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29. / 성령강림절 후 3주)

 

어떤 연로한 이가 길을 걷고 있다. 3일 길! 생각보다 빨리 왔는지, 늦게 왔는지 모른다.

어떻게 걸어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거리를 측정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간을 걸었다.

일행이 있었지만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걸을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생각을 안해서가 아니라, 많은 생각을 했지만

막상 기억을 떠올려보려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염려와 근심!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산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있다.

그 걱정거리를 본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이삭을 바치라는 내용이다. 우리가 이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모리아산으로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엄청난, 아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시였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내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를 조금만 집중해서 바라보면 끊없는 실의와 고통이 우리에게 와 닿는다.

 

저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있는 아브라함에게서,

꼭 들어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 우리 시대 깊은 상처를 당한 부모의 심정을 본다.

 

‘왜 내 아들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올 초에 대학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자녀를 잃어야 했던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세월호에서 눈에 넣어도 안아플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떤가?

나라의 부름을 받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큰 사고를 당했다.

‘내 사랑하는 아이의 생명을 사르고 앗아간 그 재난의 불길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무의미하지 않은 죽음이 되게 하기 위해, 다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눈물을 머금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연저지인吮疽之仁이라는 고사가 있다. 전국시대 초기에 위魏나라 장군 오기吳起는 문후文候의 명을 받아 진秦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지 않았다. 등에는 개인용 식량과 의복을 짊어지고 병사들과 똑같이 행군하고 바닥에서 잠을 잤다. 어느 날 등에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병사를 보고는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 고쳐주었다. 그 소식을 인편에 듣게 된 병사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이웃들을 보고 어머니는 말했다. “몇 해 전 그 애의 아버지도 전쟁터에 나갔는데, 등에 종기가 나자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내 치료해 준 적이 있었어요. 남편은 장군에게 깊은 은혜를 입었다며 앞장서서 싸우다가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제는 아들이 장군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그 애도 장군을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죽게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 내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런 종류의 죽음에 바쳐진다면 명에도 있고 명분도 있는데, 모든 죽음이 이와 같지 않다. 설령 명분이나 명예가 있더라도 부모의 심정은 같은 것이다.

“내가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담대한 믿음과 순종을 교훈 삼고 극찬한다. 그리고 도전과 용기를 얻기도 한다.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에, 아무 말 없이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 순종의 모습은 우리의 모범이다.

폰라트라는 학자는 제의에서 하나님께 드리기를 아까워하는 이들에게, 독자를 바치기 까지 순종했던 모습으로, 격려와 위로를 주려는 것이었다고 이 본문을 말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면서도 그 속에 인간의 욕심이 아직 남아있다. 그것에 대응하는 교훈을 준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단순히, ‘사랑하는 독자라도 바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바치지 못할 것이 무어냐고 하기엔 고통당하는 이의 충격이 너무나 크다. 아까워하고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교훈을 의미한다고 하기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더 자세히 집중해보겠다.

 

아브라함은 이중적인 단절을 맛보게 됐다.

첫째는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다. 그동안의 삶의 공과와 업적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밑천이 돼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일가친척과 친분이 있는 이웃들은 기대고 의지할 기둥이 돼준다. 그런데 주님은 떠나라고 하셨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바로 오늘의 명령인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최고의 미래다. 씨를 주어 번성케 하시리라는 하나님 약속의 최고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자신이 꿈꾸고 기대하는 미래와의 단절이다.

 

과거와 단절되고, 미래와 단절된 사람은 어찌 살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요청된 믿음은 지금 현재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현재적인 순종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현실은 그런데, 그러나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됐다. 여기에 우리의 기대와 소망이 있다.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그에게 은총이 됐다.

어제와 무슨 이유에서건 단절해야만 하는 이들, 내일에 대한 아무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고, 그것을 빼앗긴 이들이 있다. ‘과거도 잃고 미래도 없는 사람’ 한 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과거일 뿐이다. 앞으로 잘될 것 같지만 소망이 없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실패나 좌절을 겪고 미래에 대해서는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누군인가?

그러나 길이 없어 보이고 끝장날 것 같지만 아니다. 인생의 운명과 미래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나님께는 분명히 길이 있다. 소망이 있다.

 

저는 물음이 많은 사람이다. 공로주의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복을 얻고 인생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점이 있다.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가증히 여기신다. 그런데, 왜 여기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실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요, 한결같으신 분이시다. 물론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있다. 하나님 답지 않은 명령이나 상황과 현실을 우리에게 주실 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신제사란,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죽여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행위이다. (그림1)

가나안에 이런 제사의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앗수르 제국시대에 그곳에서 들어온 일월성신을 섬기는 종교의식 속에서도 이 모습이 있었다. 자녀를 불살라서 이방신들에게 바치는 행위가 이스라엘에서 버젓이 일어났다.

사사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가장 먼저 자신을 반기는 이를 제물로 드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운명을 누가 알았을까? 그의 딸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예를 들면 보통 전쟁하고 돌아오면 동네 가축들을 동구 밖에서 볼 수 있는데, 입다가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여인들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에서 부친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 상례였다. 율법은 혹 서원이 잘못됨을 알았을 때, 그것에 대해 배상하는 방법이 있었다.

