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22. / 성령강림절 후 2주)

 

성령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에 나온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빈다.

(영상)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속담이 있다. 아이들의 문제가 어른들의 다툼의 문제로 번진다. 내가 받는 상처는 괜찮은데, 내 자식이 받는 상처는 참을 수 없어 한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했던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그는 축복하기 전, 사냥한 고기로 별식을 만들어 달라고 한다. 리브가는 그 축복을 야곱이 받기를 바랐다. 에서는 헷족속의 여자들과 결혼했다. 리브가는 젊은날 헷족속의 여인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아무리 며느리들이라지만, 그 축복이 에서에게 돌아감으로 헷족속의 며느리들이 누릴 호강을 생각하면, 그 상처 때문에, 인정할 수 없었다.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었다. 야곱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저주를 받게 되면 어떻게 하냐고 두려워한다. 그때 리브가가 한 말은 무엇인가? “아들아 그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자식을 위해 어떤 저주라도 대신하겠다고 한다. 아들의 축복과 잘됨을 위해서라면 말이다. 그게, 아무리 잘못된 방법이라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것이 어미의 마음이다.

이상하게 엄마의 눈은 내 아이가 피해자처럼 느낀다. 그러나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이 스스로 풀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해결능력과 자립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젊은 날 영원을 찾기 위해 방황하듯 했던 시절에, 체험한 신비를, 그의 책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바가 있다.

 

어느 날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나비는 주글주글 접힌 날개를 펴갔다. 그리고 한참 뒤, 날개가 펴지고, 마르자, 이내 나비는 날개짓을 하며 날아갔다. 또 한 마리가 나오고 있었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니코스는 도와줄 요량으로 입김을 불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나비는 서두르지 않았다. 신의 영원한 법칙과, 따스한 공기와, 빛을 자신 있게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조급해졌다. 어서 빨리 기적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기를 바랐다.”

붙었던 날개가 떨어졌고, 금새 나비의 날개는 펴졌다. 그런데, 그 나비는 날지 못하고, 곧 죽어버렸다.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을 통해 나비는 날아갈 수 있는 생명의 힘줄과 능력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니코스카잔차키스는 이런 독백을 들려준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우리 어머니들, 주님께서 자녀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더하시고, 슬기롭게 자라나도록, 기도하며 기다려줄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발단은 이와 같다. 이삭이 태어나 젖을 떼는 시기가 됐다. 그를 하갈의 아들이 놀렸다.

 

이삭!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불가능했던, 아들이다. 아브람의 나이도 나이지만,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고, 인간적인 기대로는 말이 안됐다.

 

그렇게 얻은 아이가 젖을 떼게 됐는데, 얼마나 기뻤을까?

 

아이가 100일이 되기까지는 조심조심한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에는, 100일이 되기도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젖을 떼게 됐다는 것은 안심하게 됐다는 말일 것이다.

사라는 어땠는지 몰라도 아브라함은 기뻤다. 사라는 어땠는지 몰랐다는 것은 이것이다. 젖을 빨리 떼는 경우도 있고, 늦게 떼는 경우도 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모성애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동일한 것이다. 사라는 좀 더 뒤에 젖 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지만, 육아의 문제는 예나지금이나 여자에게 민감하고 예민하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축하하고 기뻐하기 위해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그날, 일이 벌어졌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갓 젖 뗀 이삭을 놀렸다는 것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집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됐다. 사라의 입장에서 하갈이 여종이니까, 내버려도 그만이다. 그러나 하갈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처럼 여자가 능력 것 살 수 있는 때라면 모른다. 하지만 이 당시 여자는 울타리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때였다. 그는 어떡하겠는가?

 

캄캄했다.

 

이삭은 아무리 못해도 10살은 넘은 나이였다. ‘다 큰 녀석이 갓 젖 뗀 아기를 놀렸다면, 분명히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다.’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그렇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라. 이스마엘도 아직 애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도 돌봄이 필요하고, 여러 모로 미숙하기에 잘 타이르면 되지 않는가?

 

이 일을 누가 봤느냐가 문제다.

v.9 ‘사라가 본즉’ 사라의 눈에 그렇게 비췄다는 것이다. 사라가 보니까 그래보였다는 것이지 사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놀리는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오해였을 수도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튼 이 일로 인해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이를 내쫓자고 한다. 사라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애들 문제가 이렇게 비화되다니, 놀랍지 않은가?!

