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니엘에서의 절룩임 (창세기32:22-31)

브니엘에서의 절룩임 (창세기32:22-31)

 

(2014.8.3. / 성령강림절 후 7주)

 

폭염주의보에 이어 태풍이 지금 우리를 뒤덮고 있다. 저지대에 사시는 분들은 어떤지, 좁은 집에서 더위를 피하지 못하고 생명과 안전에 위협을 느끼는 분들도 있다. 폭우에 집이 무너져 내리거나 홍수피해는 겪지 않을지 걱정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태풍이 와도, 폭염이 내려도 걱정이고, 고통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들려온 강자의 무차별적이고 악마적인 폭격과 만행은 거짓 종교에 물든 인류의 죄악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국사회와 유대주의와의 관계를 통해, 경제와 이권문제로 얽혀 있는 인간의 욕망이 ‘인권’이라는 가치와 이념을 얼마나 거짓되고 허울 좋게 만드는 지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에 해군기지 건설과 미사일 전진배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북한의 인권법에 관한 이야기도 오간다. 그런데 러시아, 중국, 일본 사이에서 또 다른 전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된다. ‘인권’과 ‘평화’의 명분을 내세우는 미국이 중동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사고도 끊이질 않는다. 군대에서 또다시 일어난 사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병사가 숨졌는데, 집단구타와 학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말을 맞추다가 결국에는 사실의 전모가 드러났다. 치약을 먹이고 바닥의 가래침을 핥게 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예전에 비해 심약하고 나약해졌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잔인해졌다. 강자의 횡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살이 속에 일어나는 보편사처럼 여겨진다. 인간에 대한 모독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바댜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1:10)

 

큰 통 속에 두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 사건 역시 엽기적이었다. 그 중 하나는 남편의 시신이었는데, 백골이 드러난 상태란다. 유병언의 시신이, 부패가 심해 사인을 밝혀낼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역시 정확한 사인을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최첨단 과학시대, 핏방울 한 방울에서도 법의학과 정밀 수사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들추고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지혜와 기술은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드는 모순을 면키 어렵게 됐다.

 

진리를 거스르고 진리를 거부한 인간은 결국은 장님이나 진배없다는 것을 우리가 자각해야한다.

 

죽임의 시대, 죽임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우리는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14년 한여름의 풍경은 노아의 시대나 다를 바 없다.

무더위가 극심할 때, 그것을 식히기 위해 한밤에 귀신이야기를 통해 간담을 서늘하게 무더위를 잊는다. 8월 이보다 더 실감나는 남량특집은 없을 것 같다.

 

사도요한은 시대의 어둠이 극에 달했던 박해의 시대에, 환상을 본 것을 전한다. 물론 새하늘 새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가 본 것의 핵심적인 요지이지만, 그가 본 현실은 아무도 열수 없었던 두루마리의 봉인이 열릴 때였다. 특히 다섯 번째의 봉인이 떼일 때, 그가 본 것은 무엇인가?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슴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리를 어느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계6:10-11)

 

억울하고 무고하고 잔인한 죽음이 그 핏값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그 원한이 풀어질 것을 간청한다. 그러나 주님은 동일한 죽음이 더할 것이라는 것이, 다섯 번째로 열려진 봉인의 비밀이다.

 

세계도처에서, 그리고 가까이는 우리의 삶의 자리 곳곳에서 이런 불상사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아, 슬프고 아프다. 그래서 또한 예레미야의 탄식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렘8:18,20-21)

 

그러나 여러분, 사도 요한은 어둠과 비참한 참상이 극에 달하던 때에, 144,000 명의 인침을 받은 이들이 환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와 간구와 소망으로 찬양하기를 잊지 않는 성도들을 바라보았다. 그처럼, 우리역시 이 악한 시대에 승리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사야가 불안한 시대에 성전에서 본 환상이 있다. 천사들이 서로 창화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씩이나 반복하며 만군의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했다. 그처럼 우리 역시 살아계씬 하나님의 섭리와 그 편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죄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하나는 점점 깊어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염되고 퍼지는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대로, 노아의 홍수 심판 때, 하나님은 아담 이후에 죄가 점점 깊어지고 퍼져서 세상에 가득함을 보셨다. 모든 인간의 계획과 악함을 보시고 한탄하셨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시대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은 성도가 삶을 살아내는 복음을 통해서, 이 시대의 구원의 방주요, 부르심의 방편으로 삼기를 바라신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시대에 온전함 믿음을 지키며 선한 기대와 소망을 품는 기대와 소망을 품는 비결을 나누고자 한다. 스토리를 전하는 것보다, 야곱의 중요한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야곱, 지금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형에게로 가고 있다. 지형을 살펴보면, 여기서 자세한 설명을 다 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 쪽에서 보자면, 형이 있다고 전하는 에돔은 훨씬 남쪽이다. 형 에서는 나중에 에돔의 조상이 된다. 그마 만큼 에돔지역에서 이미 주름잡고 있었다.

형에게 찾아가는 목적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화해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형과 관계를 풀고 화해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 어디서 산다고 한들, 위협이 됐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 가득 찬 야곱의 모습을 본다. 에서가 4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들었다. 그 전에 미리 사람들을 보냈다. 거기에는 소, 나귀, 양떼와 노비들을 원하는 만큼 주어, 화해하기를 청하는 메시지를 담았었다. 그 행렬의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먼저 보낸 이들이 상함을 얻으면 곧바로 피신하리라는 나름의 방책을 가지고 형에게 간다. 32장 9절~12절을 보면, 그의 간곡한 기도를 엿들을 수가 있다. 형 에서가 자기와 처자들을 공격할까봐 두려웠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용기를 내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위협을 만난다. 비록 그것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며, 일어나지도 않을 기우에 불과하지만, 그 때문에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기도는 힘과 용기를 주며, 소신을 가진 일에 확신을 준다. 야곱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번민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앙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11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여기서의 번민은 무엇인가? 갈등은 무엇인가?

