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고마우신 하나님 이시간 우리를 부르시고 초대하시니 감사합니다. 불볕더위가 우리의 심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코로나의 대유행에 우리의 심령이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믿음의 닻을 주님께 내리고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살기를 바라며 이 자리에 섰사오니, 시냇가에 심은 나무들처럼 푸른 생명의 기운을 북돋아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

 

 

  1. 하나님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한 세상

로마의 공화정 말기에 귀족층이 연간 지출하는 비용은 60만 세스테르티우스(약 15만 데나리온)였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공평한 세상의 비전으로 본다면 너무나 기형적이다. 자칫 15만 명의 생계비에 달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1 데나리온은 한 가족의 생계비이다. 4인 가족일 경우 60만 명이다. 실제로는 더 엄청난 격차의 돈을 극소수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소비하고 과시하며 살았다는 말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이런 격차는 권력의 격차(隔差)이기도 했다.

 

로마서1:26-27에 이런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얼핏 생각하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는 것 같다. 만연해 있으면 얼마나 만연해 있다는 것일까? 그렇다기 보다는 여기에는 귀족과 부유한 사람들이 돈으로 사회적 약자를 사들여 성적으로 농락하고 있는 그릇된 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성행했음도 문제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폭력이 돈과 권력으로 강압적으로 일어났다는 게 더 큰 문제다. PAX ROMANA, 대가족을 추구했던 FAMILIA, 이런 것과는 달리, 한 제국과 사회가 표방하고 있는 이상의 그 이면은 대부분 핵가족 상태였고, 이혼으로 인한 가족 해체율도 매우 높았으며, 가족이나 자녀를 노예로, 강제로 팔아야 했고, 사들였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이중에는 변종입양 같은 것들이 있었다. 엄청난 재력과 자신의 권력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지위와 힘을 앞세워 한 개인의 인생과 그 존재를 파탄에 이르게 하면서도, 돈으로 모든 것을 무마시키면 그만인 세상을 엄연히 용납하지 않으신다.

 

로마서1:25에서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증거하고 있는데, 물질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도 이 말씀에 속한다.

이어서 로마서1:32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세상에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중요한 주의를 주고 있다.

 

 

  1. 흔들리기 쉬운 믿음

로마서의 수신자는 로마시에 거류하는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내의 그리스도파였던 엘리트 집단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로마서의 난이도나 수준을 보면 물론이거니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들은 로마에서 클라디우스 황제의 박해를 피해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과 동역자가 되었고, 다시 로마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학식이 풍부하고 언변이 능한 아볼로를 집으로 초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가르치고 성령세례에 대해서도 가르쳐서 훈련시켰던 것을 보면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엘리트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로마에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엘리트다. 적어도 로마의 세계관과 하나님의 세계관이 어떻게 다른지, 그 다름을 구별하고, 세상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기독교인, 헬라파 기독교인, 유대교로 전향한 이방인 등 종교적인 계층도 다양했다. 감리교, 장로교, 장로교 중에서도 예장과 기장, 예장에서도 합동과 통합 또 그 속에서 문자주의적인 보수와 개혁, 진보로 나뉜다. 그만큼 믿음의 색채도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믿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곧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쟁론에 빠지고 소모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엘리트고 지식을 가졌어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세상에 대해서 영향력있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스스로 분열하고 싸우다가 세상으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앙과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교리적 논쟁이 분명한 신앙과 믿음을 추구하나 오히려 신앙적인 혼란을 가중시킨다.

 

또 한 가지 신앙적인 가치와 믿음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상황이 있었다. 네로 황제의 등장이다. 우리가 폭군으로 알고 있다. 그는 귀족들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 대중적인 정책들을 펴나갔다. 귀족의 입장에서 네로는 폭군이었지만 빈부격차와 귀족들의 횡포와 불의에 고통을 당하던 대중들은 네로를 환영하며 고무됐다. 황제 메시아 주의가 세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황제가 위에서 베푸는 그리스도였다면, 예수는 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였다. 어떤 것을 사람들이 더 좋아할까? 사람들은 쉽게 예수 그리스도 보다 황제 그리스도를 더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힘 없고 갖지 못한 자들에게 포악한 세상, 대중들의 편에서 황제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기대, 신앙인들은 흔들렸다.

