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20. / 성령강림절 후 5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들을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불볕더위와 장대비가 범벅이 되어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계절에, 여러 가지 불행한 소식들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실 안식과 평안을 사모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고 기쁨과 소망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용서의 말씀 :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동영상)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내생각과 내방법으로 은혜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

혹은 세상적인 염려, 근심, 걱정에 대한 일들을 내려놓지 못해도 마찬가지다.

 

 

  • 야곱을 위해 기도하는 어미

야곱과에서 중에, ‘에서’라면 상관없을 것 같다. 그런데, ‘야곱’이라, 걱정이다. 또다시 편애하는 것이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런 게 아니다. 에서는 어디다 내다 놓아도 걱정이 없다. 그런데 야곱은 아니다. 똑 같은 자식, 게다가 쌍둥이라도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어쩌면 리브가는 자신이 야곱을 그렇게 키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그 길을 잘 찾아 갈 수 있을까?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는데, 자식을 위하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그르친 것만 같았다.

너무 무리한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복잡했다.

사실 리브가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자면, 에서가 미워서라거나 싫어서가 아니었다. 어떤 부모가 그렇겠는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우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누가 명쾌하게 이해시켜주면 좋겠지만, ‘내가 왜 그러는 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또 이해한다고 해도, 알기는 알지만 그렇게 안 될 때도 있는 것이다. 자꾸 마음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를 때도 있는 것이다.

 

여러분 창세기 27:46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사이에 삽입되어, 그 흐름을 잠시 끊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개역개정 :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새번역 : “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하였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사는 게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딸들 곧 헷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아들인다고 하면, 내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자면, 리브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안에는 헷 족속 여인들에 대한 상처가 있다. 에서는 엣 족속의 여자들과 결혼을 했는데, 그 며느리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말 싫은 일이었다. 물론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이 며느리들을 동일시 한다는 것은 미숙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들이고, 며느리들을 며느리들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 관계망이 연결돼있고, 그 속에서 성장을 했다고, 배경을 생각해보면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야곱을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그는 한 번도 집을 떠나 본적이 없는데, ‘무사히 찾아갈 수 있을까?’ 하란까지 무사히 간다면, 도착만 하면 거기에는 자기 아들을 돌봐줄 오빠도 있고, 친정식구들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결과도 자기 생각이나 기대와 달랐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은 떠났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당장은 에서의 몫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결과는 불 보듯 뻔 한 것이었는데, 왜 그랬는가? 사람은 다음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형제간에 불화가 생기면, 야곱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기억하라. 사람의 눈은 감정에 의해 쉽게 어두워지기도 하고 밝아지기도 한다.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도 있고, 생각은 하지만 욕심이 눈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 많은 유산은 ‘에서’의 몫이 됐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은 모든 축복은 에서에게 돌아갔다.

다만, 어미로서 야곱을 위해, 인간이 줄 수 없는 것을 대신해서 ‘신의 가호가 그에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의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자녀나 남편이 집을 떠나 먼 길을 다녀올 때면, 또 어떤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정화수(井華水) 떠놓고, 무사귀환을 새벽 달빛 아래 기도 했다고 한다. 천지신명께, 하늘과 땅의 섭리를 주관하는 조물주께 기도했다고 하는데, 리브가도 같은 맘이지 않았을까? 해가지고 달이 뜨면, 어디서 먹고 잘지 모르는 야곱을 위해, 미안한 마음으로, 그러나 그 인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 밤을 맞이한 야곱

그때였을까? 그는 어떤 곳에서 밤을 맞았다.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된다. 여러분 아시는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11절을 보라.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한 곳, 어떤 곳’ 이 말이 상징해주고 암시하는 바가 크다. 인생은 우연인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곳’ 그곳은 정처 없는 곳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믿음의 눈, 신앙의 눈이 열린다면, 그곳은 신비로운 곳이다. 유한한 인간은 다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의 섭리가 맞아 떨어지는 장소다.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시간이다.

 

야곱은 난생처음 경험한 바람소리를 들었다. 광야의 벌레 소리, 짐승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물론 정말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마 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예민해졌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잠은 제대로 잘 수 있는가?

 

여러분 저는 개인적으로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여러분, 신문지를 덮어 보셨는가? 저는 덮어 봤다. 군생활 할 때였다. 나름 따뜻하고, 편하다. 신문지 한 장의 위안이란 무엇일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던 말씀도 있지만, 잠 잘 때, 유용하게 썼던 기억이 있다. 돈으로 값비싼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은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상황은 불편하지만 달콤하고 편안한 잠을 선물로 받아보면, 신문지 한 장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저는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는 야곱’의 마음이 느껴진다. 야곱도 얼마나 불편할까? 집 떠나 씻을 곳, 잠잘 곳, 편히 누울 곳이 없으면 정말 고생인 것이다. 그런데 돌베개로 잠을 청하고 있다. 이런 조건도 편안해지고, 익숙하게 된 것 같다. 몇날 며칠의 고생이, 이를 이렇게 만들었다. 돌베게, 신문지 한 장만 있어도 잠을 달게 잘 수 있는 위로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맞으면 죽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서 이유 모를, 원인 모를 어떤 평안함이 찾아오는 것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기억을 떠올려 보라.