 

나중은 나중이고, 형과의 화해를 미뤄야 할까? 아니면, 지금 하해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큰 위기를 맞을지도 모르기에 용기있게 나아가야 하는가? 형이 어떻게 나올지, 이 일의 결과가 어찌 될지 모른다. 생각대로 안될 수도 있다. 차라리 나중에 하면, 우연히라도 위기가 빗겨갈 수 있다. 당장 처자식들을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찌해야 하는가? 야곱의 딜레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엿볼 수 있는 우리의 문제와도 유사한 점은 무엇인가?

 

20절이 그것을 대변해준다.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여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함이었더라.’ 잠언 21:14절은 이렇게 말한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인생의 지혜에서 가끔은 은밀한 선물, 품안의 뇌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예물’이라는 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뇌물로, 예물로 사람의 마음을 풀려고 하는 것은 임시방편이다. 이 방법은 자칫 사람의 마음을 왜곡되고 변질되게 만든다.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고, 사람의 비위와 기분을 맞추려고 할 때, 하나님의 방법과 의로운 길보다는 잘못된 타협을 선택하기 쉽다.

 

여러분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바람의 나는 겨와 같다고 했다. 아는가? 이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내적인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 때문이다. 절망 때문이다.

당장 나의 안위와 무사함을 얻기 위해,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사람의 편을 들려고 할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그 자리에 눌러 앉게 될 때가 많다.

군생활 하면서 이런 것을 봤다.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폭군과도 같은 최고 고참보다 더 비열한 것은, 그 밑에 있는 고참이다. 그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선수치는 경우가 많다. 내시처럼 고참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심한 구타와 폭력을 일삼는 꼬봉 같은 고참들이었다. 생각해보면,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살아남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군대내 폭력과 구타는 학습되고 이루어진다.

 

여러분 인간적인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양립하고 있지 않는가?

 

야곱은 뇌물? 은밀한 선물? 예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나 마찬가지이다. 인간적인 방법을 병행하고 있지만 마음의 정함이 없었다. 평안이 없었다.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래위에 지어진 집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변화와 소망은 24-25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야곱은 씨름을 한다. 어떤 사람이 그와 씨름을 했는데,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 그는 누구일까? 그는 야곱을 넘어뜨리려 했다. 야곱은 그를 놓아보내지 않고 축복하기를 구하고 있다. 그는 씨름했던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야곱을 축복하자,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뜻에서), 브니엘이라고 이름하였다.

 

여러분 이 본문이 전해주는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사람의 방법을 선택하려고 했고, 예물이라는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풀려고 했던 야곱이,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의지와 뜻과 씨름하여,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 보내지 않도록 그것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 우리 삶에도 이런 신앙과 도전과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믿음의 결단과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 역시 믿음으로 승리하길 간곡히 원하신다. 이 씨름은 무엇이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여러분 첫째, 하나님을 의지하라. 28절 ‘하나님과 및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누구일까? 여러분 성경은 스쳐지나가듯, 짤막한 대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눈을 떴을 때만 깨달아지는 것이다. 1-2절 에서를 향해 가는 야곱 앞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엘리사와 그 사환이 아람군대에 포위 되었을 때, 두려워하는 사환을 위해 엘리사가 기도하자, 그의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선 것을 보았다. 뜻있는 길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를 앞서 보내어, 야곱을 지키고 계시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실 야곱이 그 사람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람이 야곱을 붙들고 있었던 것 아닐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붙들고 계시다. 그 하나님을 붙든다면, 결코 먼저 하나님이 놓는 법이 없으시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강하게 붙들면 붙들수록 하나님은 더 강하게 붙드신다. 그렇기에 결코 하나님은 그를 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사실 져주시는 경기, 아니 이기게 하시는 경기, 자비의 경기를 하시게 하는 것이다.

이 경기는(씨름은) 넘어뜨리는 경기가 아니라 누가 오래 잡고 있는가 하는 버팀의 경기이다. 손을 놓는 쪽이 지는 것이다.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라.

 

두 번째 내적인 확신을 가지라. 로마서 8: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씀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증언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성령이 이시간 여러분에게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확신하길 바란다. 어저면 야곱은 그 낸적인 확신을 위해 그 어떤 사람, 하나님의 사자, 바로 주님을 붙들고 있다.

 

그 다음 정말 중요한 것이다.

세 번째, 복을 구하라. 형에게 은혜 받기를 원하던, 용서받기를 원하던 야곱이었다. 우리가 때로는 사람의 복, 사람의 도움, 사람의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하기도 한다. 권력에 빌붙기도 하고 강자의 횡포에 더 포악해진다. 그러나 생명과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구하라. 사람이 해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앙의 언어로 바꾸자면, 복을 받는데 성공, 승리를 이루었다는 이름이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으시면 결코 놓지 말라. 기억하라 이미 하나님은 마하나임에서 만난 하나님의 군대를 먼저 보내시고, 역사하고 계셨다.

 

(영상)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기 위해 기다리신다.

어느새 자기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은 더 큰 능력과 믿음이 생긴다.

세상이 어둡다. 소란스럽다. 고통을 당한다. 어려움을 만난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승리하길 바란다. 31절, 그가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다. 그러나 인생의 상처와 아픔과 절룩임을 경험하지만,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그 머리 위에 돋았다. 이 자리가 여러분의 ‘브니엘’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 찬양집 57장을 부르면서 은혜 주신 바를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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