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28. / 성령강림절 후 16주, 청년주일)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음과 같은 손길로,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이 복된 날 저희를 부르시고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창조의 손길로 저희를 만져 주시고, 마음을 위로하여서, 아름답게 거듭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산하가 곱게 물들기 시작하는 때에, 우리의 마음도 주님의 사랑으로 곱게 물들기를 바라며 주님 전에 나왔아오니, 아름다운 걸작품이 되어 주님을 경배하고 영광돌리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7)
- 마태 공동체의 도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권위를 물었다. 그 하고 계신 일들에 대해서 무슨 권위와 자격으로 하는지 말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예수님도 대답할 것이요, 그렇지 못한다면 대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일단은 그게 공평해 보인다.
주님의 질문은 이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대답 못할 것이 없을 줄 알았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난감해졌다.
v.25b~26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하늘로서’라고 대답하면 어찌 세례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할테고, ‘사람으로서’라고 대답하면 백성들의 눈이 두려웠다. 여론이 두렵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백성들은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추종하고 있었다. 게다대고 ‘사람으로서’라고 대답한다는 것은 큰 민심이반이 아닐 수 없었다.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명철하신 모습을 발견한다.
이미 우리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당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던 것을 알고 있다.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내는 세금논쟁, 부활논쟁,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에 대한 문제, 여러 난제에 대해 주님은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목을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신 주님의 모습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뒤에 두 아들에 대한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둘째 아들은 세리, 창녀와 같은 죄인을 뜻하는 내용이 나온다. 마치 대제사장, 장로, 바리새인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에게만 하는 말씀으로 여겨서도 안된다. 여기에는 마태의 고민이 반영돼 있다. 그 신앙공동체가 겪었던 문제 말이다. 무엇일까?
예수님에 대한 의심의 문제였다.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가?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는가? 어느 신앙공동체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실은 믿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혹은 믿음이 약하여 의심할 때가 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어떠하며,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 세상적인 생각과 신앙적인 믿음이 병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태의 신앙공동체가 겪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의 존재는 분명하다. 그런데 그분이 정말 그리스도였는지, 신적인 능력과 권세가 있었는지, 그 권위는 어디에서 왔고, 무슨 능력으로 이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인지, 마음 한켠에서 의문이었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인지, 단순히 사람이 행한 의전에 불과한 것인지, 대답할 수 없는 딜레마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과 믿음이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찾기 어려운 모습이 마태를 고민하게 했다.
이 대목은 공관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한다. 그런데 마가나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논쟁하는 이야기 뒤에,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덧붙이고 있다. 마가나 누가는 그냥 그 논쟁이야기로 매듭지었다.
그 내용은, 첫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답은 하지만 행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말했지만,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는 내용이다. 첫째 아들은 꼭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는 맏아들은 어떤 사람인가? 23장에서 말씀하신다. ‘그 말하는 것은 듣되, 행위는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 움직이려 하지 아니한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cf. 마23:2-4)
그런데 마태는 이 대목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의 모습, 그것이 마태의 신앙공동체의 모습 속에 보였고, 그것은 바리새인이나 이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게 여겨졌다. 사실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들,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마태 공동체의 신앙적인 모습과 문제에 도전을 던지는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마태는 어떤 모습에서 예수님에 대해 잘 못 믿고 있거나 믿음이 없다고 생각했을까? 지지난 주에 말씀드린 바 있다. 형제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불화한 모습 속에, 주님에 대해 의심하는 문제를 봤다.
- 기가 막힌 예수님의 기대
그런데, 여러분 저는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기가 막힌 마태의 기대를 본다.
v.31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신다. 세리와 창녀들은 둘째 아들이다. 한 마디로 죄인이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쉽게 뉘우치고 변화되는 사람들인가?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들일까? 인생의 결핍을 채우기만 하면 완성되는 사람인가? 영혼의 상처가 쉽게 치유되고 회복되는 사람인가? 그것은 낭만이다.
