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4. / 대림절 3주)
말씀으로 빛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비추시는 하나님, 강림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의미와 뜻을 상실하고 나면 너무나 어둡고 메마르고 차갑다는 알고, 주님의 뜻과 사랑을 얻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희망을 위한 또 다른 행보
대림절 3째 주를 맞이했다. 희망을 품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참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1. 기다림의 희망
어느 초등학교 창가에 놓여있던, 어린이들의 작품이 떠올랐다. 찰흙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사람을 만든 것도 있었고, 동물을 만든 것도 있었다. 그 동심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정화됐다.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서, 찰흙덩어리가 작품이 됐다. ‘덩어리가 형상이 됐다는 것’ 그 의미를 생각해보라.
저의 첫 목회지는 창원 변두리에 있는 동읍이라는 마을이었다. 그 때, 아이들과 정병산이라는 곳에 가끔 오르곤 했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면, 돌무더기가 있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그 산을 오르면서, 저마다 뭔가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돌을 얹어 세운 탑이 있었다. 정성과 염원하는 마음은 돌무더기를 돌탑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은 희망탑이었다. 달리 말할 수도 있다. 희망은 돌무더기를 탑으로 바꾸는 역사를 만든다. 아시는가? 그 작은 탑들은 야곱의 사다리와도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늘까지 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 영적인 체험과 능력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그 때, 그곳을 오르내리면서, 기도화살을 날렸던 생각이 난다. ‘저 탑에 담긴 기원하는 마음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돌무더기가 돌탑이 되었듯이, 찰흙덩어리가 아이들의 동심이 묻어난 작품이 된 것을 보니, 그래서 마음이 정화됐나 보다.
그런데 찰흙으로 만든 아이들 작품을 보면서, 발견한 게 있다. 어느 작품은 갈라져서 금이 가 있었고, 어느 작품은 분명히 붙어있었을 부분이 떨어져 있는 것도 있었다. 또 그런가하면, 금간 데 없이, 떨어진 데, 없이 잘 말라있는 것도 있었다. 상황이 이해가 되시는가? 왜 그랬을까?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대지에 발을 붙이고, 땅의 토산물을 먹으며 살다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빨리 뭔가를 만들어주시고 이루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참고 오래 견디며, 그 인내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한 걸작품으로 만드시는 것이다.
니코스카잔차키스의 이야기를 해드린 바 있다. 누에에서 나비가 나오는 과정을 신비롭게 지켜보던 그는, 다음의 누에에서 나비가 또다시 나오는 것을 바라보며 그 나비가 나와 날개를 펴는 과정을 입김을 불어 도와줬다. 한번 관찰을 하고 그 과정을 봤기에, 그것을 앞당겨주려는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 나비는 날개짓을 위한 뼈마디에 힘을 얻지 못하고 결국은 날지도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러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한다. “인간은 기다려주지 못하지만 신은 기다려준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참으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갈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스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존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서서히 우리를 빚으시고 만들어 가신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오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저 역시 여러분에게, 속사람으로 강건케 되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여러분에게 충만케 되며 온전케 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참 좋은 하나님이시다. 그 계획이 선하며, 은혜가 충만하신 줄 믿으시기 바란다.
바울의 이 기도가 인간적인 기도였을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드린 기도이다. 주님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룬 줄 믿으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바울의 기도이지만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러분, 뭔가 성급하게 이뤄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 기다림은 인내와 견딤으로 희망을 이룬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좋은 계획과 선하신 뜻을 가지고 계시다. 늘 감사하라.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
- 희망의 또 다른 행보
세례 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차분히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예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그 오실 주님을 증거했다.
저는 여기서, 세례요한의 이 모습에서 희망에 대한 또 다른 행보를 발견한다. 무엇인가? 바로 주님을 증거하는 자였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희망은 가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품을 수 있다. 그것은 분명 힘이 되고, 능력이 된다.
우리의 존재가 어둠 아닌가? 어둠이 있지 않은가? 무지가 있다. 두려움이 있다. 죄가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둠이다. 때로는 관계의 어둠이 있고, 자기 행실에 어둠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빛이 되시고, 성경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희망을 위한 또 다른 행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한복음 1:5은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아니 싫어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11절에는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증거하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통해서 어둠이 두려워 떨고, 물러간다. 세상이 밝아진다. 삶이 밝아진다. 심령이 밝아진다. 그리스도의 희망과 소망이 퍼져간다.