작은 일이 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늘 언행을 조심히 신중히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뿐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든다. 그래서 문제가 커질수록 크게 반응하면 안된다. 침착하고 작게 반응해야 한다.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한 가지!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큰 문제도 작게 보이고 능히 이길 수 있다.

 

아는가? 문제를 크게 만드는 이유를 말이다.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저는 오늘 성경의 내용에서 단순히 아이들의 문제가 발단이었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엄마들이, 애들 싸움을 어른 싸움으로 만들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라의 욕심, 시기심, 열등감, 부정적인 생각, 콤플렉스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도 상한 심령이었고, 상처를 입었다. 인간의 죄성이란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신, 사랑의 창조성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10절 말씀을 보자.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아이들의 문제를 비약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꼐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자, 한가지 질문을 가져보자.

이스마엘이 장자일까? 이삭이 장자일까?

 

유교사회였던 우리의 정서에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스마엘은 서자이고, 이삭이 장자라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스마엘을 여종을 통해서라도 낳은 목적이 무엇인가? 씨를 잇고 기업을 잇기 위한 목적도 이었던 것 아닌가? 이젠 주인에게서 나은 자식이 있으니, 필요없다고 하는 것인가?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어디있는가?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은 악마성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아무런 생계 대책 없이 고아처럼, 과부처럼 내버리자면 어쩌자는 것인가?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일까? v.12절

 

어째서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 있을까? 약자의 하나님,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화목과 화평의 지혜를 주셔야지 사라의 편을 드시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가 옳아서는 아니겠지만, 결국 하나님은 ‘갑’을 붙드시고, ‘을’을 놓으시는 것일까?

여기서 신앙의 비밀을 발견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갑의 편을 드시는 것 같고, 당장 억울하고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채우시는 또 다른 섭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 살펴보자.

 

하갈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그는 사람의 이용물에 불과했던 것이 아닌가? 주인이 임신을 못하자, 아브람의 씨를 받아 이스마엘을 낳았다. 임신했을 때, 사라의 눈에는 그가 아이를 가져 교만해졌다고 생각했다. 성경도 이 입장에서 전하고 있다. 그래서 주제넘게 주인인 자기를 멸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도 일방적인 오해였을 가능성이 크다.

임신을 하면 잠도 많아지고 몸도 무거워진다. 더 많이 먹고 활동은 더 줄어들 수 있는 것이다. 입덧을 하게 되면 어지럽고 고통스럽다.

그게 사라의 눈에는 거드름을 피우고, 주인을 멸시한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다. 자격지심 때문에 말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상대방의 입장이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에서 생각하기 쉽다. 사라가 임신한 하갈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하갈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라의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편하고 좋았던 경험을 기준으로 하갈에게 대니 문제였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다. 여러분, 사람을 학대하고 괴롭히는 모습이 자신은 모르겠지만, 얼마나 추한지 아는가? 밀양의 송전탑에서 벼랑 끝에 몰린 할머니들을 끌어내고, 일을 마무리 한 후에 씩 웃으면서 자축하고 웃으며, V자 사진을 찍었던 모습에서 볼 수 있다.

 

하갈은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도망갔다. 오죽했을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를 위로하고 주인에게 돌아가 ‘복종’이라는 용기를 내도록 힘주셨다.

이제 또다시 내쫓기게 됐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이스마엘이 있다. 아들이 있다. 그때는 내쫓기듯 도망을 갔지만 지금은 대책없이 내쫓기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까?

 

14절부터 16절은 하갈의 고통스럽고 슬픈 마음을 들려준다. 그는 비참해졌다.

14절 얼마간 먹을 음식과 물을 주었다. 얼마 만큼인가? 어깨에 맬 만큼이다. 이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성경은 그의 실존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했다.’ 불만이나 불량한 마음으로 방황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찾아와서 방황했다.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아는가? 브엘세바는 참 이상한 곳이다. 이제 이것을 살펴보자. 엘리야가 아합왕의 아내였던 이세벨의 협박을 피해 숨었던 곳도 이곳이다.

