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6.1. / 부활절 일곱째 주, 승천주일)
나병환자 10명이 주님께 나와 자비를 구했다.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치료와 회복을 의미했다. 성경은 그들이 돌아가면서 몸이 깨끗해졌다고 증언한다. 그 중에 한명이 돌아와 주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주님은 그를 장하게 여기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요 내용이다.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구하는 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겠다.
당시에 나병은 불치의 병이었다. 그 병으로부터 낫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다. 건강 이상은 단순히 육신적인 고통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이전엔 미처 몰랐을 법한 고마운 일상, 그 일상을 잃은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보라. 마음에 깊은 어둠이 내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됐다는 절망은 삶이 끊어지는 고통이다.
더구나 나병은 창피하기도 했고, 누가 뭐라지 않더라도 수치와 모욕감을 스스로 껴안으며 살아야 했다.
여러분, 중한 질병이 생겼을 때, 정말 힘든 것은 무엇일까?
내 한 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끝나는가? 그러면 다행이다. 그러나 가족이 있음을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가 있다. 아내나 남편도 있다. 그런데 나 없이 어찌 살지도 생각해보라.
책임지고 돌봐야할 가족이 있다는 것! 그런데 나 때문에 슬퍼할 이들에게 안겨줄 수 있는 ‘미안함’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심적으로 무척이나 힘들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이들을 더없이 불쌍히 여기셨다.
그 자비로운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가? 들어보라.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일상으로 강건하게, 건강하게 돌아가기를 주님은 바라셨다. 여기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길이 들어야 한다.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몸은 건강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나, 주님 저도, 우리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늘 인생이 곤고하고 위태롭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 넘어진 경험이 누구는 없겠는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어떤 ‘책임감’이라는 것을 등에 지고 있으나, 내일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가 많다. 그 낙담이 슬며시 자리를 차지한다. 그 괴로운 심령은 왜 없겠는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안되는 한계 상황을 만나, 곤고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 이다. 사실, 당연하다, 아무 문제없다 자부하는 일상이, 위태롭지 않은 사람은 (사실) 단 한 사람도 없다.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한 번 짚어보겠다.
‘누구에게 응답이 있었으며 자비로운 은총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병환자 10명을 나병환자 1부터 10까지 번호를 매겨보라.
나병환자 1, 나병환자 2, 나병환자 3, 나병환자 4…. 그리고 나병환자 10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엑스트라 같은가? 그런데 엑스트라도 나름 캐릭터가 있고, 이유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정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는데 그 반대가 됐고….. 어쩌면 여러분의 삶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한 부분을 가지고 살던 사람일 수 있다. 고통 받는 사람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인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들은 우리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사람인가?
우리는 통상 모두를 나병환자 10명이라 칭하지만, 사실은 각자마다 정말 다양한 삶의 처지와 형편내지는 사연이 있었다.
이중, 고침을 받도록 선택된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깨끗하게 되었는가? 10명 모두!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바는, 누구는 해결되고 누구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모두 예외없이 고침을 받았고, 해결이 되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말이다.
‘주님을 만남으로!’
이게 중요하다. 왜 중요한지는 잠시 후에 살펴보겠다.
그 전에 잠시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져보겠다. ‘언제?’라는 질문이다.
주님은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언제인가?’
주님을 만나고 돌아가는 도중에, 제사장에게 보이기도 전에!
이제 제사장이 재검사를 하고 통과만 되면, 그들은 모두 ‘야호’를 외칠 수 있다. 왜일까?
마치 바벨론의 포로되었던 자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때, 꿈꾸는 것 같았다고 했던 고백처럼,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면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아내리라 했던 일상의 자리, 삶의 자리로 돌아 갈 수 있었다.
‘도중, 사이, 일어난 시점’, 이것도 저는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조금 뒤에 살펴보겠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나병환자 1,2,3이 아닌 특별한 이를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
그는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그는 의외라고 생각되는데, 사마리아인이었다.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되돌아 와서 감사를 표현하거나 보답하지 않았음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낸 말씀일까?
이제 좀 전에 중요하다고 했던 것을 살펴보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리의 모습도 이 열명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9명의 모습이 있는가하면, 사마리아인과 같은 단 1명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우리의 체험에서 유추해보자.
