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넷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4.12.21. / 강림절 4주)
용서의 말씀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은혜 받을 자여”
모항공사 땅콩회항 사건으로 전 국민적 분노가 가득하다. 이 자리에서까지 부사장이라는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게 자라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타인의 입장에서 한번쯤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한 무례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무장의 가족관계는 잘 모르지만 그도 분명 누군가의 사랑받는 남편이고, 아버지였을텐데, 그 모욕감을 당했을 때 어땠을까, 짐작만 해도 참담함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그동안 ‘갑’과 ‘을’의 문제로 지칭되어오던 사회문제가 일시적으로 폭발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라서 작은 바늘구멍 같다. 그런데 그 작은 바늘구멍 같은 사건에 사회적인 분노의 풍선이 터진 격이다.
회유가 있었다고 한다. 강압에 의해서 사무장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로 사건경위를 써야 했다. 어떻게 이런 과정들이 진행됐는지, 언론을 통해 밝혀진 것을 보면서 마치 이사야를 통해 고발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것 같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줄로 함과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는도다.”(사5:18,23)
사무장의 말이 제게는 큰 울림이 됐다. 문제가 왜곡되고 회유가 일어나 아무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고, 조직의 거대한 힘 앞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도 스스로 자존감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진실이 감추어진다고 해도, 아무도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마저 타협하면 정말 비참할 거라는 말을 담담히 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조직에서 제거되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문제다. 처자식이 있는데, 생계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큰 상처를 받고 피해를 당하여 살기 싫을 수도 있다. 누구나 비겁하고 겁쟁이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유대의 왕은 헤롯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권과 그 자리를 위해서 반생명적, 반평화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1) 성경에 나오는 대대적인 유아살해와 학살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고, 그가 추구하고 건설했던 문화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2) 광장과 대경기장을 짓고 ‘가이사랴’(로마 황제 가이사의 이름을 따서) 같은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사회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 통제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사회적인 뭇매를 맞도록 했다. 여기서 자세히 다 말할 수 없지만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찾아와서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전하고 있다. 통제와 예측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것을 위험하게 생각했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3) ‘가이사랴’라는 도시는 외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가진 헤롯의 성격을 보여준다. 오늘의 전시행정을 연상케 한다.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고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불합리했다. 그리고 4) 그리고 부요하고 잘 사는 왕국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상업화를 촉진시켰다. 자연히 사회에서 이탈하는 절대적인 빈곤층, ‘을’의 사람들이 발생했고, 특별한 신분과 차별적인 계층을 강화하면서 왕국을 지배해 나갔다. 성서의 배경과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예수님 공생에 당시의 헤롯 안티파스는 그 아버지 헤롯을 꼭 빼닮았다고 한다.
그런데 저는 헤롯의 아들 안티파스만 빼닮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대와 역사와 나라가 빼닮았다고 생각한다.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일이 허다하다. 이에 상처받고 고통받고 괴롬을 당한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독, 불의, 추함, 거짓이라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서있다.
이런 상황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이름까지 말해준다. 바로 예수.
오늘의 말씀 속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들려오는 아기 예수의 나심에 관한 이야기는 여느 때와는 달리 새롭게 들려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요, 소망이다. 기쁜 소식이요, 복음이다.
마리아는 놀랐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몸에서 잉태되어 아기를 낳게 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마태복음은 정혼한 여인을 의심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믿음을 주고 있다. 그래서 누가와 마태의 이해도는 사뭇 다르다. 누가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마태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의심을 지우고 믿음을 갖도록 요청하고 있다. 반면, 누가는 의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요, 영광이요, 평화를 위한 은총으로 나타내고 있다.
누가복음에 있어서만큼은 동정녀 마리아 탄생의 과학적 논증은 의미 없다. 요한복음의 견해는 이것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이것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37). 어느 사이비 단체에서는 예수의 피가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천 조각에서 DNA를 조사했는데, 염색체가 23개만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남자에게서 받았어야 될 23개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 피는 살아있는 것으로 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밝혀냈다 한다. 그러니 예수님의 탄생은 동정녀에게 났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일까? 광신자들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방영된 분명한 진실이라고 하는데, 앞뒤 잘라먹는 주장이다. 오히려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그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지, 동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것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고백하면서 요한1:13에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마리아의 DNA는 사람의 육정과 혈통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로마서 1:3에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요셉의 씨가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라 왕의 신분을 타고난 고귀한 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오신다는 것이다.