 

달리 물어보면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아브라함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끔찍한 인신제사를, 하나님의 명령도 없었는데, 자발적으로 드렸던 이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인신제사와 동물제사 중, 당대 사람들은 어느 것이 더 종교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고 바라보자면, 인신제사를 더 선진화된 종교의식처럼 여겼다. 굉장히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자극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광신적으로 만든다. 어쩌면 이것을 진보적이고 그래야, 신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 공포를 경험했다. 공포를 경험하면 이상하게, 신에 대해서 세뇌당하듯 광신적인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공포심은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에게 바치는 공로를 통해 인간이 복을 받는다고 하는 무시무시한 공로주의가 있었다. 이것은 폭력적인 희생과 헌신을 강요한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나귀에 안장을 얹고,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해서,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간다. 3일 만에 도착했다. 아브라함은 종들과 나귀를 두고, 이삭과 함께 산에 오른다. 이삭에게는 번제에 쓸 나무를 지게하고, 자신은 칼과 불을 손에 들었다. 주석가들이나 사람들은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있는 이삭의 모습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위로 지고 가셨던 나무 십자가를 연상한다. 그런데 저는 불과 칼을 들었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정작 위험한 것은 아들에게 맡기지 않고 아버지가 들고 있다. 이삭의 모습에서 화목제물로 드려졌던 하나님의 독생자를 볼 수 있다면, 아브라함의 모습에서는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고백했던 시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이스라엘의 제사법과 이방종교의 제사법을 비교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성경은 인신제사를 더 신이 좋아한다고 그릇 믿는 이들에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이면에는 인신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된 비결을 사실은 교훈으로 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인신제사 만큼 확실한 공로주의가 없다.

참종교는 화려하거나 우상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무모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목회자의 메시지를 들을 때가 있다. 그 믿음을 의롭게 여기시고 주님께서 갚아주셨다고 한다. 간증자를 내세워 그렇게 결단하고 실천할 것을 강요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이것이 번영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이상히 여겨 묻는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브라함이 아들을 기만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린양을 드리는 것보다 인신제사가 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대목은 기만행위 역시 정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신제사를 대신해서 어린양을 드리는 것으로도 하나님은 충분히 감동하시고, 인간의 공로나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참하나님을 깨닫게 하는 복선이 되는 부분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위에 놓고 그를 잡으려 할 때였다. 하나님의 사자가 급히 그 행위를 중단시킨다. (렘브란트 그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율법을 알고, 참 제사를 아는 백성은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나님은 광기어린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분이셨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희생제사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공로를 바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이해하라. 그것은 하나의 중요한 상징이다.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수시는가? 아니다. 희생제사의 본래정신은 나의 생명을 전가하는 것이다. 동물(제물)을 바치는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신한 대속의 제물을 통해, ‘나의 드려짐’을 전가하여, 내가 하나님께 드려짐에 대한 예배의식을 갖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경험이다. 이것이 희생제사의 본래 의미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 말씀하시는 지, 이사야를 통해서 들어보라.

“헛된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공로의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죽는 경험과 고백을 통해, 내 삶 속에 하나님이 살아있으며 동행하길 바라신다.

바울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a)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속자가 되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를 대신한 것이라는 단순한 고백이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죽음이 전가됐다. 새생명의 기쁨을 도리어 얻게 됐다. 그것을 기억하라.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 공로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은총으로 주님을 만나고 복을 받는 것이다.

수넴 여인은 남편들에게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목마른 자였지만 그가 주님의 은총을 마셨다. 그래서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다.

 

공로가 없어도 예배드릴 수 있다고 말하니까, 아무 노력이나 의무가 없어도 된다는 말인가?

 

여러분 예비된 것, 예비된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한 숫양이었다.

앞에서 실패와 소망없는 처지에 빠진다고 해도, 사람에겐 길이 없어도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아브라함의 눈이 열리자 숫양을 발견했다. 숫양은 하나님의 방법이요, 예비하심이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예배 속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코 생략될 수 없는 중요한 마음의 자세와 결단이 필요로 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말씀하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미 애초부터 이 일을 시험코자 하신 일이라고 들려주었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여기서 ‘사랑하다’라는 ‘아헤브’라는 동사는 창세기 27장에도 29장에도 나오는 말이다. ‘별미를 즐기다’ 할 때 그 즐기다는 뜻, 또 ‘야곱이 라헬을 연애함으로’ 할 때 그 ‘연애하다’라는 동사가 같은 단어다. 여러분 인생에서 즐기는 것은 무엇인가? ‘연애하는 감정’처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즐기는가? 여가를 즐기거나 유흥을 즐기는 것,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돈을 즐기고, 명예를 즐기고, 안락함을 즐기고, 그 즐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존재 자체가 된 것은 아닌가?

좀 더 인생의 별미를 즐기고 재미에 빠졌다가 나중에 주님께 자신을 바치고 싶어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연애의 감정에 빠지면 수년을 수일처럼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어느새,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무의미한 말미에 누구나 당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신가? 17절

 

오늘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이에게 예비된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라.

내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즐거이 여기며 나오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것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면, 왜 그런가? 하나님의 산 앞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5절 그 산에 올랐을 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믿음의 주인공은 어떠해야 하는가? 아무 공로 없어도 그 산에 올라야 한다. 주님은 거기까지 나아와 그 예비하심을 보기를 바라신다.

 

오늘 바로 지금 이 자리가 그 자리임을 고백하라.

그리고 간구하라. 주님의 예비하심을 말이다.

확신하라. 하나님의 소망있는 약속을 말이다.

그리고 감사하라. 여러분이 바로 그 은혜, 은총, 예비하심에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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