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5. / 성령강림절 후 17주, 세계성찬주일)
십자가를 통한 은총
맑은 하늘과 고운 산천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창조주 하나님, 10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허리가 휘도록 겸손을 떠는 벼 이삭들이 온 대지를 뒤 덮은 풍요를 말해주는 계절에, 마음속에 그냥 놔둘 수 없는 주님의 세심한 사랑에 대한 감사를 드리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를 너른 품에 품으시고 다독거려 주사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서 살 용기를 갖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눅1: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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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가 지키는 성찬주일이다. 성찬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정신을 닮아가며, 기아와 굶주림으로 세계가 고통 받는 현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눔과 헌신적인 사랑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자 하는 날일 것이다. 그 신비를 통해,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 주님의 손을 의지하라.
너무나 평범하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한 장면을 봤다.
어린이집 가방을 멘 아이가 공원길로 엄마를 따라가고 있었다. 엄마는 느긋하게 앞서가고 있었다. 아이가 귀여운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그리고 손을 잡아달라고 했다. 엄마는 당연히, 아이의 손을 잡고 갔다. 참 평범한 모습이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저 역시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와 손을 잡자고 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그 광경이 바라보였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것은 사랑과 신뢰라는 것을 안다. 엄마의 손을 잡으면 아이가 편안해하고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안다.
제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본 적이 언젠가 싶다. 이젠 쑥스럽고 그렇게 하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어도 자녀가 손을 잡아달라고 하면 그 자체로도 감동이 밀려올 것 같다.
이젠 어머니나 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없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럴 수 있는 분들이라면, 손을 잡고 걸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다른 게 효도가 아닐 것이다. 그 평범한 모습에서 ‘사랑과 존경’이라는 가장 값진 모습을 본다. 그 선물을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역시도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길 원하신다.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길 바라신다. 억지로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 속에 우리를 존중하고 인정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들기를 원하신다.
시편18:16 “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예수님은 귀신들려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게 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막9:27)
하나님은, 우리 존재와 삶의 궁극적인 보호자요, 도움이 되신다. 주님의 손을 의지하라.
-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이들
지난 주중에 감신대 93동기회가 우리 교회에서 있었다. 10여년 만에 만난 친구 목사도 있었고,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던 동기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것이 있다. 첫째는 부르심의 자리가 서로 다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사명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르심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은 처지와 형편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혹은 우쭐하고 교만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 필요해서 그를 그 자리에 불러주셨고, 그 소명에 충실한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겸손히 부름받은 목회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전 졸업하며 불렀던 찬송이 생각나서 가슴 뭉클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어떤 이에게는 산골짜기를 허락하시고, 어떤 이에게는 들판을 허락하시고, 괴로운 일 즐거운 일이 있지만, 하나님 사랑의 질과 양은 모두가 같다. 누구는 잘돼서, 누구는 안돼서, 부름받은 목회자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교회의 크기에 따라, 성도의 수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가 다르다고 강조한다. 아니다.
부름받은 목회자인지, 아닌지의 판가름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명을 깨닫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이다. 남을 부러워하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며, 늘 더 좋은 기회는 없을까, 찾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감사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는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참 부르심의 응답하는 모습이다.
여러분 역시도 소명감을 가지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이 길로 인도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계획과 목적이 있다. 내 길과 다르고 내 생각과 달라도, 그것은 미래에서 소망과 은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하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잠시 후에.
두 번째 자랑스러웠던 것은, 선한 일에 대해 합력하는 모습이었다. 작년에는 장학금 1,000만원을 만들어, 어려운 후배들을 도와줬다. 여전히 그 선한 사업을 위해, 다들 상황이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 것의 일부를 덜어내어, 돕는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5일 만에 100만원이 모아졌고, 이스라엘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기 선교사를 돕게 됐다. 얼마나 아름답고 자랑할 만한가?! 모두가 자기 앞가림에 여념이 없을 때, 그렇지 않는 모습이 진정으로 자유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문제만을 절대적이고 크게 보면서 집중할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고, 나보다 더 큰 고통과 어려움에 빠진 이들이 있음을 바라보라. 그리고 가슴을 크게 해야 한다. 그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무엇이 생각나야 한다. 이것도 잠시 후에.
그중 한 친구의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위로와 용기가 됐다.
