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9. / 성령강림절 후 19주)
피조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푸르던 산천이 저마다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며, 그 절정에 이르는 때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산하에 고운 단풍으로 물드는 것처럼, 주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삶의 자리에, 주님의 은총으로 물들어, 주님의 섭리 나타내게 하옵소서. 쉼 없이 섭리하시며 보호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과 온유한 손길로 위로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가 우리를 흑음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노라. (골1;13-14)
하나님의 얼굴과 등
테레사 수녀는,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 버려진 비참한 사람들을 봤습니다.
“가난한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 병원균과 벌레가 득실 거려 전염될까봐 모두 피하는 사람들,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 밥 먹을 힘조차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
30대의 테레사는 이들을 돌보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948년 인도 캘커타의 빈민촌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테레사를 부르셨고, 테레사는 그들을 보면서 그의 눈과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는 “캘커타 수녀원에서 가장 행복한 수녀”였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따라 빈민구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는 “내 영혼이 완벽한 평안과 기쁨 가운데 있다”며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테레사 수녀 서거 10주년을 기해 발간된 책 ‘마더 테레사: 와서 내 빛이 되라’가 공개되었습니다. 이는 테레사 수녀가 교회의 상급자들과 66년간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예상과는 다른 말을 합니다. 그는 한 때, 지독한 신앙적 회의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침묵과 공허가 너무나도 커서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고, 혀를 움직여도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1979년 12월(그의 사역 중반기)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받기 3개월 전, 마이클 반 데르 피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그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존재를 느낄 수 없어 절망감에 빠지는 일이 수십 년씩 계속되었습니다.
이 책이 발간되자, 세계와 기독교계는 충격에 빠졌죠. 그리고 많은 논란을 가져왔습니다. 짐작이 가시죠?
그러나 그에 대해, 영적인 위선자라거나 그 신앙에 거짓이 있었다고 정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계신다, 없다, 단순한 논쟁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인생을 살면서 고난 앞에 동일한 신앙의 문제를 겪고, 영적인 고통을 호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그의 사역을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달려갔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섬김의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님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고 괴로워하면서도 끝까지 예수님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만나는 모세의 모습 속에서도 이와 같은 영적인 고통과 메마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3절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느껴지시는 바가 있습니까? 금방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에 땅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애굽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보면, 강자의 횡포와 억압에서 재앙이라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이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무사히 건넌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광야에서 추위와 더위가 힘들게 했고, 먹을 것, 마실 것이 없어, 생계를 넘어 생존의 위기가 홍해보다 더 크게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면 왜, 이렇게 하실까, 망막해졌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계약서가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백성들의 원망과 원성과도 여기저기서 터져나왔습니다. 이대로 흩어졌다가는 아무것도 아닐텐데, 백성들은 그것도 모르고 대안없이 불평했습니다. 그 불평이 이스라엘을 흩어지게 더 나약하게 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우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돌립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실망감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문제 가운데, 근심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숱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쉽고 편하게 인도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과연 정말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나에 대해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것들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뜻대로 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그는 고독합니다. 12절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는 캄캄합니다. 13절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다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그는 절망하며 울고 있습니다. 15절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그는 시내산에 오를 때, 자기 자랑과 의와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앞으로의 운명은 어찌 될지 모릅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백성들의 아우성이 그 귓가에 떠나질 않습니다. 괴롭습니다. 여러 번민과 고민으로 복잡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 방법과 계획과 능력과 확신 대신에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눈물입니다. 그 메마름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비결은 우리의 눈물과 참회입니다.
16절 “주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이 탄식을 자세히 뜯어보면, ‘우리와 함께 행하심’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4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둠, 고독, 절망이 너무나 커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 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증거판을 주시고, 모세가 확신을 얻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산 밑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형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애굽에서 건져낸 신이라 하며,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는 굉장히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 그것을 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그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십자가는 없는, 마음의 평안과 위로와 힐링을 위해서만 자신을 던지는 신앙은 오히려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아론과 백성들의 모습은 거짓 신앙에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안을 주고 안심만 주는 것이었지, 살아계신 하나님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현실이 다른 괴리현상을 보면서 그는 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나의 다짐에 불과하고, 나의 자기확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도 그에게 스쳐지나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말씀이 참 많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14),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 너를 앎이니라.”(17),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2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며 위로가 돼주셨던 주님의 음성을 기억해봅니다.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강하게 확신하려는 의지 뒤편으로 의심의 그림자가 붙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스스로 위안 삼기 위한 말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며 믿음을 담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심연에서 만나는 것이 어두움이고, 절망, 고독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깊은 회의와 불신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어둠, 고독, 절망, 심연의 캄캄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의 확신과 의지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비예요.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은총에 힘입어 사실 이곳에 나와있습니다. 내 생각의 불빛이 꺼지고, 내 능력과 힘의 전력이 다운되고, 자기가 죽고 없어질 때, 하나님은 비전과 약속이라는 등불을 켜십니다. 내 불빛이 꺼지자 하나님은 더 밝은 빛을 비추십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거기서 보이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십니까? 주님도 우리를 위해 고독, 절망, 어둠을 만났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탄식하셨습니다.
저는 테레사의 고독, 절망, 어두움은 주님의 것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또한 우리의 것도 주님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쉬운 길, 평탄 한 길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꼭 최후에 드러내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을 이기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경험을 우리가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느낍니까? 믿음이 충만해집니까? 용기가 충만해집니까? 수가 더 많아도 모자를 판에 3만 2천명에서 2만 2천 명을 덜어내십니다. 일당 백이라고 사기충천한 1만명으로 어쩌면 미디안과 싸워 담대히 이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다 돌아가게 하시고 300명만 남게 하십니다. 왜일까요? 왜 하나님은 덜어내시고, 줄어들게 하시고, 돌아가게 하시고 내려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있는 것 마저 줄어들고, 가진 것 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기대와 가능성이 점차 희박해집니다. 여러분 사실, 이 경험은 절망입니다. 불안입니다. 염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300명의 용사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십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고 약속하지만, 슬며시 자기 영광과 의가 드러나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22절을 보시면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러면 살 자가 없고, 23절에 ‘내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등을 보이신다고 말씀하실까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환난이요, 위기요,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대면할 능력이 사실은 없습니다. 20절에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자 곧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마가 지나갑니다. 실패가 지나갑니다. 가정의 불화가 지나갑니다. 갈등이 지나갑니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숱한 어려움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주님의 손으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손으로 덮으십니다. 주님의 보호날개 아래 품으십니다. 생명싸개로 우리를 감싸십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고난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등을 볼 것’이라는 말씀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지금은 어려움이 너무나 큰데, 지나고 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는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으며 은총이었습니다. 그것을 등을 본다고 표현하신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준비돼있습니다. 주님은 그 은총을 옷 입길 원하십니다. 확신하십시오.
16절 말씀처럼 무엇으로 그것을 확신하고 알 수 있을까요? 무슨 자격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결코 어미가 젖먹이 자식을 버릴 수 없음 같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죄 가운데 빠지고, 추하고 못난 모습이라도 말입니다.
바울은 주님에 대해 괴수 중에 괴수였지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왜입니까?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1:6) 낙망하지 않고 십자가를 붙들며, 믿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성령이 여러분에게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말입니다.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입니다. 고난뒤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주님의 등을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성숙하고 성장하길 바랍니다. 환난, 곤고, 비천, 풍부 여러 인생의 속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일체의 비결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걷더라도 승리하십시오. 주님은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를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말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