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7.6. / 성령강림절 후 4주, 맥추감사주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자, 성령강림절 후 4번째 주일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빈다.
날씨가 무덥다. 뱃살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치매그이 유혹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고 어떤 분이 말했다. 수박은 참 달다. 일조량이 많기 때문이란다. 시원한 수박을 쪼개는 것만으로도 더위는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를 무덥게 하는 것들이 참 많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여러분, 어디에, 시원한 곳을 찾아, 가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시고, 쉴 만한 물가가 되어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께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짤막한 말로, 당시의 시류를 요약해주고 있다. 참 답답해 보인다. 왜일까?
우리의 시대와도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심령은 어떠한가? 날씨는 찌는 듯하다고는 하나, 냉담한 가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냉소적으로 삶을 바라보지는 않는가? 간간이 흥과 기쁨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속적인 감사와 감격을 상실하지는 않았는가? 우리의 심령이 마치 절벽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주님은 이 장의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친 심령, 갈한 심령마다, 식어버린 가슴에 시원한 생기가 돌기를 바라신다. 초대에 응한 자들에게는 쉼을 주신다.
지난 한 주간을 떠올려보라.
세상에서 가진 것 없고 힘 없어 서러움을 당하지는 않았는가?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가? 고달픈 사연이 있는가? 그래서 가슴을 닫아버린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비결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새 결단을 원하신다.
자 말씀을 살펴보자.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였으며,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오늘 말씀은 이해는 해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
물론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자비를 거절했다는 말씀으로 쉽게 이해해볼 수도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18, 19절과 관련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요한과 인자에 대한 이야기가 곧바로 나온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금식 할 때에 대한 반응이 달랐고, 인자가 와서 그 반대로 하니까, 또 반응이 달랐다. 요한은 금욕의 길을, 예수는 자유의 길을 제시했지만, 이 길도 저 길도 가지 않으려는 세대를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닫힌 마음과 모순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이 표현에서 본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 문제이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 “싫은데, 내가 왜? 얼마 줄건데, 천만원 주면 생각해볼게”
그래서 보다 더 현실과 접목시켜 생각해보려고 한다.
오늘의 말씀은 장터에 앉은 아이들이 자기 동무들을 불러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장터의 앉은 아이들의 제안이나 놀이나 감정에 동의한 적이 없다.
‘왜 내가, 당신이 피리를 불 때 춤을 춰야 하며, 왜 내가 당신이 슬피 울 때, 가슴을 쳐야 하는가?’ 그 놀이와 그 어울림에 함께 해야 하느냐고, 나는 동의한 적이 없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라.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향해서’였을 뿐이다. 나를 ‘위해서’였다 해도 그 선물이 내게 맞지 않으면 고맙기는 하나, 어딘가 아쉬운 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울어야 할 상황인데, 춤추라고 하면 말이 되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기쁘고 즐거워야 할 상황인데, 슬퍼하라고 하면 그것 역시 말이 되는가? 왜 내가 타자 때문에, 다른 사람 때문에, 내 감정과 내 기분과 마음에 영향을 받아야 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는가?
저는 이 마음에서 공감할 만한 능력이 없을 만큼, 심령이 지친 상태를 본다.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
오늘의 분문은 전후 문맥을 살피면서, 우리가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고 변화되지 않으면, 결단하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다.
앞의 말씀은 세례 요한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가 메시야인지 묻는 장면이고,
뒤에 있는 말씀은 회개하지 아니하는 고을들(마을들)에 대한 내용이다.
앞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헤롯 안티파스의 부정을 외쳐댔던 세례요한은 체포됐다. 그는 명백한 시대의 부정과 부패를 보면서도,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아 넘기는 세대에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무리들은 불의에 항거하지도 않았고, 자기 살기에 급급했다. 외형적으로는 반로마제국주의자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친로마제국주의자였다. 은밀히 결탁한 그의 정치적 행보와 사업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끼칠 영향은 불 보듯 뻔했다. ‘염장사업’, ‘화폐주조’, ‘금융개혁’, ‘조세문제’ 등등 당장은 성장과 발전을 가져오겠지만 실은 빈부의 엄청난 격차와 차별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지성사의 교훈이다. 실제로 로마의 화폐 경제체제가 가져온 시대모순은 여러 차례 말씀 드린 바 있다.
왕왕대던 세례요한은 옥에 갇혔고, 더 이상 새날이 도래 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는 가질 수 없었다. 통치자는 여전히 폭력적이며 역사는 여전히 암울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외쳤다. 그렇기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변화된 비전과 눈이 열리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일까?’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생존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 하나님나라는 뒷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요한을 따라 다니던 무리들이, 예수님께 기대기 시작했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요한복음 6장,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자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구원에 대한 열의가 있는가?’ 절망했다.
그런데 그의 한 가닥 희망이 있었다. 예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한 분이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물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일까? 폭력적 세계질서였다. 그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이었고. 회개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는 전향적인 방향전환이었다.
주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주라.’고 말씀한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덧붙여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무리들의 떡과 배부를 기대와 목표만 세우고 있는 무리들을 보면서 왜 실망감이 없었겠는가?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세대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생길 같은 광야를 거쳐가는 이스라엘에게 well being의 삶이 아니라 Well Being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훈련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주님은 무리에게 ‘그것만이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다.’ 다른 눈을 가지도록 요청하셨다. 이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헌신과 섬김의 삶이 그를 하나님의 자비 속에 들도록 하는 은총이며 신비이다.
