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30일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홍의 단풍이 파란 잎사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에, 심령의 변화를 꿈꾸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닦여지고 부서지고 녹아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는 미쁘사 너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3:3)
올무에서 벗어났도다(시124:1-8)
명절후기담을 통한 인사
식물들 중에 열매를 내는 종자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섭리다.
가족들과의 친지와의 만남을 통해 저마다 참 어렵고, 힘든 상황들을 만나지만 용케 이기며 서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감당하며 서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누구는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누구는 화려한 꽃은 피우지 못했지만 열매 맺느라 애쓰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1)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던 순간. 하나님이 없었다면 안됐을 만한 순간.
① 아브라함은 심한 기근 때문에 애굽까지 표류하듯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 생존을 위해서 그랬다지만, 애굽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비겁하고 비굴한 처사였다. 애굽왕 바로는 곧바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궁으로 불러들여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② 야곱은 라반이나 에서와의 문제뿐만 아니라 세겜에서 딸 디나의 일로 벌어진 일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했다. 야곱의 두 아들이 앞뒤 가려보지도 않고 세겜의 남자들을 도륙했기 때문에 그 보복이 곧 불어닥칠 위기에 있었다.
③ 하갈은 사라의 집에서 쫓겨나 이스마엘과 광야에서 먹을 것 마실 것 없이 고사될 위기에 있었다. 이런 죽음은 산채로 죽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자식과 함께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터질 듯 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에 이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했고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었다. 중차대한 때 큰 병에 걸려 죽게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 하나님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아니 대부분의 사람은 복을 받고 인생이 잘되며, 승승장구하기 이전에 말할 수 없는 삶의 고통과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죽을만한 어려움이었다.
④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출애굽시대의 모세와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가나안 정착 후에도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위협과 괴롭힘이 심했고 계속됐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피말리는 정신적인 고통과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
모두가 죽을만한 고통과 어려움과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승리하며 복을 받는다. 세상적인 표현으로 저절로 우연히 된 일이라거나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심중에 찾아오셨다. 자기 ‘안의 힘’보다 ‘밖의 힘’이 더 클 때, 하나님은 ‘밖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자기 안에 주셔서 능히 견디고 이기며 승리하게 하셨다. 눈을 뜨게 하셨고 지혜를 발견하게 하셨으며, 때로는 대적자들이나 강포한 사람들에게는 직접 찾아가셔서 그 마음을 꺾어 놓으실 때도 있었다. 사람들로부터 낙인찍히고 오해받는 순간에도 결국에는 진실과 정의가 드러나게 하셨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2)
어떻게 됐을까? 3-5을 보라.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물이 휩쓸며 시내가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 시내, 넘치는 물. 물은 삶을 덮는 문제, 고난, 대적자들의 방해, 훼방꾼을 의미한다. 물은 점차 시내가 되고, 시내는 더 불어나 넘치는 물이 된다. 문제는 더 커지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긁어 부스럼이 된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인생이 망하고 영혼이 멸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나님은 오묘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신다. 그래서 시인은 6절에서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고백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김기석 목사님이 미국에 집회를 다녀오면서 대북서지역(Great Northwest Episcopal Area) 그랜트 하기야(Grant Hagiya) 감독과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다. 미국 감리교회 서부지역 평신도 지도자 수련회에 참석했던 설교 중에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2004년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 동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때 미국 서부 지역의 감리교도들이 복구 지원을 위해 팀을 꾸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는 당시 감리사였는데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싶은 열의는 있었지만 솜씨가 형편없어서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나면 꼭 다른 사람이 마무리를 해야 했다. 하루는 바람에 날아간 어느 집 지붕을 고쳐주라는 지시가 본부에서 내려왔다. 그는 봉사자들과 함께, 그들을 이끌고 그 집에 갔다. 온종일 지붕을 고쳤다. 일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차 한 대가 그 현장으로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봉사자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 집주인 부부였다. 그들은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다면서 어쨌든 집으로 좀 들어오시라고 봉사자들을 초대했다. 물이 잔뜩 고인 집은 앉을 공간조차 없었다. 나중에 봉사자들은 자기들이 엉뚱한 주소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랜트 하기야 목사님은 참 좋은 분이시지만 몸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토록 실수가 잦았다.
그들 부부는 망설임 끝에 자기들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삶의 희망은 허물어졌고 살아갈 힘도 잃었다. 그래서 둘은 자기들에게 의미 있는 마지막 장소로 돌아와 그 밤에 세상을 하직하기로 작정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부부는 이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연민에 사로잡힌 봉사자들은 그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고는 함께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다. 기도를 마친 후 그들은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곧 다시 돌아와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잘못된 주소를 들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착오를 통해 두 생명을 구하셨다.
돕는 자에게나 도움을 받았던 자에게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물론 시인은 사람 관계에서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사냥꾼과 같이 그 존재를 삼키려는 자에 대해 하나님이 편이 되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시는 것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생 전체를 통털어서도 마찬가지다.
연약하고 힘이 없고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하나님은 사람의 실수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사용하신다. 나의 공로나 잘한 일, 그럴만한 일 때문이 아니다.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 하나님을 바라보길 바라신다. 시인은 8절에서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인가? 상투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힘과 능력과 소망이 생긴다.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이 여호와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 존재를 바라봄이다. 그 존재를 의지함이다. 그 존재를 영접하고 받아들임이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그 올무가 끊어져 벗어난 새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우리가 바라보고 의지하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아브라함을 애굽의 바로라고 하는 강탈의 이름에서 건지셨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을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셨다. 라반, 에서, 세겜은 야곱에게 보복의 이름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그 보복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영적인 군대가 먼저 달려감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하갈에게 광야로 쫓겨남은 목마르고 굶주린 채 고사(枯死)되는 공포였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새비전과 희망에 눈뜨는 우물이었다. 히스기야에게 앗수르의 이름은 욱여쌈을 당하는, 길이 막힌 죽음과 패망의 현실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가장 강력한 피할 길이었으며 산성이었다.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늘 마음과 신앙과 영혼을 천지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시편43, 44편에서 “내 영혼아 네가 어지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고백했던 것처럼 이 시간 그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통이 있고 없고가 아니다, 세상적인 복을 받고 안받고가 아니다. 어둡고 희망의 빛이 꺼져버린 세상에서 복음의 빛 부여잡고 견디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