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13. / 성령강림절 후 5주)
축복 :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성령이 이 자리에, 우리에게 오셨다. 마음을 열고 그 주님을 새롭게 영접하는 시간이 되시라.
오늘의 시편은 인생의 탄식을 믿음으로 이겨낸 시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새힘과 용기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도입 : 이야기(근심 걱정 괴로움)
초등학생들의 답안지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들에게 문제를 냈다^^
문제 :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 하는가? ( ) ( ) ( ) (가)로 끝난다고 힌트를 줬다. 아이들의 답이 제각각이었다.
“고성방가”,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한 아이가 이런 답을 썼다고 한다.
“아빠인가”
(영상)
어떻게 보셨는가?
17절에서 19절을 보자.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고난에서 끌어내소서.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
오늘의 시편에서 시인은 심정적으로 뭔가에 쫓기고 있다. 불안하다. 개인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삶의 업적이 한 순간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다. 어떤 길로, 어떤 방법으로 삶의 장애를 풀어갈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실패할까, 실패를 거듭할까, 두렵다. 이런 점들은 늘 현재다. 왜냐하면 우리 삶 속에서 자꾸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빠의 ‘고성방가’는 어쩌면, 치열한 경쟁과 무한경쟁 속에, 투쟁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곤고함과 환난이 그 마음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롭다고 하는 도움의 요청인지도 모른다.
다윗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겠다.
그에게도 고성방가를 하고 미친 척 하던 때가 있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자신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언제였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했을 때였다.
10여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그 영웅적 모습에, 그의 명성은 자자해졌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여인들이 부르는 민요가 세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야욕을 품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정적들은 다윗에게 경계심을 가졌다. 그의 나이가 불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비슷한 또래에 불과 했지만 말이다. 가장 큰 경계심을 보인 인물은 사울이었다. 아들 뻘 되는 사람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꼈다. 왕으로서 그 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는 없었다. 자존심이나 체면을 상하는 일 없이 다윗을 없애고자 했다. 죽이려 했다.
이때부터 무엇이 발생하는가? 억울함과 설움이다. 핍박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한다.
군대에서 관심병사가 총기사고를 일으키더니, 며칠 전에는 전역한 군인이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세한 원인과 내용은 모르지만 우리가 어렴풋하게 아는 게 있다. 사람에 대한 무시와 경계심과 조롱이 얼마나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지를 말이다.
관심병사란 무엇인가? 원래 취지는 잘 돌봐줘서 병영생활을 무사히 마치도록 하자는 데서 붙은 이름일테다. 그런데, 그 이름이 붙는 순간, 피하거나 가까이 할 때 경계심을 가지고 조심해야할 대상으로 삼는다. 때로는 무시하면서 밀어내고 외면한다.
이런 모습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지를, 우리는 쓴 교훈을 얻고 있다.
결국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갔다.
가드왕 아기스에게 망명하듯 도망을 갔다. 거기서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늘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다른 뜻을 품은 적도 없는데 사람들의 의구심과 편견은 오히려 다윗을 위험인물로 지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거하려고 했다. 그래서 미친 척을 해야 했다.
광야로 갔다. 거기에서 주변의 목동들, 양치는 사람들을 강도나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다윗은 양털을 깎는 날이 되면, 그 대가로 음식과 술을 얻어다가 부하들과 먹고 마셨다. 살기는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표를 잃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사실 그의 인생에서 놓고 보자면 방황하고 있던 때였다.
나발의 집에서 양털을 깎는 날이 되자, 사람을 보내 술과 음식을 얻어오게 했다. 나발이 다윗을 무시하듯 말했다. 다윗은 ‘한 주먹’ 거리도 안되는 나발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죽이고 싶었다. 그 집의 남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다행히 지혜로운 여인,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설득에 그가 방황을 끝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신이 지금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하찮은 일에 피를 보게 된다면, 분명 후에 왕이 되고 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취지의 말이었다.
그의 인생에는 모세와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광야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모세는 동족을 구하려는 애국심이 크다보니 저지르게 된 일인데, 광야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듯 40년을 보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크다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도우셨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영광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고 야망과 야심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적자들, 원수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잃을까 염려하는 이들, 그리고 사울의 핍박을 피해 광야에 오게 됐다.
광야는 넓은 곳 같지만, 사실은 모세나 다윗이나 광야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야는 분명한 가르침이 있다. 사람의 의협심과 혈기로만, 혹은 능력으로만, 이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돌아보게 하고, 일깨우게 한다.
아비가일의 말은 분명 그를 일깨웠다. 앙심과 분노 혹은 상처로 그것이나 보복하고 갚으며 살려는 다윗의 인생은 하류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다른 소망은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지지 말고 큰 산을 넘어선 자라야,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실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인생은 뒤돌아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다. 인생이 그림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인생은 그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그래서 10절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하나님은 분명 그 상황을 이기고 승리하시를 바라신다. 이것이 확실하다.
