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15. / 삼위일체주일, 성령강림절 후 1주)

 

1.

한 주간 어떻게 살았는가? 참 어려운 때에, 고생하셨다.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있다.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첫째 주이자, 삼위일체 주일이다.

코끼리 다리만 만져보고 코끼리를 알 수 없듯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에 대해서, 완벽할 수는 없지만, 온전하게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절기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바르고 온전하도록 정한 절기일 것이다.

어제 경제관련 기사에서 이런 제목의 내용을 봤다.

 

‘이라크의 사태가, 세계 원유시장의 돌발변수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우리의 실질적인 관심사를 잘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런데 이기적이다.

 

갈등과 전쟁을 통해 살상되는 수많은 인명피해에 대한 염려는 뒷전인 것 같다. 미국의 드론이라고 하는 무인폭격기는 정말 무시무시하다. 그로 인해서 실제로는 무고한 시민과 어린이들, 여성들까지 무참히 살해된다.

 

브라질에서는 세계적인 축제라고 하는 월드컵이 화려하게 개막됐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의 상당수가 월드컵에 반대하며 시위에 나섰다. 왜그럴까? 분명히 기억할 것은, 그 이면에 세계적인 축제를 위해 내몰리고 고통당하는 다수의 브라질 국민들이 있다. 그 피맺힌 눈물과 절규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눈물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축제를 위해서, 누군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왜 그런가? 이기주의 때문이다.

개인적이든, 국가든, 사회든, 세계든, 그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 우리에게도 고통이라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 주간 세상에서 좀 손해를 봤다든지, 속상한 일이 있었다면, 주님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빈다. 이기적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피해가 있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도 영광으로 나타나게 하신다.

 

 

2.

지금 주님의 열한 제자는 갈릴리, 어떤 산에 서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셨던 곳이다.

열한 제자들은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가 누군가 살펴보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신비를 경험한 이들이었다. 신앙체험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17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더라.”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있고, 경배까지 하면서, 왜 의심하고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신앙의 문제는 늘 의심하게 돼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체험을 확신있게 하면서도 말이다. 왜일까?

 

지금 제자들은 갈릴리에 있다. 그래서 그렇다. 무슨 말인가?

갈릴리는 제자들의 삶의 자리요, 터전이었다. 고기잡는 어부들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다. 거기서 친분이라는 관계도 맺는다. 이모양 저모양으로 살던 일상적인 삶의 장소이다. 공생애중의 예수님이 제자로 불러주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러나 결국은 삶의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이나 그 때나 세상은 이기적이었다. 이기적인 현실이 존재한다. 부활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특정한 장소에서 자신들 만의 왕국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자리에서 여전히, 살아야 했고, 존재해야 했다.

 

<결혼은 현실이다.>

사랑하던 연인이 결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어떤가?

결혼은 현실이다. 경제문제, 생활습관의 차이,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과의 관계문제 등등이 있다.

처음 부부돼서 싸울 때, 큰 것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이다. 생활습관의 차이들일 수도 있고, 작은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 싸운다.

처음엔, ‘당신은 왜그래?’ 다음 단계는 ‘당신 집은 그래?’ 이렇게 번지면 대판이 된다.

이상과 현실이 달라서 회의를 품고 갈등하고, 고민에 빠진다.

 

<삶의 자리도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자리는 현실이다. 이익과 손해, 의무와 책임, 이성과 감성. 이런 사이에서 누구에게나 삶의 자리는 버거울 때가 있다. 책임져야할 대상이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 생각하는 갈대처럼 살아간다.

 

<퇴수회의 자리는?>

베드로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했던 변화산에서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짓고 머물자.’는 것이었다. 삶의 자리를 회피하고 싶을 때도 있고,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휴가를 나왔던 군인들이 부대로 복귀하고 싶지 않다. 휴가를 마친 사람들이 일상으로 다시 복귀하기 싫은 마음이 생긴다. 아쉬워서 그렇다. 풀어야할 과제가 있는 무거운 현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님은 승천하시고 자기들을 떠나가시면, 누구를 의지하며 살 것인가?

 

이 복음을 듣고 있는 독자, 청중, 그 대상은 누구이며, 상황은 어땠는가?

주후 70년 경, 로마의 군대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 파괴의 고통과 전쟁의 씻기지 않는 상처를 가졌던 이들. 주후 85년~90년 경, 박해와 순교, 그리고 이들에게 쏟아졌던 유대인들의 비난과 조롱.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에 너무나도 먼 이기적인 현실과 삶. 그 상황속의 신앙인들이다.

