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23. / 성령강림절 후 마지막 주, 왕국주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가을이 슬그머니 그 문을 닫으려함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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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말씀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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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왕국주일. 교회력의 마지막. 그 마지막은 승리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승리.
주전 597년부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을 생각하다가, 다시 한 번 나무에 대한 명상을 했다. 그 시대는 어두운 시대였고, 온 세상이 혹독한 추위와 같이 암울하고 캄캄하게 여겨졌다.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는 비결은 땅 속에 뿌리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그 지열로 겨울을 이겨낸다. 나이테라는 것을 만들며,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그리고 봄을 만나면 싹을 틔우고,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다. 우리에게도 적용하며 어떻게 해야 할 지 생각해보라. 우리의 시대, 혹은 우리의 현실이 혹독하다면 하나님께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은혜로, 믿음으로, 그 가슴 따뜻하게 하는 감동과 온기로 이겨내야 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굴복시키고, 그의 삼촌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임금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유다 사회의 상류층 대부분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다. 에스겔은 그 때 사로잡혀간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발 강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제 곧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기들을 꿈에도 그리는 고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갖는다. 하지만 에스겔은 달랐다. 그것은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예루살렘은 그 죄로 인해 곧 망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참 냉정하다. 말이라도 희망을 들려주어야 하는데, 그는 비관적인 말만 일삼는 사람처럼 인식됐다.
자연히 그는 사람들의 꺼림의 대상이 되었다. 누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누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줄 아는가! 그는 불편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헛된 희망이라도 있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이 잡혀간 지 12년이 지났을 때였다.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다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발 강가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자신들을 이곳에서 구원해 줄 나라와 국가가 이제는 없다. 건져줄 힘 있는, 소망이 없다. 슬픔과 절망이 그발강가에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에스겔이 개과천선이라도 한 것일까?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부터 에스겔은 희망의 예언자로 탈바꿈한다. 길과 방법이 사라졌는데, 오히려 한 가닥 가는 희망마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데, 희망을 말한다. 그것이 더 허황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는 희망을 말한다. 왜였을까?
‘거봐라! 내 말대로 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거나 역사와 상황에 대해서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든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단순히 비판이 습관적인 사람은 비판에서 머문다. 그러나 애정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그 길은 벼랑이기에 예언자처럼 비판을 하는 사람은 희망과 대안을 가지고 헌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에스겔은 후자의 사람이었다.
왜 갑자기 그의 입장이 바뀌었을까?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예’ 할 때, ‘아니오’하는 사람이고, ‘아니오’ 하는 사람일 때, ‘예’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철저히 하나님께 있었다.
첫 번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분이시다. 강한 자는, 자기도 모르는 그의 횡포에서 스스로 무너지기도 하지만, 약한 자는, 자기도 모르는 잠재 능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도 겸손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길 원하신다.
두 번째, 하나님은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한 없이 너그럽고 자비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스스로 목이 곧고 강퍅한 자에게는, 그것이 아무리 ‘말 탄 자’와 ‘병기든 자’의 힘과 능력이라도 바다에 빠뜨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곧게 살아가길 원하신다.
세 번째, 유일하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저와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마른 뼈가 이 뼈 저 뼈 붙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돋아나 살아나듯 우리를 다시 지으시고 살리시는 분이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은 이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여러분 힘과 용기를 내라. 그 때 하나님은 아직 살아계시다. 아니, 여전히 그 사랑하는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다.
에스겔이 돌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다가 다시 하나님의 희망을 말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움을 입었던 이들의 죄를 고발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34:2)이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만, 악한 목자들은 자기를 위해 양을 희생시킨다.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는다.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고, 병든 것을 고쳐주지도 않고,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주지도 않고, 흩어진 것을 모으지도 않고, 잃어버린 것을 찾지도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참 좋으신 분을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양의 문을 통해 그리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해 낸다고 요한복음(4:10)은 증거하고 있다.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삯꾼인 까닭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물어가도, 헤쳐도 돌보지 않고 도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 사람을 믿지 말라. 돈을 믿지 말라. 명예를 믿지 말라. 우상을 믿지 말라. 사람을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강도로 변한 목자들로 인해 양 떼는 흩어지고,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오늘 말씀 속에 에스겔의 말을 듣는 백성들의 마음이 착잡했을 것이다. 그런 지도자들을 믿고 살아온 지난날의 회한 때문이었겠다. 이제 해방의 꿈은 버려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에스겔은 이제 하나님께서 손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실 것이라고 예고한다.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34:16)
하나님은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지도자들을 미워하신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참화로 나라가 잿더미로 변한 상황에서도 제 잇속이나 차리는 힘센 자들을 미워하신다. 더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 두지도 않고, ‘평강하다. 평강하다.’,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문제없다.’ 선전하는 이들의 거짓도 싫어하신다.
