의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뜻과 의가 상실되거나 파괴됐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게 한 것은 인간인데,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가?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주님은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살기를 원하신다.
은평구의 한 초등학교 학생이 운동장 시설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흔적이 없었고, 자살을 암시하는 유서가 발견됐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초등학생들에게 유투브 같은 채널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유행되고 있는 노래들이 있다고 한다. 자살송이다. 이 땅의 일들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둬도 될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우리 개개인은 너무 미약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노력하고, 빛과 소금이 되어 살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때다.
- 통념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악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질문의 의도를 살펴보자. 괜히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리들 앞에서 말이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묻는 의도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에, ‘옳다, 그르다’라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법에 대해서 물으셨다. 그리고 원래 하나님의 섭리로 말씀하셨다.
이 질문의 의도는 바리새인들의 걸림이 됐던 예수님을 제거하거나 인격과 사역에 치명적인 상처를 내기 위해서였다. 빙빙 돌려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짐작을 위해서 힌트를 드리자면, 결국 세례 요한도 이 문제로 목숨을 잃었다. 배후에서 권력을 조종하면서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했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을 했다. 둘 다 야망이 있던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가문의 정당성을 필요로 했고, 한 사람은 권력 뒤의 왕관이 탐났다. 당연히 이 둘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이혼을 해야 한다. 헤롯은 전 부인을 내버렸고, 헤로디아 역시 빌립을 내버렸다. 여자가 남자를 내버릴 수 없는 사회 환경 속에서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범한 사람은, 헤로디아밖에 없다.
‘권력을 가진 자는 위법해도 되는가?’ 요한은 이것을 강하게 비판했다가 투옥됐다. 결국 목이 달아났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정치적 묘수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여자를 내버리는 것에 대해서 찬성을 하면 통속적인 사람이나 다름없다. 부인하면 세례 요한처럼 헤롯과 헤로디아를 비난하는 것과 다름없다. 올무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의 법에 대해 물음으로, 자신들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6-9절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신봉하는 모세오경 중, 창세기2장에 명시적으로 나오는 말씀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
저는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기득권이 만들어낸 사회통념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학습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며 율법의 대명사들처럼 행동했지만 사회적 부조리와 특히 권력의 죄악에 대해서는 용인하고 묵인하고 있다. 무리들은 권력자가 하는 일이라고, 개인으로서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체념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세례요한은 쓴 소리를 해댔다가 처형당했다. 학습효과를 낳게 되고 그래서 세상은 더 악해지는 것이다.
11절-12절, 주님은 제자들과 따로 이 일에 대해서 말씀했다. 학자들은 여기서 ‘전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회적 통념의 전복’ 아내를 버리거나 남편을 버리는 것은 간음이다. 남편이 아내를 내버려도 된다고 하는 사회적 통념, 더군다나 아무리 권력자라고 해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용인될 수는 없는 점을 일깨우셨다는 것이다.
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회악을 통념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울고 계신 것은 아닌가, 되물어 보았다. 아니 악의 잔꾀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투브, 가짜뉴스, 광고수익금-반평화, 불의, 거짓)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끝이 나질 않고 여전히 폭력의 망치소리에 가슴을 저며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물어보았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강일동의 M교회가 세습을 하면서, 세습을 승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거기에 반대하면 사탄이라고 규정까지 했다고 한다. 그 일은 그 교회의 일이지, 우리랑 상관없다고 외면한다.
가정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이혼에 대해서 말이다. 이혼한 사람이라고 정죄하거나 외면할 수 없다. 그 가운데 받은 상처와 혼란과 방황은 교회가 감싸 안고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피치 못 하게 이혼할 수도 있다.’고 묵인하는 것 같다.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신앙상담을 하다가 방법이 없으니까, 이혼하라고 목회자가 결론을 내리더라고 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자기 십자가로 여기고 참고 견디고 인내하며 시련을 견디는 것은 어떤가?
부모공경에 대해서는 어떤가? 괴팍한 부모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그럴 땐 현실적으로 부모를 외면해도 된다고 상황논리를 말한다. 그런데 성도들은 속상하고 화가 나더라도 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십자가를 감당하기를 주님께서 기대하신다.
물론 실패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경우에 더 따뜻하고 정성스럽게 영혼을 돌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을 구분하고, 정말 하나님의 뜻과 의가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