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16. / 성령강림절 후 23주, 추수감사주일)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오곡이 자라게 하시고,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바람으로 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사랑의 하나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햇빛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절기에,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드리는 감사의 찬송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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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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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고마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직접 땅에 파종을 하고, 또 추수를 한다면 오늘의 감격이 더 클 텐데, 도시에서 허겁지겁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날은 좀 생뚱같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이 계절에 꼭 추수하는 열매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 삶에 대한 감사를 되짚어보며,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독불장군처럼 나 혼자 한 것은 없고, 나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과 수고가 있기에, 오늘 여기에 있음을 알고, 그 마음을 헤아려 살기를 원한다.

 

잘 아는 목사님이 신촌 세브란스병원 원목실에 있다.

소아병동을 담당하고 있는데…, (아픈 아이들과 부모를 보며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아이들이 아프지 않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감사의 제목이 참 많다. 첫째 아이 ;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조금 설명해주고 요령을 알려주면 빨리 이해한다.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한글을 터득하고, 요즘은 영어도 읽더라. 둘째 아이 ; 잘 먹고 잘 커주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다.

내게 없는 것만 생각하고 낙심하기보다,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아는 것도 삶의 지혜요, 자세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말에 공감을 하면서도, 이런 감사가 다른 부모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내가 감사하다고 자랑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고 늘 조심의 마음을 가지라.

 

우리의 감사는 무엇일까?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게 하신다. 번성케 하신다. 그리고 축복의 땅을 성취시켜 주시리라 약속한다.

 

  • 고난을 주심에 감사하라.

고난을 주심에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2). 40년 동안!

절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감사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인생은 허망하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 기자의 통찰이 있다. 아무 고통 없이 평안한 인생이 의미 있는 인생이 아니다. 고통을 이겨내고, 시련과 환난을 이겨낸 인생이 의미 있다. 어둠에서 찬란한 빛을 볼 것이다.

사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 물론 사람은 고통 없는 인생을 찾고자, 부와 명예와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 부와 명예와 행복이 인생의 의미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먹고 살기에 걱정 없을 만큼 창고와 곳간에 물질을 쌓아 들이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하라. 부와 명예가 마음의 평강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두려움과 염려를 사라지게 하지도 못한다. 편안하다, 편안하다 할 때에, 개인적인 종말은 도둑처럼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곳간에 많은 것을 비축하고 안심하는 이의 비유를 통해, 오늘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도로 찾으시면 어쩌겠느냐고 물으신다.

의미 있는 인생을 위해, 개인의 성취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기도 한다. 업적을 쌓고 공적을 쌓는다.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남을 꺾어 이긴 것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는 촌철살인과 같은 말을 한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전9:4),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도 아니라.”(전9:11)

 

오늘의 말씀 2절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고 말씀하고 있다.

참 인생의 의미와 기쁨은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깨달으며 얻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그 품에서 영원에 잇대어, 영생을 알게 하신다.

‘너를 낮추시며’ 우리가 비천에 처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일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시는 이유는 재앙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다. 인생의 광야를 걸으면서, 수많은 인생의 문제를 만나 겸손해지지 못하는 심령은 안타까운 인생이다. 내 뜻과 생각대로 되는가? 그렇게만 살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생이며 실수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을 꺾지 못하고, 수많은 불화 속에 살아간다.

‘너를 시험하사’ 이 말씀은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현존과 주권 앞에 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는지 아닌지, 그것을 알아보시겠다는 뜻이다. 결국은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는 것이다.

광야를 만난 인생을 감사하라. 광야가 없다면 하나님을 모른다, 없다 하며 살 것이다. 광야를 만나 우리가 다듬어지고, 변화를 선물로 기대하고, 그 은총을 감사로 누리게 된다. 때로는 궁핍을 경험하고, 때로는 주림과 목마름을 경험하고, 위기와 환난을 만나나, 하나님은 살아계심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 동행하심에 감사하라.

그러기에 둘째, 동행하심에 감사하라. 하나님은 인생의 광야에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광야에 있는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셨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광야에 있는 우리에게도 만나를 먹이신다.