첫 번째, 망각이다.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잊거나 망각했을 가능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능력 있으신 분이다. 그런데 주님이 하셨다는 생각을 못하고, 저절로 된 일거나 우연히 된 일처럼 여길 때가 많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어쩔 때 보면 참 간사하다. 갈급한 문제에 무엇이라도 주님께 서원할 수 있는 용기로 주님께 도움을 청하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 마음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저절로, 우연히, 그냥 일어난 일로 여기고 만다.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지는 않는가?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가 그렇다. 이 예배에 나온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만나고, 우리에게 변화, 새로움, 그 희망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우리와 만나주셨다. 그런데 이 문을 나가면서 그것을 새카맣게 잊는다. 삶이 바쁘고 분주해서, 주님을 기억할 틈도 없다. 그러나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깊은 곳까지 찾아오시고, 주님을 만났음을 깨닫길 원하신다. 그러기에 새 힘과 용기를 갖기를 바라신다. 담대하기를 바라신다. 그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우리 삶의 중심을 놓기를 바라시는 줄, 믿길, 원하신다.
두 번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무지이다.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한 무지이다. 나의 문제도 해결됐는데 무지하다. 이미 주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데, 알지 못한 것은 아닌가? ‘길가다가’ 주님께서 이미 문제가 해결되도록 역사하셨는데, 믿음이 없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들려주고 있다. 여러분, 이 문을 나가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부지불식간에, 또 똑같은 문제를 만나기도 전에, ‘길가다가’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확신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또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어떤 존재였는지, 주님 앞에 예배하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이 어땠는지? 그러나 이 예배를 드리고서, 주님의 임재와 자비하신 은총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만나고서 우리 심령과 존재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감사함과 확신이 있길 바란다.
세 번째, 또 하나는 이후의 삶이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다. 주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다.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영광을 박수를 드리며, 칭송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깨닫고 삶을 경이롭게 받아들이며 경축하는 것이다.
잘 아는 목사님이, 유럽의 몇 나라를 다녀왔다. 사람들이 인사 삼아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자연, 이국적인 풍경, 장엄한 건물들, 가만히 떠올려봤다. 그런데 가슴 깊이 새겨진 곳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여행중 지친 다리를 쉴 겸, 어느 예배당에 들렀다. 관광객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서 블루진 차림의 어떤 중년의 남성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 고요함을 차마 깨뜨릴 수 없어서,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런 행동으로 고요 속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잘츠부르크 어느 좁은 골목에 있던 작은 예배당, 문고리를 잡아당기다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어느 수도자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가만히 문을 닫고 말았다고 한다. 또 로마 근교에 있는 바울 참수 교회에서, 아직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전에, 하얀 수건으로 장의자를 닦는 봉사자를 보았는데, 어느 순간 보다도 거룩한 장면으로 기억됐다.
목사님이 여행 중에 본 것은 어느 멋지고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일상’의 경이로움이었다. 이것은 타국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 이 교회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연환경이나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그 현존하심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더 아름답다. 이것에 눈 뜰 수 있기를!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면, 먼저 성전에 앉아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교제를 나눈다. 우리의 일상과도 같은 곳이다.
물론 상처도 있고 갈등도 있고 아픔도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하심이라는 영광을 드러내는 삶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삶의 문제나 애환이 없을까, 그곳은 우리와 다른 더 좋은 곳이며 천국 같은 별천지의 세계일까?
우리의 소박한 일상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고 임재하심을 깨달으며 경탄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기억하라. 주님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셨다. 들에 핀 꽃을 보라. 공중의 새들을 보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 속에 무한한 은총과 자비하심이 있음을 발견하게 하셨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경탄의 능력을 회복하고,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현존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도의 마음으로 살 때라고 말이다. 수줍께 피어나는 꽃들, 새들의 지저귐,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모습,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 사랑스레 마주보고 있는 연인들, 시린 가슴을 부여안은 채 울고 있는 이들… 그것은 칼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자면, ‘초월자의 암호’이다.
주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드린 이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한 사람은 나머지 9명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나머지 아홉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친 사람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 단 한명은 문제해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경탄하며 영광을 돌림으로 ‘변화’라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 신앙의 목표나 목적은 어떠해야 할까?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은 어느 누구도 그냥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10명 모두가 은혜를 입고 문제가 해결됐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허락하신다. 부지불식간에 응답하신다.
어떤 사람은 돈이 문제해결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문제해결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출세와 성공이 문제해결일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아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구원받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단순히 문제가 해결된 인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변화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구원받은 존재가 되길 바라신다.
영상 하나 보고 마무리 짓겠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자녀가 돌아오길 바란다. 남편이 돌아오길 바란다. 아내가 돌아오길 바란다. 사랑하던 사람이 돌아오길 바란다. 바로 여러분이다.
‘변화’라는 구원의 의미를 우리 삶 속에서 누리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