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1일, 성령감림절후 22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공중을 날던 새들도 나뭇가지에서 쉼을 청하듯, 주님 안에 참 평안과 위로와 쉼을 청하오니, 우리를 회복시키며 강건케 하사 온전한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온유한 손길로 위로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요.(요일1:9)

 

 

  1. 복음의 눈을 열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왜 자주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을까?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하심을 경험했으면서도 말이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홍해를 건넜다.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질병을 고쳐주셨다. 광야에는 길이 없는 것 같지만, 마땅히 목적을 둔 길도 없었기에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어려울 때마다 실의에 빠졌을까? 하나님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일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일까?

 

성경은 이사야에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6:9)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눈과 귀가 어둡기 때문이다. 보고도 못 보고, 듣고도 못 본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6)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통해 복음의 눈과 귀를 열기를 바라신다.

 

 

  1. 사르밧으로 간 엘리야

엘리야는 복음의 눈은 가진 사람이었다. 사르밧 과부를 보자, 그에게 비친 하나님을 봤다. 그의 행색이나 모습은 남루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봤다.

극심한 가뭄에 목마름과 굶주림 속에서 사르밧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듣고 왔다. 거기에 돕는 손길을 예배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를 도와 줄 사람은 소유가 넉넉하고 풍성한 사람이 아니다. 여유라도 있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사르밧 과부다. 그는 여유가 없다. 가난한 자에게 참 가혹한 기대가 아닐까? 엘리야는 나름 기대하는 바가 있었을 텐데 생각했던 것과 참 달라서 놀랐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건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봤다.

 

자, 자세히 살펴보자.

수 년 동안 이스라엘에 비도 이슬도 없었다. 엘리야는 당분간 그릿 시냇가 근처에서 지냈는데, 이 때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날라다 주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듯이,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었다. 하나님께서 궁핍한 처지에 있는 이를 붙드실 때에도 이렇게 하신다.

 

상황이 더 악화됐다. 그릿 시내도 마르고 말았다. 이런 바람을 가질 때가 있다. 빨리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해지면 좋겠다는 기대 말이다. 그런데 어려움이 지속되고 상황이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닫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 좁은 눈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대결, 하나님과 악한 세계, 세력과의 대결은 이렇게 보일 때가 많다. 거대(巨大) 악(惡)이나 인간의 죄(罪)를 치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단순히 고통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벌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가학적인 분이 아니시다. 정화의 과정, 고름을 짜내고 새살이 돋는 과정, 치유의 과정 자체가 아프게 느껴지지만 그래야 새로워지고 살 수 있게 디는 것이다. 인생에서 고통이나 고난을 겪는 것은 믿음으로 보자면 복음이다.

 

 

  1. 우상을 정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엘리야더러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신다. 거기서 한 과부를 통해서 음식을 주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 여기가 어디인가? 시돈은 이세벨의 고향이다. 이세벨은 오므리 왕조 아합의 권력 뒤에서 국가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이었다. 당시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풍요와 다산의 신이 바알과 앗세라이다. 그 핵심인물은 고향에서 아세라 우상을 가져왔고, 세상에 퍼뜨렸다. 우상을 전국에 퍼뜨리면서 풍요와 번영을 약속했다. 대신에 하나님의 사람들(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제거하고 멸했다고 열왕기상18:4의 말씀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가보니까 어떠한가? 풍요와 다산은커녕 가뭄과 기근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과부이다. 그는 성문 근처에서 잔가지를 줍고 있었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얼마나 비루하고 남루했을지 생각해보라. 조금 남은 음식재료로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자식과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음식을 아끼고 아끼며 최대한 아껴서 먹느라 몸은 비쩍 말랐다. 어쩌면 잔가지 주을 기력도 없다.

바알과 아세라가 우상이 아니라 진짜 신이라면 왜 이런 이들을 내버려두는가? 즉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우상의 실체와 그것을 내세워 이익을 도모하는 이들의 실상을 드러내는 내용을 첨가하자면, 이 와중에도 아합왕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850명이 넘는다. 그 비용을 생각해보라. 대신에 나귀머리 하나에 은 80세겔, 비둘기 똥이라 불리는 식재료 4분의 1갑에 은 5세겔이었다. 성문 어귀에 살던 나병환자들이 아람군대에 항복해서 한 끼라도 먹어, 굶주림을 모면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하다.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을 통해 우상에 대한 믿음의 허상과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상의 존재는 어떤가? 사실 우상의 정체는 이렇다. 예레미야는 한 마디로 “기술공이 정교한 솜씨로 (깎아 만들거나 부어) 만든 것이니,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는 생기가 없음이라.”(렘100:9,14) 그러나 인간을 지배하는 위력은 막강하다. 왜 지배를 당하는가? 인간의 죄와 욕망 때문이다.

