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2. / 성령강림절 후 18주)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물속의 고기를 먹이시고, 산 중의 짐승을 보살피시며, 들의 꽃과 풀을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분주하고 바쁜 일상 속에 주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한량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감싸주셔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그슬린 나무와 새싹

 

  • 비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장면은 하나의 연극무대와도 같다. 천상회의라고 하는 장면 속에 천사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사탄도 참석하고 있다. 욥기의 산문 부분도 하늘 회의에 사탄이 등장한다. 동일한 점이 있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사탄은 영적인 실체로서의 악마나 귀신과는 좀 다르다. 그는 ‘참소하는 자, 고발하는 자’이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질책하셨다. 이때, 사탄이라고 하신 것도, 영적인 실체로서 악령이나 귀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길을 방해하고 걸림이 되게 하는 자이다. 욥기나 스가랴에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누구보다 세상 현실에 대해 잘 안다고 자처한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다는 것은, 세월을 살아보며 그 자기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그는 경험상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니 절대적이라고 신봉하는 자이다.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았다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시시비비에 능한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나, 또 살펴보니, 거기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동명이인)도 있다. 그리고 사탄이 바로 그를 참소하고 있다. 스가랴가 들려주는 말은 ‘그가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더라는 것이다. 냄새나는 더러운 옷은 인분이 묻은 옷이다. 그 말은 그의 행실이 그렇게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탄은 아마도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나님께 아뢨던 것 같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사탄의 참소는 근거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 얼마나 직분에 맞게 행동했는지, 모범을 보였는지, 말과 행실이 일치했는지, 선한 일들을 했는지, 여러 가지로 시시비비를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헤아리며 충성했는지, 위선은 없었는지, 완벽한 자격과 조건에서 얼마나 동 떨어지는 행동을 했는지, 모든 것이 참소의 내용이 됐을 것이다. 신령한 능력을 가지고 거룩하며 성결했는지, 따져 물었을 때,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요, 사람으로서 나지 말아야 할 냄새가 났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맡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는가? 사탄은 지금 그렇게 참소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격이 없다.

 

여러분, 그런데 잠시 우리에게 이 조명을 비춰보자. 우리 모두 각자가 여호수아 대신 서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어떠한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유구무언이었다. 이 심판대 앞에서 자기 행실에 대해 괴로울 따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나 주가 너를 책망한다. 이 사람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타다 남은 나무토막)이 아니냐?”(3:2)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여호수아의 부적절한 처신을 고발한 사탄은 칭찬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책망을 받는다. 참 억울하겠다.

 

왜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책망하고 처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책망하실까?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탄은 인과응보의 논리에 따라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만 알았지, 누군가를 사랑하여 애를 태우시는 하나님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잘못과 죄로 애태우시는 마음’, 그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그 때문에 애태우며 신음하시는 분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 그 마음이 없어 용서와 자비를 경험하거나 베풀지도 못한다.

 

자기 자녀가 아닌 다른 자녀가 잘 못을 하면 쉽게 그를 나무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녀 때문에 애태우며, 슬퍼하는 마음을 누가 알랴?

 

‘예루살렘을 사랑하여 선택한’ 주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부족함을 모르지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불 속에서 꺼내셨다는 것이다. ‘타다 남은 막대기’ 다른 말로, 불속에서 건져내신 막대기이다. 그래서 그를 일러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 이르신다.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음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질병에서, 타다 남았다. 죄와 욕망의 세상에서 타다 남았다. 절망과 실패와 상처에서 타다 남았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셨다.

건축자가 버린 돌로 새로운 세상의 모퉁이 돌을 삼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흠이 없는 사람이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문제가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불에 그슬린 나무가 들어야 할 음성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불에서 꺼낸 타다 남은 나무토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성취에 도취되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들이 참 많다.

 

여러분,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옮기신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은 무궁하시며 끝이 없으시다. 독생자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주님은 아낌없이 목숨으로 우리를 위해 죄를 대신하신 분이시다.

 