19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요단강변에서 활동하던 세례요한에게 사람을 보낸다. 제사장들과 레위들이었다. 그에게 ‘네가 누구냐?’ 심문하듯 물었고 그의 정체를 알고자 했다. 왜? 어둠이 빛을 싫어하며, 두려워하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한 것은, 그들 앞에 자신을 세우거나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는 빛되신 주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보냄 받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선지자냐?’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정에 빠지기 쉬운 점을 발견한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를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나를 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의 공로, 나의 자랑, 나의 의, 나의 경험 같은 것들이다. 그러다가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잊고 결국 자기를 드러내려는 어리석은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요한은 끝까지 자기를 드러내려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물론 23절을 보면,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대목을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드러냈을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주님을 증거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에게 예수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수 있다. 확신이 덜할 수도 있다. 믿음이 약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통해서 체험과 역사와 믿음이 오히려 더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이상한가? 확신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증거한다는 게 말이다.
‘간증’과 ‘증거’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물론 간증의 은혜는 ‘증거’하는데 더 큰 힘을 주고 확신을 준다. 간증은 내가 체험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증거는 내 경험과 상식과 체험 밖에 있다. 아니, 내 경험 체험, 상식보다 크다. 간증은 주님의 체험에 대한 일부를 전할 뿐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경험해서 증거한 것인가? 체험했기에 증거한 것인가? 증거는 성령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다. 증거를 하다보니, 간증이 생겼고, 고백하다보니 체험이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비밀이요. 비결이다.
말한 대로 된다고 말한다. 말이 씨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말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원리를 적용하자면, 예수의 증거가 우리의 간증으로 바뀌는 것 아닌가?
- 산소망 : 증거를 간증으로
이 대림절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음과 확신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간증이 생기길 원한다. 그 소망, 희망이 확장되고 복음이 퍼지길 원한다.
정말 증거가 간증이 될 수 있을까? 증거가 희망을 위한 또 다른 행보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28절을 보자.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 구체적인 장소를 지목한 이유가 무엇일까? 공관복음에는 단순히 요단강변에서 일어난 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베다니’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석서들은 지리적인 독법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베다니아’, ‘베다바라’, ‘베데바라’ 그래서 세례요한이 활동했던 지리적 위치와 장소에 대해 고증하려고 한다.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시원하게 설명되지 못한다. 왜 장소를 언급했을까? 이유가 뭘까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적으로 보자면 플롯이다. 암시이다. ‘일어난 일이라’ 미완료시제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베다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을 전하면서, 뭔가 중요한 일을 전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묻자. 27절에서 세례요한은 왜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을까? 예수님을 아직 만나본적도 없는 그가 무엇을 알고 이렇게 말했던 것일까? 그전에 그는 26절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분에 대해 체험하고 만나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일까?
아니다. 믿음으로 증거한 것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풂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 씻음으로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감잡았는가?
베다니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던 곳이다. 그는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나 지났고, 그 시간이면 이미 송장의 썩은 냄새가 났다. 그 누이 마르다도 벌써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선포된 주님의 말씀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이었고,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죽음의 동굴에서 불러내셨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세례요한은 세례를 통해 정화된 것, 깨끗함, 성결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증거하던 곳, 베다니에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이 나타났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무엇인가? 요한복음 1장의 핵심적인 증거의 키워드는 생명의 빛되신 주님이다. 그 증거가 간증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다. 나사로의 죽음을 생리학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생리학적인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나사로에 대한 것만 생각하는 것은 요한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진실을 반의 반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은 나사로와 같다. 상처를 싸매기 위한 방편으로 붕대를 칭칭 감았다. 죽음의 냄새가 난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무슨 냄새가 나겠는가? 생명의 냄새가 났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있으나, 마른 뼈와 같고, ‘열심’이 있으나 메마른 자는 아닌가? 열정을 품고자 하나, 자꾸만 마음이 식고, 성령충만함과 기쁨이 가득하고자 하나 흥이 나질 않아 실망하는가? 비결이 있다. 예수 생명이 내게 있으면 된다. 예수 생명이 내게 있어 성령이 불타게 된다.
연약한 질그릇 같고, 빨리 뭔가 이루고 싶으나, 결과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아 낙담하는가?
도자기를 구워도, 초벌구이를 하려고 해도, 흙으로 만든 질그릇이 서서히 굳어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걸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셨다가 예수 생명의 불과 빛으로 우리를 아름답게 구워내실 것이다. 그 희망찬 행보를 위해, 중요한 비결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간증과 체험과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은 바라신다.
대림절 희망을 위한 또 다른 행보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던 우리가 생명으로 이르며, 죽음의 냄새가 나던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