바다 위 요동치는 배위에서, 주님은 편안히 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그 주님이 주시는 평강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인생의 고난과 위기에 주님의 위로가 있다.

의외의 평강과 위안이 있다.

 

그 밤에 야곱은 단잠에 든다. 그리고 단꿈을 꾸는데, 생생하다. 시원하다.

 

  • 야곱의 신비체험

12절을 보자.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천사들의 오르내림’, ‘하나님의 약속’, ‘복에 대한 약속’

이 신비한 체험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첫 번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세상에서 그것을 수행하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과 명령이 있는 것이다.

야곱이 삼촌 라반이 사는 곳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우물을 만났다. 우물에서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는 목자들을 만났는데,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그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들은 하란지역에 사는 목자들이었다. 혹시 라반을 알고 있을까?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반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반가운 것은, 양떼에게 다 같이 물을 먹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이었다. 라반의 집에 채 가기도 전에, 이미 라반과 잘 아는 사람을 만나고, 그의 딸을 만났다. 우연인 것 같아도,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나님께서 마중 나오게 하신 것은 아닐까? 천사들로 미리 예비하도록 하신 것은 아닐까?

갑자기 그 마을에 나타나서, 자기가 라반의 조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준비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러나 라헬이 먼저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잠시라도 준비되고 예비된 모습으로 조카 야곱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라헬의 모습에서 먼저 달려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 소식을 듣고 야곱 맞을 준비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예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본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일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야곱에게 복을 약속하셨던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미리 천사를 보내고,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복에 대한 ‘약속과 성취’이다. 13절, “또 본즉”, 15절까지 그 뒤를 다 같이 읽어보자.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보이는 것은 들이요, 황량함 뿐인데, 그것이 보일 리가 있을까?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보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보여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꿈과 바람을 그려보라.

진정한 축복은 무엇인가? 사람의 유산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다.

그의 이름이 나중에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된다. 12 아들들을 주셨고, 그들을 통해 한 나라,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과정에서 갈등을 봐야 한다. 자녀가 생기는 과정(레아와 라헬), 키우는 과정, 현재를 보면 갈등이고 고통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위기와 불행한 일들을 당한다. 그 연속이요, 그 성취는 언제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어느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모든지 익어가고 변화되는 데에는 특별에너지가 필요하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섭리하심)이다. ‘예비하심’, ‘역사하심’ 다 같은 말 같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예비하심은 좀 미래적이라면, 역사하심은 현재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지금 현재 동행하고 계시다. 그 현존하심을 드러내신다.

‘형통하다’와 ‘운이 좋다’는 말도 구분해드린 바가 있다. ‘운이 좋다’는 상황이나 환경이 잘 맞아떨어져서 운수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형통하다는 상황이 어렵고 나쁘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고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형통의 복을 누렸던 것처럼 말이다.

야곱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이 은혜를 누렸다. 삼촌에게 번번이 속임을 당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레아와 라헬을 차례로 아내로 맞게 되었다. 삼촌의 집을 돌보면서도 품삯을 받지 못하고 자기 재산이라는 것은 변변히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레아와 라헬을 통해 유복한 자식들을 보게 됐다. 나중에 삼촌과 품삯을 정할 때에도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을 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증언은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30:43)라는 것이다.

신앙은 안되는 것 같아보이고, 내 뜻처럼 안될 때도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돌아보면 결국에는 잘되있는 것이다. 믿음 없이 바라보면 그림자 같던 인생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도 마찬가지인줄로 믿으라.

지금 안 되는 것 같아 보이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이고, 염려근심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다. 역사하고 계시다. 지금 오늘 이 순간이 하나님의 어떤 사랑의 무지개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15절 하반절을 보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와도 동행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한가지만 더 이야기드리고 마치려고 한다. 이 지역 이름은 ‘루스’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편도나무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봐서, 이곳엔 편도나무(아몬드)가 유명한 곳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자신이 가진 기름을 붓고 이름을 벧엘이라 바꿔불렀다. 기름은 자신이 가진 어떤 가치있는 것이다. 그것을 부었다. 부었다는 것은 결단과 헌신을 의미한다.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다. 뜻은 하나님의 집이다.

16절에 그는 뭐라 고백을 했는가? 잠에서 깨어나면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루스에서 벧엘로 인식되고 만들어가는, 신앙의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황무했던 곳은 주님의 부요함의 장소로, 화려했던 곳은 거룩한 곳으로, 마음이 복잡했던 곳은 평강이 넘치는 곳으로, 애통이 있던 곳은 위로의 장소로…

일상이 은총의 장소로 변화되기를 축원한다.

 

과연 여기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의 눈과 결단이 있기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