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9. / 성령강림절 후 22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구르는 낙엽을 보며 중심이 없어 흔들리는 삶을 반성하게 되는 계절에,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채워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오,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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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말씀 :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시145: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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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지워내고’, ‘새로 새길 것’이 있다. ‘종말’에 관한 것이다. 종말론자들은 지구가 멸망하고 세계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고,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려고 한다.
종말론자들이 말하는 종말은 정말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 아니다. 자 그것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참소망과 기쁨이 있는 말씀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은 주님의 날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때와 시기는 알 수 없고, 다만 도둑같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주님의 날이 임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때와 시기는 알 수 없다는 것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4절에 ‘그 날’이 너희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이단이나 사이비들은 자신들은 종말의 때를 안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 의미일까? 아니라면 무슨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주고 있는 것일까?
데살로니가에 일어났던 일을 먼저 살펴보자.
기원전 2시기 중반까지만 해도 데살로니가는 본래 마케도니아의 유명한 항구도시였다. 지중해 전역과 메소포타미아와 인도를 잇는 거점에 위치했고, 국제경제가 한창 호황을 맞을 무렵, 지중해를 대표하는 중요 도시로 발돋움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70개의 신도시를 세워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신흥경제체제가 급부상했는데, 데살로니가는 정말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율리우스가 데살로니가를 빌립보 대신 마케도냐의 속주 수도로 지정했다. 이것은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켰는데, 로마의 가장 충성스러운 도시가 되었다. 로마군을 전역한 수많은 퇴역군인들이 이곳에 대대적으로 이주했고, 로마시민들 중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교체되었다. 당국자들은 물론 시민층 거의 모두가, 로마황제에 대해 마치 일본인이 천황을 생각하듯이 깊은 경외감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사도행전 17장 6-7은 이곳에 있었던 일을 추측해보기 좋은 단서다.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한 회당에서 3주간 활동을 했다. 그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시당국에 고소를 한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다는 것은 사도행전과 곳곳의 내용을 통해 드러난다. 율법주의가 강했고, 늘 자신들만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이와 같은 수많은 일들을 만난다. 사람에게 고통당한다. 사람에게 속는다. 사람이 시험을 가져다준다. 사람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
빌립보 같은 경우 친로마적 성향도 강했지만, 반로마적 성향도 강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거의가 친로마적 성향이 강했고, 시저(로마의 황제) 이외에 ‘그리스도’(christ)라든지, ‘주’(The Lord)라는 표현은 황제에 대해 반역하는 것으로 낙인찍혔다. 그것은 황제에게만 쓰는 표현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특권과 이권을 위해 이것을 교묘히 이용했다. 데살로니가는 사실 다문화 다종교적인 상황이 강했다. 단지 제국에 위해가 되지 않고, 로마의 질서와 평화를 해치지만 않으면 용납되는 분위기였다.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물의를 일으키거나 반역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지혜롭게 세상권위와 질서에 순응할 줄 알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세상과 타협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평화와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모범을 보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약하고 연약한 이들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었다. 세상에는, 눈을 치켜뜨거나 내려다보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대인들은, 왜곡된 말과 거짓된 말로, 기독교인들을 위협하고 모함하고 모해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박해이다.
끝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 예수님을 죽기까지 사랑했던 이들이 체포되고 모진 고문과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바울은 이러한 정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 무사히 이곳을 탈출한 것에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다시 데살로니가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그를 만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바울의 측근인, 디모데가 그 도시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대주의자’들의 협박과 회유에 고통당하고 있던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의외로 디모데로부터 들은 정보는 그 교회가 굳건히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2-6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지금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데살로니가 교회가 ‘주 안에 굳게 선 것’(살전3:8)을 감사하며 또 주님께서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기”(살전3:13)를 간구하고 있다.
여러분 이들이 박해와 목숨의 위협 앞에 신앙을 굳건하게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믿음의 공동체와 성도들의 심령가운데 함께 하고 계셨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위협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며 고난을 당하나 우리가 굳건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확신 뿐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
두 번째는 그 부활의 주님께서 그 심령을 굳건히 붙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나, 낙심할 수 없는 이유는,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의 심령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실패를 당하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병마와 싸우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 박해와 고난받는 이들, 마음이 상하고 무너진 자들을 위로하시고 힘을 주신다. 좋으신 부활의 주님은 위로와 평강을 주셨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소망을 주신다. 평강을 주신다. 은혜를 주신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붙들어 승리하길 원하신다.
여러분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라. 시험을 이겨내며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라고 말씀했다.(딤후1:7)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했다.(약1:5)
아는가? 고난은 우리를 정화하는 힘이 있다. 왜 고난이 있는가? 강하고 아름다운 의의 나무가 디어 주님께 좋은 열매로 영광 돌리게 한다. 그 힘이 우리를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에 잇대게 하는 것이다. 은혜가 충만한 것이다.