어쩌면 살아온 인생의 경험과 가치 때문에, 때로는 우악스럽기도 하다. 거칠기도 하다. 타인을 배려하기보다, 자기부터 챙기거나 이기적이기도 하다. 교양도 없고, 문제투성인 경우가 많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교양 없고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이 인생의 어느 과정 속에서 상처 때문이라고 해보자. 상처 입은 사람이 사금파리처럼 상처를 준다.
그런데 주님은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말씀하셨다.
아는가? 이것이 마태가 기억하는 희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태는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둘째 아들의 모습니다. 아직 믿음이 없고,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감동이 일어난 이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본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공동체도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어디에 반응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전혀 기대할 수 없고, 무시의 대상에 불과했던 이들의 모습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주님의 참된 제자로 성숙해가는 모습도 동시에 발견했다.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셨다. – 방점은 여기에 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주님의 이 말씀에서, 주님의 향한 시선이 어디인지를 보았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약하고 상처 많고,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이들에게 찾아가셔서, 자비와 사랑을 채우셨다. 예수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한 곳이었다. 섬김과 돌봄의 자리였다.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순종과 제자도의 길에, 누구나 절박한 이유도 있고 변명거리도 있어, 따르지 못하고 지켜 행하지 못하나,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의 모습이 발현되는 비전도 바라보았다. 수많은 말씀들을 지켜 행하지 못하고, 길가나 돌짝밭이나 가시덤불위와 같은 곳에 떨어지는 것 같으나, 그중 한 말씀이, 심령의 가장 연약하고 부드럽고 좋은 곳에 떨어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도 마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희망있게 확신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둘째 아들과 같은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성령이 임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들고, 회개하며, 어느새 돌아서면 변화라는 크신 은총의 선물을 받는 것이다. 믿음 없다고, 문제라고 정죄되는 대상이 가장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기억하라. 그때가 언제인가? 예수를 구주로 확신하고, 뉘우쳐, 의지할 때였다.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권위에 대한 의심을 품고, 믿음이 없어, 인간적인 생각이 잡풀처럼 돋아날 때, 주님은 믿음이 없어 물에 빠져갔던 베드로를,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말씀하시며 건져주셨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신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신다. 부활하신 주님을 확신하기 바란다.
믿는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따르지 않는 우리를 책망하신다. 그러나 마음을 돌이켜 뉘우치고 회개하는 이에게는 또한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신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모든 사랑과 그 인내와 수고를 아신다.
이번 주간에 오세영 시인의 <그릇>이라는 시를 찾아서 잠시 음미해봤다.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 / 빗나간 힘
부서진 원(圓)은 모를 세우고 / 이성(理性)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때로는 우리의 일상에서 그릇이 깨짐과 같은 경험을 한다. 사람의 말에 상처를 주고받고, 무례하고 자존심 상하는 행동에 마음의 평정심을 잃는다. 그러면 예민해져서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게 또한 자신을 괴롭힌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가? 우리는 사랑의 결핍된 행동들을 수많이 범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험담하고, 고집을 부리고, 날을 세우는 이유는, 어쩌면 사랑해주고, 이해해달라고 하는 소리이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자기만 그렇게 해달라는 태도’에 ‘차가운 이성의 날선 눈빛’을 뜬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 /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
깨진 그릇은 /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 칼이 된다.
‘사금파리’ 아는가? 깨진 도자기 조각을 사금파리라고 한다. 그것을 잘 다듬으면 훌륭한 예술품이 되기도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결핍된 사랑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이와 같은 모습은 아닌지? 그런데 저는 다음 대목에서 예수의 마음,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발견한다.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주님은 이런 마음으로 사금파리 같은 우리를 감싸고 품고 계심을 깨닫기를 바라신다.
주님 안에서 다듬어지는 변화를 통해, 주님의 걸작품인 성도들도 우리 모두가 거듭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