이곳 로뎀나무 아래서 그는 식량이 떨어지고 목이 말라,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 생명을 거두워주소서.’ 그 심정을 토한다. 그런데 죽으려고 정신을 놓고 나면, 천사가 어루만지며 깨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다. 곧 죽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죽고 싶었지만, 순간순간 기회가 왔다.

그런데 엘리야의 인생에서 이곳은 제 2의 장소가 됐다. 왜냐하면 깊은 자기절망과 모순을 일깨우신 곳이기 때문이다. ; ‘열심이 특심이온데, 나만 남았다.’ ; 세미한 바람이 불어왔는데, 그 세미함 속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르다. ‘아람왕이 될 하사엘, 이스라엘의 왕이 될 예후, 엘이야를 대신하게 될 엘리사가 있다. 그리고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두시리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는 자기만 열심히 있고 자기만 남은 줄 알았는데, 엘리야의 특심(열심)만 특심(열심)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한 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슨 말인가? ‘나만의 열심’과 ‘나만’ 이라는 자기중심성만 가지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능력만 믿고 자기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현존에 눈을 떴다.

여러분 나만의 ‘열심’으로는 하나님의 희망과 약속을 듣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을 깨달을 때, 우리에게 소망이 생기고 용기와 담대함으로 순종하게 된다.

엘리야에게는 하나님께서 명한 이들을 일으켜야 할 새소명과 사명이 생겨났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15절, 물과 음식이 다 떨어졌다. 자기가 죽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들을 보니, 아들이 죽는 것은 차마 못보겠다고 소리내어 운다. 자기의 처지를 보니 소망이 없었다. 그런 것이다. 절망 가운데 자기를 보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을 보라. 하나님께는 분명히 방법과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무슨 일인지 몰라서 ‘무슨 일이냐?’ 물으시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자다가 깰 때, ‘왜 그래? 왜 울어?’ 물으며 안아준다. 올라서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다. 자다가 깨서, 엄마를 찾는 다는 것을 안다. ‘왜 그래?’라는 말의 전제는 ‘엄마 여기 있어!’ 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갈아 무슨 일이냐?’ 물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강하게 깨닫게 하시기 위한 물음이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상하지 않은가? 소리내어 운 것은 하갈인데, 하나님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신다.(16, 17)

첫째, 하나님과 기도하며 통하는 볼륨은 그리 높은 것이 아니다. 세미함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의 음성의 세미함을 하나님은 들으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셨던 하나님은, 그 작은 소리에 귀를 여시는 것이다.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는 않는 세미함에 주님은 귀를 귀울이신다.

 

둘째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있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셨다. 사무엘이 왕이 된 사울 때문에 낙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무엘은 볼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시다. 마찬가지로 하갈은 아이를 바라보면서, 그의 운명이 슬퍼 애달파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다. 그의 장래를 바라보고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18절을 보라.

 

하나님의 위로와 충만함으로 채워지길 사모하자.

19절을 보니, 하갈의 눈이 밝아졌다. 방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무엇인가? 샘물이 곁에 있음을 보았다. 목마른 자를 부르시고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밝히셨다. 그에게 새 소망과 사명이 채워졌다. 20-21절을 보라. 이전엔 종의 아들로 키워야 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또다른 약속의 아들로 키우는 것이다.

변화라는 선물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자주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새소망과 이상과 비전과 약속을 통해 우리에게 변화라는 은총을 선물로 주신다.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무겁고 어려운 현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 샘을 발견하는 브엘세바이다.

 

브엘세바는 어떤 곳인가? 곤고한 이의 상황이며 현실이었다. 그러나 죽고 싶어도 죽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다. 왜냐하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계시고 지키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황량하고 절망만 있는 곳인 것 같다.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떨어지면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주님께서 먹이시고 돌보시고 희망을 주시는 곳이다.

나의 열심과 자만이,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 충만으로 바뀔 때, 새소망과 희망이 우리에게 비치는 곳이다. 엘리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사명을 깨닫고, 새소명을 부여받았던 곳처럼, 그 곤고함에 처했던 하갈과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기억하라. 우리의 브엘세바라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역사와 섭리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내 자식과 같은’, ‘목숨과도 같은’ 감당해야할 현실이 있는가? 하나님은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두셨다. 그것을 잊지 말라. 오늘 그 은혜가 지금 이루어졌음을 믿고 승리하라. 믿음의 반석과 확신 가운데 서기를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바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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