적은 누구였는가? 괴롭히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로마사람이 아니었다. 시기심과 질투심에 싸여 동족을 팔아넘기는 유대인이었다. 이간질을 하고, 고소고발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면서 재산이 압류당하고, 말도 안 되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발생했다. 재산을 강탈당하고, 벌면 빼앗기고, 어려움이 극심했다. 이것이 하루 이틀 잠시 지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다. 폭정과 폭압은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생계가 위협받는다. 생존도 위협받는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살 수가 없다.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해, 고통스럽다. 내일이 암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신앙을 굳건히 잘 지키고 있었다.
주님의 날이 임할 것이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고 구원받은 성도의 확실한 믿음이었다. 십자가 뒤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것이 인생의 진리이며, 주님이 보여주신 진리이다. 고통의 순간은 물러가고 서광이 비쳐올 것이다.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원의 역사와 성취가 분명히 임할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종말 신앙이었다.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이다. 고난은 지나간다. 어려운 순간은 지나간다. 주님의 날이 임한다. 물론 그 시기와 때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도둑같이 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고난은 끝난다. 어둠은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온다. 좋으신 하나님은 고난의 얼굴로 찾아오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영광’이요, 그 등을 볼 때면, 바위틈에 숨기셨다가 손으로 덮으신 은혜를 아는 것이다.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케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 현존하심을 드러내신다.
여러분, 길키라는 사람은 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있는 산둥 포로수용소에서 2년 반을 지냈다. 일본이 패하고 종전이 되자, 그 수용소에서 자유의 신분이 되었다. 그 속에서의 삶은 정말 참담했다. 처음엔 한 번도 누워보지 않은 음습한 곳, 더러운 곳, 악취가 나는 곳에서 잠을 자야했고, 얼어죽을 것 같은 고통은 포로된 이의 처지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유를 빼앗겼다. 음식을 먹을 수 없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다. 나중에는 극심한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수용소의 상황은 악화됐다.
일본군은 영자 신문을 통해서, 일본의 승리 소식을 전해왔다. 승전지가 어디이고, 어떻게 승리했는지,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이 사실이라면, 전쟁은 끝날 리 없고, 내일에 대한 가망은 없어보였다. 적국이 더 우세하기에, 포로에서 벗어날 길이 요원했다. 절망은 깊어지는 것이다.
길키는 수용소의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전쟁이 끝날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중국 게릴라들이 수용소 주변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심증이 굳어졌다. 그리고 돌연 1945년 8월 전쟁이 끝났다. 이렇게 빨리 전쟁이 끝날지 몰랐다. 일본군은 3절 말씀처럼 하루아침에 패전국이 됐다.
3절에 그들은 누구인가? 단순히 온 우주와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평화와 생명보다는 폭력과 죄악을 따르는 세력을 말한다. 승리를 장담하고 안전한 것 같고, 영원한 권력과 힘을 누릴 것 같지만 망하고 만다. 나찌가 무너지고, 수많은 독재자가 무너지고, 학살자들이 무너졌다. 악행자들은 무너진다. 사람만이 아니라 상황과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그 상황은 번개처럼 지나가고, 언제 왔는지, 다녀갔는지 모르게 도둑같이 임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운명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낙담하해도 하나님은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가 장담해도, 주님을 떠나 확실한 것이 없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포로수용소라는 책에서, 나치 치하에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일화를 전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옮겨졌다. 다들 자유를 위해 간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 트럭에 타지 못해서,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때 이동해간 사람들이 막사에서 모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그러니 여러분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8절 말씀처럼 낮에 속한 자가 되라.
왜 여러분 4절에서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종말에 대한 특별한 계시와 환상으로 그 정확한 때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준비된 삶, 깨어있는 삶, 믿음 있는 삶은, 도둑 같이 임하는 주님의 날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악인에게 문제 되는 것이다. 그 날은 악이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그 고통 가운데 영원히 두지 않으신다. 선한 기대와 섭리와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정말 우리는 어둠에 있지 않고, 주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인가?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그 십자가 공로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이다.
5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신앙인들이 걸린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생각하고, 율법과 공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죄를 짓고, 어둠이 있고, 자기는 그 편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개인의 의로움 때문에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에 결코 어둠에 두시는 분이 아니다. 9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여러분 8절 말씀도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기를 원한다.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우리의 삶을 완성시키고 영원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공로나 율법이나 믿음의 부족이 아니다. 사랑이 부족해서이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종말을 맞을 때, 개인의 업적과 공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죽음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세상 떠나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사랑 고백은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게 한다. 또한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니,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섭리를 믿고 소망의 투구를 쓰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오늘의 고통이, 어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비춰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시험에 들면, 더욱 기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범죄한다. 홧김에 일을 저지른다. 자포자기 하기도 한다. 낙심하며 주저 앉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자임을 잊지 말고, 고통과 환난이 지나가고 주님의 영광을 볼 날이 임할 것을 기억하라. 6절 말씀처럼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11절 말씀처럼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하라. 내일 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승리의 날이 임한다.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며 희락과 기쁨의 순간이 찾아온다. 잊지 말라. 그 믿음의 투구를 쓰는 것이 바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는 것이다.
여러분, 이 모습이, 데살로니가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시험을 당하나,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자다. 여러분 저는 이 큰 은혜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의 비밀이 우리에게 넘쳐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