그렇다면 이전의 믿음,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의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바벨론에서, 꺼져가는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삼고자 하는 믿음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인생에서 만났다고 하는 것은 참 큰 은혜요,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살진 양’을 좋아 하시는가? ‘파리한 양’을 좋아하시는가? 물론 참 목자 되신 주님은 주님의 모든 백성이 살진 양과 같기를 바라신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등장하는 ‘살진 양들’로 지칭되는 그들의 행태는 이렇다(18, 21).
초원에서 풀을 배불리 뜯어 먹고는 남은 풀을 발로 짓밟아 남들이 먹지 못하게 하고, 맑은 물을 맘껏 마시고는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혀 놓는다. 병든 것들을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뿔로 받아서 그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어 흩어지게 한다.
그림이 그려지는가?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눈에는 일터에서 쫓겨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서민들의 삶을 더욱 막막하게 만들 각종 정책들이 떠오르고, 약소국가들의 등골을 빼먹는 강대국들의 파렴치가 떠올랐다. 평생 모은 재산으로 몇 억의 권리금과 임대료를 주고 가게를 오픈했는데, 주인이 재개발 계획을 숨겼다가, 그렇지 않으면 임대가 안나갈테니까, 그리고는 상인을 쫓아내어,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이들, 사회에서 ‘을’로 지칭되는 억울한 이들의 하소연과 눈물이 생각났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단순히 목자들만의 모습은 아니다. 하나님을 자기 삶의 수단과 방법으로 삼았던 믿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를 탓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무정한 세파속에서 이렇게 살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상이 다 이런데, 희망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
여러분, 참 희망은 국가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이 전하는 희망은 참된 희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 뜻을 더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나로부터 시작되고 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또한 신앙이다.
v.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여기서 ‘내 종 다윗이라’하신 분이 누구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왕 되시고 구주되시며 희망이 돼주신다.
v.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하나님의 축복만이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 역시 약속이고, 심판 역시 약속이다. 믿음은 그 약속을 믿는 것이다. 살펴보자.
첫 번째 11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나의 처지와 형편을 도와줄 수 없고, 심지어 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고, 또 찾으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꼭 만나시라.
두 번째, ‘건져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12절,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나를 건져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라. 국가와 나라와 우상이 아니다. 사람의 힘이나, 그 기대가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세 번째는 돌보시고 회복시키신다. 13절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그리고 16절 ‘내가 싸매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온 무리들(오클로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마가복음이 전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셨다. 병자들을 친히 찾아 다니시며 고쳐주셨다. 우리가 육신만 상처와 질병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심령이 상하고 마음의 중한 질병을 겪는다. 그런데 주님은 병자들을 낫게 하셨고, 심지어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다. 오늘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허락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요14:6) 이르셨다.
왕국주일에 이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단순히 위로하는 말씀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대로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약한 자를 굳세게 하시며,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우리 하나님 때문인 것을 깨달으시라. 여러분 주님을 주인 삼고, 내 마음 속에 왕으로 모시라.
영상. 시각벼랑을 건너는 아가. 믿음이 이기네.
이전의 믿음과 오늘의 믿음이 달라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수단과 방법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왕이요 참구주로서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기를 바라신다. 어제의 믿음은 절망이 결론이었을지라도, 예수를 주인 삼는 오늘의 믿음은 희망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새롭게 결단하고, 곳곳에 낭떨어지가 놓인 세상 같지만, 친히 건너 주품에 이르길 원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