그러나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가? 예수님을 하나둘씩 사람들이 물러가고 떠나가는 제자들이 있었다. 주님은 그것을 보면서 왜 낙심되지 않았겠는가? 사람의 열심있는 말도, 호소력 있는 설득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때,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듯, 그 절망감을 경험하셨을 것이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감사를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10명의 문둥병자를 고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은혜를 잊고 사라져버린 이들, 그들은 또다시 변화되지 않은 일상으로 감사를 모르고 돌아갈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다. 능력은 사람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예수님은 그것을 굳게 믿고 계셨다.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 침상 채 중풍병자를 매고 온 친구들의 모습에서, 명령만 하시면 그 종이 나을 것이라고 말한 백부장의 믿음에서, 멸시천대에 단련된 탓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자비를 구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모습에서 주님은 희망을 보셨다. 천하다 여김 받는 과부가 서말 속에 누룩을 전부 부풀게 함처럼, 그 작은 모습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보셨다. 천대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중한 비전이었다. 하나님께는 소망이 있고 은총이 가득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일깨우기를 바라셨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낙심이 돼도 예수님처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에게서 위로와 쉼이 있기를 바란다.
왜 주님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까?
오늘의 말씀 이후에 주님은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책망하신 내용이다. 주님으로부터 필요욕구를 채울 자기중심적인 이기심만 가지고 있지, 정말 주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이다. 귀신들린 자가 주님께 나타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물론, 신앙적으로 보자면 이 말처럼 악마적인 말이 없는 것이다.
‘나만 아니면 돼’, ‘나만 괜찮으면 돼’,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것은, 기억하라. 타락이다. 하나님은 관계하도록 만드셨다. 여전히 변화와 회개 없이 세상적인 지배체제 아래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변화가 없다. 자기를 바꾸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에게 어떤 것을 준다 해도 그것은 욕심일 뿐, 감사와 쉼과 은총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배적인 통치자에 대항할 만한 메시야를 기대했다. 그것은 그 지배자 보다 더 지배적인 권능과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시는가? 주님은 어떤 지배자도 할 수 없는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고 계시다. 병자들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가난한 자, 그는 희망도 소망도 기력도 없는 자이다. 하지만 그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는 복된 소식을 듣는다.
사람이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영적으로 어둡고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배적인 통치자에게 대적할 만한 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고계신 것이 아니었다. 상처받고 고통당하며, 소외되고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오셔서 복음을 들려주신다.
인자는 누구인가? 긍휼과 자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의 모든 행동과 능력이 발생하는 분이시다. 회복된 이들, 치료된 이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하나님의 백성, 자녀 된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욕심을 위한 힘의 싸움으로가 아니라 분명히 자비와 긍휼 속에 꽃피는 것이다.
지배적 통치를 기대하는 이에게 세상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며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칠 수 없었다. 자기중심적인 감정과 생각, 식견으로 세상을 보려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식은 관계를 끊는 말이었고, 그 관계없다는 말은 하나님께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들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인자하신 통치를 기대하는 자에게 세상은 함께 춤추며, 슬픔에 공감하며, 그러나 서로의 연대로 희망을 가지고 일어난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력에서, 어떤 의미의 구원은 이미 이뤄지는 것이다.
여러분 작은 기대와 공감만으로도 우리 삶 속에 새로운 변화와 세계가 열리는 것을 아는가? 겨자씨 만한 믿음이란 마치 이와 같은 것 아닐까? 믿음의 경중이 아니라, 작은 공감과 인정이 큰 산을 옮길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 말이다. 보잘 것 없는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가장 긍휼하신 은총이 꽃필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했다.
왜 주님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고 책망하실까? 나는 주님의 초대는 세상의 초대와 분명 다른 것이다. 그에 응하지 않는 다는 것은 대단히 후회할 만한 일이다. 후회하지 말자.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나의 동의와 공감의 문제가 아니라 강제성을 가진다.
그런데 폭력적 강제성이 아니다. 그것은 동화되는 힘에 의한 강제성을 말한다.
폭력적이지 않은 강제성? 그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엄마한테 혼나서 뿔난 모습으로 놀이터에 나온 아이를 관찰해보라. 어른들은 그 감정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어느새 그 마음이 사라지고 신나게 논다. 뒤틀렸던 마음이 금새 회복된다. 놀이관계 속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힘, 회복되는 힘. 그 강제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라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되는 것이다.
주님은 25절에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기억하라.
동화되고 회복되는 강제성은 하나님과 접속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이 여러분을 이 은총으로 초대하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켜주신다.
그에게는 또한 28절~29절 말씀속의 은총을 누린다. 같이 읽어보자.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가 생각났다. 오늘의 말씀과 통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웃의 잘 됨에 여전히 내 배가 아프고, 시기와 질투심이 생길 수도 있다. 그 마음 때문에 전혀 함께 즐거워할 마음이 없다.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다. 또 어찌 아는가? 아니 이렇게 생각하라. 다음에는 내 차례라고 말이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 이것은 좀 쉽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지금 즐거움을 마냥 만끽하고 누려야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역시 다음엔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라.
저는 여러분이 있어 참 좋다. 고민과 어려움을 들으며 내가 해결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맡길 때 행복하고, 좋은 일, 잘된 일 들으며, 제가 한 일은 없지만 주님께서 주신 복과 은혜, 그 간증을 누려 좋다. 여러분과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다.
피리를 불 때, 춤추고, 슬퍼할 때 가슴을 치고 싶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 이 신앙공동체의 마음이 되기를 오늘 주님은 바라신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 능력으로 살기를 주님은 기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