이 신비한 사건은 전적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으로 우리가 바라보고 믿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v.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권세, 능력을 가장 낮은 곳에 임하도록 주셨다는 것이다. 세상권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 말이다. 헤롯이 유아살해를 명하면서까지 찾고 싶었으나 찾을 수 없었던 곳. 헤롯이 동방박사들의 뒤를 미행하도록 사람(비밀경찰)을 붙이지 않았을까? 안그랬으리라고 상상할 수 없다. 온 예루살렘이 소동할정도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아기 예수를 못찾았으며, 잡지 못했을까? 권력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구유에서 나실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기로 오시는 곳은 세상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낮은 곳이다. 오히려 누추하기까지 한 곳이다. 그곳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
대림절 마지막 주를 지나면서 제 스스로 정말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고 모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세상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모든 가치관과 생각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각이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모실 곳이 없는 것은 아닌가? 그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봤다.
여러분 처녀의 몸에서,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는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 여러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하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을 보여준다. 마태는 이 사건을 자칫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사건으로 여기고, 변론하면서 수태고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누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평화의 얼굴로 찾아오시고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전하고 있다. 그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선물로 인식되고 믿기를 원하고 있다. ‘은혜 받을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28), ‘이런 인사가 어찌 함인가?’(v.29) ‘은혜받을 자’, ‘이런 인사’
주님은 악한 세상의 권세가 지배적일 때, 마리아에게 오셔서, 새생명의 탄생의 은총으로 인사를 건네셨다. 이것을 또한 온 인류와 우리에게 전하는 은총의 인사이다.
오늘 하나님은 예수의 탄생과 말씀으로 육신이 되신 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동일하게 다가오신다. “은혜 받을 자여” 이런 인사로 다가 와서, 예수님 당시와 동일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평화의 인사를 건네시고 우리의 심령과 마음을 두드리신다. 그리고 만나기를 원하신다.
2) 그 주님과 만났다면, 영접했다면, 또한 이 믿음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확고히 해야 한다. 뭔가? 그분은 통치자이시다. 32절을 보라.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라.’ ‘다윗의 왕위’란 이런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장 높고 위대하게 여기는 역사는 다윗 때이다. 아기 예수는 ‘다스리시는 자’이며, ‘그 나라를 영원무궁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세상 권세를 이기시고 사망권세까지 다스리시고 이기신다.
악한 권세와 세상이 이렇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 두려워한다.
어둠이 왜 빛을 싫어할까? 아기 예수님이 평화만 주신다고 생각하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주님은 내가 평화만을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물론 여기서의 칼은 ‘폭력’, ‘반평화’를 말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밤이 어둠이고 낮이 빛이라는 생각도 단세포적인 것이다. 낮이 더 어둠일 수 있고, 구름이 해를 가려 빛을 잃을 수도 있다. 오히려 밤이 초롱초롱 빛나는 우주성체들과 함께 더 소망이 빛날 수도 있다. 여기서의 어둠은 악이다. 욕심이다. 거짓이며 추악함이다. 폭력이며 반생명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통치함을 경험하며 주님 주시는 평화에 매이지 않는다면, 참 평화의 도구요,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이른다. 아기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자마다 빛이 내 안에 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믿으라. 그런데 우리 안에서, 세상에서 그 어둠을 몰아내고 정말 주님께서 자리하지 않으신다면, 세상의 악과 어둠은 예수님의 나심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리가 없다.
‘목사님,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고, 그 통치가 악한대요? 세상의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데요? 주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할 것이 있다.
악한 권세와 나라가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안하무인(眼下無人)격으로 그 횡포와 전횡을 휘두르는 사람이 걱정하는 게 뭔 줄 아는가? 하나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현존하심’이다. 어둠이 빛을 만나면 벌써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돌아다니실 때, 귀신들이 나와 먼저 굴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울이 다윗을 왜 박해하였나? 단순한 시기와 질투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데 사무엘상18장 28-29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은 이것이다. 모두 다 찾아보자.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신실히 믿는 자를 세상이 두려워한다. 어찌하려고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마음을 통치하시는 자 아닌가?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셨고, 정말 우리의 왕되심을 고백하기에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길 원한다. 갑의 횡포에 당했던 억울함도 이기기 바란다. 세상의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