 

‘예수님을 믿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 이유가 이해가 되는가?

 

제자들의 이야기가 마태 공동체의 신앙인들에게 적용됐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누구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가?

 

18절에서 19절 상반절은 바로 그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의 승천을 경험했던 제자들의 마음은 아쉬움과 염려, 불안, 걱정, 두려움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주님께서 분부하신 일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마치 사명을 물려받았을 때, 처음 순간의 긴장감처럼 말이다.

주후 1세기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의 제자들이 ‘사도’의 이름으로 복음의 투사가 되어 목숨바쳐 헌신하며, 자신들의 울타리와 버팀목과 같은, 의지가 되었다. 그런데, 순교를 당하거나 연로함으로 사도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큰 믿음의 스승이요 멘토들이었던 사도들을 잃었던 마태공동체의 성도들은, 오래전 사도들이 느꼈던 동일한 마음을 겪고 있다.

 

예수님의 분부하심을 통해 제자들이 믿음의 결단과 용기로 일어나 사도들이 되었다.

로마의 치하에서 어두운 시대를 겪었던 이들에게도 동일한 믿음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로 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1)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18b)

2)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20b)

 

 

앞에서, 이기적인 세상에서 혹시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드렸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19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해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라.

일차적으로는 세계선교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역시 이 말씀이 유효하다면, ‘제자 삼으라’는 말씀과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전도와 새신자에게 적용>

 

결혼은 현실이라고 말했다.

어떤 부부는 결혼생활이라는 현실을 만나, 연애시절과는 다른 새롭고 더 성숙한 이상을 세워가는 가정이 있다. 반대로 어떤 부부는 과거의 이상과 기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10년, 20년 가도록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가정이 있다.

키포인트가 뭘까? 서로에 대해서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느냐, 못하느냐에 있다. 대부분 보면 이기적인 마음과 자기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버리지 못해서, 문제의 연속이 된다.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로 한지 알 수 없다.

 

다시 태어나 이사람을 만나 결혼할 것인가? 말것인가? 라는 질문!

어떤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 만나서 적응하고 길들이는 세월이 힘들어서라도 차라리 살겠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노력과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말일 것이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 이다. 이기적인 현실과 이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 사이에서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사도처럼 되기 위해, 성실한 노력과 결단은 필수적이다.

 

에수님께서 지시한 곳에서 : 바로 이 자리가 그 확신과 믿음을 세롭게 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이기적인 세상에 우리를 보내셔서 하나님나라의 이타적인 원리를 심어놓기를 바라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성부는 누구인가?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하는 보호자의 인격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성자는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고난을 당하셨다. 욥의 이야기가 누구의 이야기인가? 고난을 당하는 이야기인데, 바로 우리의 삶의 이야기 이다. 성육신 사건은 인생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령은 누구인가? 우리 안에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지혜와 위로와 용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눈뜨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초월해 계신 하나님만 믿으면, 광신이 된다. 인간은 아무 노력도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아무데나 하나님의 뜻이라고 갖다 붙인다.

성자 하나님만 강조하면, 인본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성령 하나님만 강조하고 몰입하면, 신비주의적이고 맹신적이 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변화될 수 있다. 이기적인 세상과 현실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다.

 

어느 가게에 스님이 찾아왔다. 그리고 시주하기를 기다리며 목탁을 두들겼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는데, 스님한테 시주할 수는 없었다. (안~ 주면 가나봐라. vs 그런다고 주나봐라)

결국 스님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께름칙했다. 그래서 소금을 확! 뿌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스님이, 젊었을 때, 수행을 한답시고 자주 탁발을 나가곤 했단다. 집집을 찾아다니며 동냥하는 것이 중에게는 수행이지만, 거기에는 다른 뜻도 있다고 한다. 욕심 사나운 중생들에게 베풀 줄 아는 성품을 길러주기 위해서, 그들 앞에 거지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냥은 안 주고 쪽박만 깬다.”는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는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인들이란다. ‘우리 예수 믿어요.’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른단다.

이 스님이 묻는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중에게 시주를 하지 않는 구실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 ‘시주하는 것은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는 것인데, 못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스님은 마침표 같은 말을 한 마디 덧붙인다. “예수님이라면 아마도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말씀을 왜하는가 하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 말씀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에 제한을 두거나 가리라고 분부하지 않으셨다. 더 큰 사랑과 이타심을 가지고 살라고 가르쳐주신다.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