그런데 기억하라. 우상은 허상이며 거짓이다.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심어주는 믿음은 무엇인가? 비, 햇빛, 바람, 풍요와 다산. 그런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단 한 방울의 비나 이슬도 내리지 않는다. 풍요와 다산을 비롯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알이나 아세라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시대가 악하고 사회가 불행한 것은 모두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못하고 인간의 번영과 장밋빛 청사진을 제공해주는 우상 섬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 못하고 인간의 욕심과 사리사욕을 따라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했다. “바알과 아세라는 신이 아니다.” 다시 한 번 선명한 재인식과 깨달음. 우상은 과부를 돌보지 않지만, 아니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돌보신다. 긍휼히 여기신다. 궁핍과 가난한 과부가 고통 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역사를 드러내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곧 그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엘리야의 가슴이 뛰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라.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주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여러분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래서 저의 가슴도 뛴다.

 

  1.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믿으라.

엘리야는 성문에서 잔가지를 줍는 여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과부’라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을 좀 달라.’고 청한다. 곡간에서 인심(仁心) 나는 법인데, 가뭄에 물 한 방울도 인색할 수 있던 때다. 그가 가지러 가는 모습을 보니,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떡(음식)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에게는 떡은 없었고, 통에 가루 조금, 병에 기름 조금 있었다. 그것을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을 게 없어 굶어죽는 일만 남았다. 12절에 “그 후에는 죽으리라.”는 말이 자살할 결심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이기에, 마지막 희망과 기대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그 희망과 기대는 곧 끝날 위기를 맞고 있다.

 

엘리야는 그를 안심시킨다. 13절을 읽어보자.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자세히 읽어보면, “당신은 굶더라도 내게로 가져오시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먼저 엘리야에게 주고, 과부도 식사를 하라고 했다.

마지막 희망의 위기 앞에 용기를 내라는 음성으로 들린다. 14절에서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에, 지면에 비가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셨다.”고 말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것을 먹고 끝장인데, 무슨 소린가 싶을 수도 있다. 괜한 희망과 용기를 주려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

그런데 과부의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순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굉장히 망설이고 갈등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순종했을 때 역사가 일어났다. 순종은 능력의 통로다. 순종이 없다면 구멍 난 통로나 송수관처럼 능력이 줄줄이 새고 만다.

마지막 희망과 기대를 마지막 소유에 두는 사람은 어리석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원치 않으신다. 순종과 충성으로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 복되고 현명한 자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사르밧 과부를 보면, 까마귀들은 어쩌면 어려울 때에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먼저 대접하려는 익명의 성도들인지도 모른다. 아니 율법대로 나그네 대접하기를 천사들을 대하듯 했던 소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서 보면, 고난과 절망의 순간에 일용할 양식에 대한 해결책 보다는 희망과 용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의 눈으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신다. 그게 믿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했다. 믿으면 보인다.

 

정말 신기하게도 엘리야의 말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비 한 방울,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지만, 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끝장날 것 같은 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 힘과 용기를 내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한 길이 막히면 아홉 길이 열린다.

안 될 것 같아도 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사르밧 과부가 이것을 증거한다. 그는 그에게 기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염치가 있지, 어떻게 그의 음식을 달라고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것이 놓인 사람이었다. 그는 기대해도 좋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다. 세상적으로 가진 것 많지 않고 힘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와 긍휼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이다.

 

현실이 어렵다. 힘들다. 궁핍하다. 문제투성이다. 망막하다. 그러나

엘리야가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보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그런 믿음의 눈을 뜨라.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다.

세상의 우상이 뭘까 생각해보고, 거기에 사로잡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와 역사를 믿으며 순종하고 충성하는 믿음을 결단하라. 여러분을 지배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거짓된 것이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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