탕자는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어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모두 죄인들이다. 탕자는 죄악 가운데 방황했다. 베드로는 그 죄로 절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탕자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동구 밖에 서있었던 아버지처럼 우리를 대하신다. 그가 돌아왔을 때, 가장 좋은 새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새로 신겼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로 인해 즐거워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첫째 형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의를 제기했다. 마치 오늘 성경 속에 등장하는 사탄처럼 말이다.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의 부활하신 몸인 교회를 부인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자멸감을 주는지 아는가?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부인하고, 모른다고 외면하면,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9:1)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을 부인하고 모른다고 외면하는 것, 이보다 더 큰 영적인 자괴감이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나의 연약함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 주님을 부인했으니, 누가 나를 받아주며, 누가 나를 알아줄까? 아무도 없다는 영적 허탈감은 자기 스스로에게 큰 절망을 안겨준다. 그런데, 아시는가? 주님은 그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다. 세 번씩이나 말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치명적인 오점을 주님은 자비와 용서로 만회시켜주신 것이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신앙인은 불행한 것이다. 자신의 의로움만 믿고, 자기의 의를 드려내려는 신앙인은 참 하나님의 사랑에 근접하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랑으로 용서와 참고 인내하며 마음을 애태우지 못한 사람에게 은혜와 평강이라는 상급은 저 멀리 있는,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이다. 바리새인이 그랬다. 유대인이 그랬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 앞에 완벽한가? 혹은 그 불완전함과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용서의 하나님이신 줄 믿으라. 우리를 향한 그 은혜를 확신하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다시 허락하신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달리말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덤으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에 그슬리고, 세상의 추한 욕망에 타다 남은 막대기 같지만,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건져내셔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도우시고 힘주시는 것이다. 비록 연약하고, 이렇게 예배할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고 기다리셨다.

 

그런데, 여러분, 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시려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일을, 그 거룩한 일을 맡기시고 부탁하신다.

 

  • 옷을 갈아입다

인분이 묻은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천사가 다른 천사들에게 그가 입고 있는 냄새 나는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이른다. 그리고 마치 선포하듯이 말한다.

 

“보아라, 내가 너의 죄를 없애 준다. 이제, 너에게 거룩한 예식에 입는 옷을 입힌다.”(3:4b)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은 죄가 씻음 받았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울 사도도 이런 상징을 자주 사용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이 그것이다(엡4:22-24). 로마서에서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2)로 말하기도 했다.

 

의롭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직분이란 자기 과시와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네가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여기에서 섬기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로이 출입하게 할 것이다.”(3:7)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다음에 들어야 할 음성은 무엇일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시간, 주님의 거룩한 옷으로 갈아입히신 줄 믿으라. 주님이 갈아 입히신다.

 

  • 표징이 되어야 할 사람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심으로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실까? 8-9을 읽어보자.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여호수아와 그의 동료들은 앞으로 나타날 일의 표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나타날 일은 ‘새싹’이라 불리는 이의 도래이다. ‘일곱 눈을 가진 돌’의 도래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이 둘은 하나이다. 물론 이것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주님은 일곱 눈을 가지셨다고 고백되고 있다. ‘이들은 예표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 증인의 모습이길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싹이 예표처럼 드러나길 원하신다.

그를 ‘새싹’이라 이르는 게 참 의미심장하다. 새싹은 여리다. 하지만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차 있다. 두터운 대지 혹은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솟아나오는 새싹은 아름답다. 그리고 장엄하다. 하나님의 신비가 온 세상에 가득 차 있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도 새싹이라는 은유를 통해 메시야적 존재를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사11:1)고 말했습니다. 사실 ‘일곱 눈을 가진 돌’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이다. 어떤 이는 그것이 제사장의 옷에 매단 보석의 일곱 면을 일컫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히브리어로 ‘돌’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샘’을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사실 13장에서 스가랴는 샘의 이미지를 통해 구원받은 삶을 나타내고 있다.

 

“그 날이 오면, 샘 하나가 터져서,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 줄 것이다.”(13:1)

 

‘돌’이든 ‘샘’이든 그 역할은 죄를 씻어주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해 매번 새롭게 제사를 바쳐야 했다. 그러나 오실 그분은 땅의 죄를 하루 만에 없애실 것이다. 제사장들이, 주님의 종된 우리들이 그분을 가리키는 손가락 역할을 잘 할 때 세상은 평화롭게 된다. 주님은 확약을 하듯 말씀하신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3:10)

 

평범한 이 말씀이 저는 사무치게 좋다.

주 중에, 한 중학교 동창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모임에 왜 안 오느냐는 것이었다. 저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이 왜 이렇게 반갑고, 좋은지 모르겠다. 나를 받아주고 귀하게 여겨주고,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부름에 대해서 왠지 모를 존재감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사귐을 위해 서로를 초대하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들은 이제 다른 이들을 사적 공간에 초대하지 않는다. 점점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외로움도 깊어진다. 사귀어 두면 덕을 볼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람이 좋아서 누군가를 초대할 수 있는 세상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새싹이라 불리는 분을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힘으로 사람들을 강압하고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가 벗이 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다. 우리 또한 이 땅에서 새싹이 되어야 한다. 오늘 외로운 사람들, 아픈 사람들, 내몰린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이 소명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복음의 새싹의 사명을 가지고 견디고 이겨낸 이들에게 주시는 상급이요, 은총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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