그가 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이 되고, 문제가 사라졌을까? 아니다. 12지파동맹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스라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 중에는 다윗이 사울의 집안을 무너뜨리고 왕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겉으로 내색은 안하지만, 좋아서 협조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기에 그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지만, 자기를 싫어하고 쓴 소리를 하고 가시 같은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모두를 끌어안으려고 했다는 점이 아닐까?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선 이에게는 면모였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몽진을 갈 때였다. 시므이가 나와 그동안 숨겼던 본심을 드러내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나중에 압살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가 돌아왔을 때, 그때의 모습은 어땠는가? 제일 먼저 시므이를 처단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그를 용서했다. 사실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그럼으로써, 나머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정말 자기 피붙이 같이 여기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들 압살롬을 잃고 돌아온 것 아닌가? 그 쓰라림을 대신하는 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의연한 모습 때문에 나라와 국가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커져한다. 그래야 가정을 잘 지킬 수 있다. 삶의 자리, 직장, 관계 모두를 잘 지킬 수 있다.
그에게 가시 같은 사람은 누구인가? 정적이나 못되게 구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신복이었던 요압 장군, 그는 손톱가시 같은 사람이었다. 열왕기상을 읽다가 서두에서 이상한 대목을 발견해야 한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 충신이었고 다윗만을 위해 사력을 다했던 요압을 백발로 편안히 음부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그마 만큼, 사람들이 잘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요압도 다윗에게는 가시였다.
요압은 다윗의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었다. 다윗과 밧세바가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됐다. 다윗이 밧세바를 아내로 정식으로 취하게 된 것은 용병이었던 우리아 장수가 죽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그 우리아가 왜 죽었는지, 그 직접적인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요압장군 뿐이었다. 현상적으로야, 우리아의 죽음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전쟁에서 장렬히 사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사인은 그렇게 되도록 다윗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단 선지자는 이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물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요압장군 뿐이었다.
요압이 충신이었고, 신복이었던 것 같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 맘대로 했다. 왜? 왕의 약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유언에 요압이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다윗이 겪은 인생에서의 근심과 걱정은 무엇인가?
오늘의 시편의 다윗은 세 가지다. 1) 죄의 문제, 2) 사람의 문제, 3) 그 두 가지로 인해 찾아오는 곤고함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1) 죄의 문제 – 이것을 깨닫고 나면 사람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깨닫는다.
2) 사람의 문제 – 사람이 걸림이 되고자 하면, 누구나 걸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신복이었던 요압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3) 그 두 가지로 인해 찾아오는 인생의 곤고함 – 모든 일이 잘되고, 태평성대를 이룬다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다 해도, 성공을 이룬다 해도, 인생은 곤고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수치를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나를 향한 편견, 오해, 나에게만 뭐라고 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은 다 옳은데, 나만 그른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있다. 그 사람들은 잘되는데, 내 인생은 자꾸만 궁지에 몰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를 불신하고 자괴감을 갖는다.
그런데 오늘의 시편이 탄식시임에도 불구하고 22편에 비하면, 절박하거나, 절규하듯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기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일까? 담담하게 여겨진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강도가 약해서일까? 덜 고통스러운 것 때문일까? 그의 마음이 무뎌졌기 때문일까?
1) 은혜에 대한 경험 때문이다. 어떤 경험인가?
5절b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전에도 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7절과 연결해서,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고’ 계셨다.
‘나’를 기억하시고 ‘내’ 문제에 개입하시고 도우셨다.
그러기에 다윗은 주님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5절c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예전에 받았을 은혜를 다시 받아 누리라.
2) 시인에게 분명한 믿음이 있다. 8~10절을 보라.
8절b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뉘우칠 마음을 주신다.
9절b 여기서 ‘온유한 자’는 누구인가? 문맥상 결과에 성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주님의 방법을 차분히 기다리는 자이다. 그렇기에 9절c ‘주님의 도(길)를 가르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코 저주와 멸망과 파멸을 향한 길이 아니다. 7절a는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청원한다. 10절에는 “여호와의 모든 길은 ~ 인자와 진리”라고 고백한다. 뒤돌아보면 하나님은 악하다고 여겨지고 괴롭다고 여겨지며, 실수까지도 선한 역사를 이루고 계시다. 이 믿음으로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있다.
여러분 주님의 방법을, 기도하며 응답주시기를 ‘기다리라.’ 성급하게 내 방법대로 하다가 내 맘대로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지 말고 말이다. 12절을 다 같이 읽어보자.
3) 그러기 위해서 이 시간 우리가 다시 한 번 결단하고,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15절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데 보통 어떻게 하는가? 나를 사로잡은 상황의 그물을 보고 있다. 이 시편의 서두 1절에서도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고백하고 있다.
재현이가 ‘우러러’ “울었다”라는 동사로 이해했나보다. 우러러 보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니까, “울 때, 주님을 보는 거예요?” 물었다. 눈물로, 긍휼로, 자비로 그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라.
또다시 어려움을 당하셨는가? 하나님이 도우셨던 경험을 기억해보라. 그 때는 간사하게 하나님 하신 일이 아니라고 자기 심중에 우기며 은혜를 잊어버렸던 것을 떠올려 보라. 하나님 하신 일이 맞다. 주님께서 또다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 남편들에게 힘을 주라. 남편들을 위로하고 이해하고 힘을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