 

오늘 우리는 신앙의 위기를 맞고 있다. 세상의 번영, 정치적 혼란, 가치관과 세계관의 혼미함, 펜데믹 상황,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믿음을 갖는 일은 비현실적인 일이 돼버렸고, 당장 눈에 보이는 실존의 방법을 찾아 세상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 지경이다.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그 인식이 희미해지지는 않는지 의문이기도 하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신앙, 자기가 믿는 대로 멘탈을 유지하겠다는 것과는 달랐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영광을 위해 행하고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종과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했다. 할례를 받고 선민의식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백성? 그러면 되는 것일까? 로마서를 이신득의라는 논문정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이 더 중요했다. 로마라는 세상과 황제라는 우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하나님 편에서 분명한 구원의 정체성을 가지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선포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요청된 것이다. 구원은 ‘행함이냐? 믿음이냐?’라는 차원의 논쟁에 그친다면 로마서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1. 믿음을 지킨 신앙인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혹은 개종한 헬라인에게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희망이었다. 그의 인생에는 기근이 있었다. 이집트에서 경험한 강자의 위협을 경험하기도 했다. 집안 내의 갈등도 있었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인생의 제목도 있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했다.”(20),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21)고 바울은 내다보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로마서를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의문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는가? 하갈은 무엇이며, 이스마엘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배울 점이 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가졌다. 하나님께 이것저것 소망하는 것을 달라고 구하는 기복적인 믿음이 아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할 때, – 지난 번에도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많은 것을 이루고 업적을 세운 뒤에 떠난 것이 아니라, 정처없이 나그네 신세가 돼야 했던 삶의 남루함 자체가 그였다. – 복된 존재가 되게 해주실 하나님을 믿었다.

더 이상 아들을 바랄 수 없는 중에, 인생의 마무리를 져야하는 시기에 두려움과 슬픔과 걱정을 가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고 위로와 평강을 얻었다. 그리고 사람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름을 믿었다. 그는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뭇별을 셀 수 없음 같이 그의 몸에서 난 상속자에 대한 계획이 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창세기15:6은 이렇게 증거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자신의 생각과 방법보다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이 있음에 자신이 겪고 있던 두려움, 열패감, 낙심을 버렸다. 하나님의 방법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이는 알량한 자존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자존감이 그를 붙드는 것이다.

사라의 경수가 끊어져 이제는 더 이상 인간적인 기대나 바람을 가질 수 없을 때,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또 하나님의 비밀과 약속을 나그네로부터 전해들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그는 자기만 살겠다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나라와 사람들을 위해 구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는 아들은 없었지만 이미 강대한 나라였고 찬하만민의 복에 책임감을 갖는 사람이었다.

 

또 아브라함에게 배울 점은 그는 나그네 같은 인생과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삶과 인생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하고 있는 말씀 중에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 뭔가를 이루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약속이 성취된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생각대로 하고 믿음을 저버리기 쉬운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믿음을 지켰다. 아브라함은 세상풍조에 믿음을 지키고, 자신의 연약함과 운명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해주었다. 그렇지 못하게 되면 세상의 염려, 근심, 걱정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것과 우상의 관계를 맺게 된다. 잡초처럼 욕심, 추악, 불의, 거짓이 퍼지고, 삶의 문제와 시련들이 쌓인다. 생각해보라.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이겨내던 것들, 견딜 수 있고 마침내 승리했던 것들도, 이겨내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고 상처를 받는다.

 

바울은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세상이 되었고, 세상의 권력과 돈이 지배하는 것 같고, 세상의 정책과 방향이 믿음을 흔들어 놓는 상황, 분열과 갈등을 겪게 만드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온전한 관계를 바라시고,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신다. 세상 핑계, 상황 핑계, 사람 핑계를 대느라 믿음 없이 행해서는 안된다. 죽은 자 가운데에서 우리 주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시기 바란다. 또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방송인 주영훈이 이런 간증을 들려주었다. 그가 무명의 시절을 지나 유명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을 떠난 삶을 어느새 즐기고 있었다. 참된 기쁨 없이 우울증세를 보였다.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것은 모르고, 늘 유재석, 신동엽, 강호동을 보면서 부러워하고 감사를 몰랐다.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서 정말 기쁘고 복된 자신을 찾았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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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지키기 험난한 시기에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믿고 은혜를 사모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시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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