그는 당시 서울대 법대 합격점수에 해당하는 높은 점수를 받고 수석입학했다. 그런데 학교는 제일 늦게 졸업했다. 그마만큼 인생에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고, 우여곡절이 있었다. 가끔 고난 받는 이들, 위로가 필요한 이들,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 곁에, 목회자로서 함께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신문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5,6년 전에 하남에 교회개척을 해서, 지금은 성도수가 30명이 넘어간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다. 이제는 어려움이 없어졌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보니까, 어렵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두 딸이 있는데, 모두 뇌에 종양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아이는 뇌 중간에 있어서, 전혀 건드릴 수도 없다. 뇌에서 호르몬 분비로 성조숙증이 와서, 초2인데, 벌써 2차 성징이 나타났다. 그것이 끝난 뒤에 성장판이 닫히면, 키가 150이상 자랄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딸의 목숨을 생각해보면, 키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양이 더 이상 크지 않고, 활동하지 않기만을 기대해야 할 뿐이다. 지금의 의술로는 전혀 손 쓸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의 모습은 담담했고, 눈빛은 또렷했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고통이 와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신앙을 저버린다. 시험에 들어,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큰 산과 어려운 문제를 담대하고 용기 있게 넘는다.
자녀에 대한 걱정 때문에 목회는 어떻게 하는지, 집중하고 전념해도 모자를 판국에, 어렵지는 않은지 물었다.
처음에 목회하기 싫어 도망가던 자기를 요나처럼, 목회자의 자리에 불러 앉히시더니, 이게 웬일인가 싶어서 화가 났다고 한다.
정신이 강한 사람, 큰 정신을 가지기로 작정한 사람은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 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께서 큰 정신을 그에게 선물로 주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첫째 아이가, 아이들을 엄청 많이 전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 기이한 것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교회에 등록하더라는 것이다. 머리에 폭탄이라면 폭탄 같은 것을 담고 살아가는 아이가, 자기도 제대로 못해본 전도를 하고, 교회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손이더란 이야기이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자기 소명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목회에 대한 사명은 그의 십자가였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자기의 능력을 부인해야 한다. 자기의 의와 생각을 부인해야 한다. 자기의 계획까지도 부인해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을 깨달을 수 없다.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괴로워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 고난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를 붙들어야 한다. 십자가에 나타난 기이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의 수많은 문제와 일들은, 부담이며, 무거운 짐이며, 괴로움 덩어리이다.
‘나는 아직 주님의 길을 따르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내 생명이 아깝고, 내 시간이 아깝고, 내게 있는 것이 아까운 걸요?’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남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일까? 자기 십자가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짐과 부담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복음과 전도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효도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헌신의 십자가, 자녀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에게는 각자 나름대로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 여러분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여러분 그 십자가를 지시기 바란다. 왜 그 십자가를 맡기셨는지, 믿음으로 깨닫고, 그 용기와 은혜가 있길 바란다. 그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셨는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 무게를 주님께서 덜어주시고, 인생의 짐을 덜어주셔야지, 왜 주님은, 약속과는 다르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말씀하실까?
주님의 말씀을 여기까지 듣고 여기까지 읽는데 문제가 있다. 주님께 나아오면, 문제가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문제가 사라지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신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리고 이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말씀하신다.
여러분 ‘자기 십자가’와 ‘인생의 짐’이 다른 점이 무엇인줄 아는가?
자기 십자가는 무거워 보이지만 가볍다. 자기 짐은 십자가에 비하면 가벼워 보이지만 무겁다. 자기 십자가는 감사가 있다. 자기 짐은 불평한다. 자기 십자가는 믿음이다. 자기 짐은 회의적이고 의심하게 한다. 자기 십자가는 은총이다. 그런데 자기 짐은 부담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친구 목사가 인생의 짐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늘 쪼들리고 어렵고 기쁨이 없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그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억지로 자기 짐을 십자가라는 자기 최면이 필요한 것일까?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바꾸면 될까? 그 비결은 무엇일까?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다 요령이 있다. 아내가 옷장과 서랍을 옮겼다. 요령피우는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요령은 무엇인가? 신앙의 기술은 무엇인가?
바로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이다.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 순간 자기 짐은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십자가로 변해있을 것이다.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가 임하는 것을 체험해보라.
기독교의 능력은 십자가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가 부적이나 귀신을 쫓는 마술적인 징표여서 일까? 퇴마사가 사용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믿음으로 지면서 승리하는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은총이 있다.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단순히 감상적인 고백이어서는 안된다. 주님의 못박힌 손에, 우리의 손이 얹혀졌다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가 십자가의 못과 같은 고난을 당하나, 능히 이겨낼 힘을 또한 주님께서 주실 것을 확신하라.
기억하라. 십자가의 길 위엔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다. 주님의 은총이 있다. 그것이 능력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 된다.
저 또한 여전히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함석헌 선생님의 ‘흰 손’이라는 장시가 가슴을 뜨끔하게 한다. 일부만 인용해 보겠다.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 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야,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주님의 피가 우리 살과 뼈와 혼과 얼에 배지 않는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오늘 특별히 성찬을 통해, 우리의 손과 발이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가며, 우리의 몸과 마음도 예수님의 몸과 마음 되기를 축원한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짐과 부담과 회피하고 싶은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과 승리와 영광이 나타나는 주님의 소명이요 부르심으로 인식되길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