만나란 무엇인가? 굶주리던 백성이 먹을 것이 없자, 차라리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먹던 때가 좋았다고 불평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그래본 적이 없다. 먹을 것이 없고 굶주리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착각일 뿐이다. 그때 하나님은 광야 들판에 만나를 주셨다. 그것을 거둬 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만나는 광야 위에 있는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 여러분 우리의 일용할 것을 기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함께 가족이 둘러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누고, 함께 하는 것, 정상적인 삶을 벗어나보면 정말 감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에 대한 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물론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 현재를 기쁨과 즐거움으로 누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이는 나중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하찮게 여기고 다음으로 미룬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다. 오늘의 것이 다하면 내일의 것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러분, 만나를 단순히 ‘오늘의 일용할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채워주시는 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에서 우리는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은총을 발견해야 한다. 3절에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그 날 그 날,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을 받아먹어본 적이 있는가? 진수성찬을 먹어서가 아니라, 괴롭고 힘든 날, 내게 날아오는 문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QT를 통해, 힘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 본적이 있는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체험!

우리 인생에서 더 없는 은총이며 감사인 것이다.

 

신기한 것은, 홍해나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너고, 죽을 것 같이 힘든 인생도 능력과 힘을 얻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때문이다.

그 기이한 일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이 사십년 동안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 소망 있는 약속에 감사하라.

세 번째는 소망있는 약속에 감사해야 한다(v.7-10). 신앙의 눈은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내가 소망하는 일이 정말 이루어질까? 주님 안에서 구하는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은 능히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이 자기 욕심과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다르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만들어진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의 삶을 통해,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신다. 고난을 통과하고 광야를 걸어가면서 형성된 소망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오늘 말씀에서 7절은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다. 골짜기든지, 산이든지, 시내든지, 분천과 샘이 흐르고, 그곳은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이다.

고난과 광야를 이겨내고 얻는 결실은 이와 같은 줄로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왜 고난을 통과하고 광야를 거친 후에 축복의 땅을 약속하는 것일까? 하나님 없이 받는 축복은 소돔과 고모라이기 쉽다는 사실을 인지하라. 세상적인 축복이 하나님 없으면 속된 것에 그치지만, 하나님 함께 하시면 거룩한 것이 된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는 심령이 되라. 하나님의 은총이 이미 여러분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로 깊이 깊이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 비결이 바로 감사이다.

 

존 쉘비 스퐁, ‘영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Eternal Life: A New Vision) 하늘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우주 150억년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 끝까지 도달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선 포월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안에 가득 임재해계시다. 무슨 말인가?

하늘을 보기 위해, 하나님을 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볼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으신 피조물 깊이 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핀 꽃을 보라.’

그것을 감상하라는 낭만적인 말씀일까? 이 책을 읽고, 주님의 말씀이 더욱 은총, 생명, 평화로 생생해졌다. 길쌈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르시고, 솔로몬이 입은 아름다운 옷과 영화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로 피어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섭리’라는 이름으로 깊이 들어와 계신 것이다. 하늘은 ‘위에’, ‘초월’,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음을 주님께서 알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으로 깊이 깊이 걸어들어가야 함을 결단하게 된다.

하늘의 은총을 어디서 찾을까?

바로 내 안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소유하고 있는 것’, ‘자랑할 만한 것’ 이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님께서 가득 채워주신 은총을 발견하고 감사하자.

 

13세기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의 시 [여인숙]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런데 하나님은 방문객이 아니라, 주님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힘과 능력이 되어주신다. 반석과 요새가 되어주시고, 주님이 되어주신다.

 

김기석, 아슬아슬한 희망

 

가끔 지렁이를 질투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렁이는 나뭇잎, 풀, 쓰레기 등 버려진 유기물을 제 몸무게만큼 먹어치우는 생태계의 청소부다. 해로운 미생물을 제거하고 기름진 분변토를 내놓아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그런가 하면 흙 속에 길을 내서 토양에 공기와 수분이 드나드는 톨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지렁이를 닮을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일상의 모든 것들을 내 속을 끌어들여 정화한 후 그것을 세상에 선물로 내 놓을 수 있을까?

 

질투에 이유에 대해서, 지렁이를 징그럽다고 말하지만, 그 징그러운 지렁이도, 아름다운 일을 하며 세계에 선물을 내 놓고 있다. 그것을 지렁이가 알까? 그러나 지렁이는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일들을 멋지고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하물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은 어떠실까?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 지렁이 같은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를 돕겠다. 나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이 너를 속량한다’고 하셨다.”(이사야41:14,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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