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25. / 부활절 여섯째주)
- 예수를 믿기 어려운 시대
오늘날,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 어렵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왜일까?
세상이 너무 살기 좋아졌다.
예전에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절실한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다.
교회가 감당하던 일들을 대부분 사회가 제도적으로 떠맡게 되었다.
교회의 의료와 교육사업. 세상의 소외되고 그늘 진 곳에 대한 봉사(고아원, 양로원, 복지)
지금처럼 의학에 대한 인식과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교회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회는 부도덕한 사회에 복음적인 경종을 울렸고, 불의에 항거하기도 했다.
예전엔 교회는 정말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세상사람들에게 절실하지 않다. 좋은 일들을 교회가 안해서가 아니다. 여전히 좋은 일들을 많이 한다. 종교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 사회가 많이 발전했고, 교회에 대해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다 보니, 이런 모습이 잘 비춰지지 않기 때문일 거다.
노엄 촘스키라는 학자가 ‘중심부’, ‘주변부’라는 담론을 말한 바 있는데,
이것에 비추어 보자면, 교회는 중심부였는데, 이제는 주변부가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에 교회는 사회의 중심부도 아니었는데, 주변부일 뿐이었는데,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중심부 같은데, 주변부 역할도 제대로 못한다.
아무튼 오늘 시대는 다양한 생각, 의식이 있다. 문화가 있다.
교회에 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필요를 채우지 않아도 세상이 그 역할을 감당하면서, 세상에서 필요를 채운다. 그리고 복음은 크게 필요치 않게 되었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기 참 어렵다.
- 아덴에서의 바울
동네마다 어떤 분위기와 색깔이라는 것이 있다. 바울이 아덴에서 느낀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예수의 복음이 절실하지 않은 이들에게 예수를 전하기도 어렵고, 또 듣는 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생각과 사상, 매체와 문화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바울이 전하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꼭’이라고 듣고 믿기도 참 어렵다.”는 것이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곳은 서양철학의 발상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덴은 지금의 그리스도의 수도인 아테네를 말한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 5천명정도가 있었다. 이렇게 추론하는 이유가 있다. 이 당시 투표결과가 보고된 자료가 있다. 찬성 3461, 반대 155.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고려해서 생각해보면, 투표권을 가진 시민은 약 5천 명 정도가 되는 사회였다.
이런 투표와 선거 제도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 사회가 어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민주적이었고, 합리적인 시민사회 의식의 맹아들을 가지고 있었다.
17절에 나오는 ‘장터’(아고라)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경제생활의 중심이었고, 시민들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다양한 의견들과 생각들을 나누는 직접민주주의의 열린 광장이었다. 19절에 나오는 ‘아레오바고’는 법정역할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중요 회의의 장소였다.
여기에 중요한 철학사조를 이루고 있는 두 학파가 있었다. 18절을 보라.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 학파였다. 여기서 이 학파들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다할 수가 없다. 서양 철학사에서 양대산맥을 이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 두 용어 만으로도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로 한가지씩만 예를 들어 말하자면, ‘에피-’는 다양한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주장할 수 있는 사유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스토아’는 형이상학적이라고 하는 숭고한 진리를 추구하도록 만드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어렵고 생소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에 최고의 지성의 전당처럼 여겨지는 동네가 바로 이 동네다.
또 아테네는 예술과 문학이 발달한 곳이었다. 16절에 보면 바울이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함’을 보고 마음이 격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의 우상은 종교성이 있는 마술적이고 음험한 조각상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조각의 아름답게 수놓은 예술품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예술품들에 담겨 있는 사상과 정신은 인간의 본성과 양태를 함축해 놓은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오늘 우리 현대 사회와 견주어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다문화, 다종교, 다양한 사회, 다원주의 사회였다.
여러분, 여기에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고,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바울은 17절을 보라.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즉 안식일에는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다는 것이다. 평일에는 장터(아고라)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려고 했다.
어떤 반응이 나타났는가?
복음을 듣는데, 관심은 참 중요하다. 무슨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21절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이들의 관심사는 최첨단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별로 관심있게 듣지 듣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것이기에 주목해보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믿는 확신이나 신념과 진리를 뛰어넘는 것인지, 이러한 관점으로만 보려고 했다. 이런 것에 관심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들릴 리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지 않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지만 이성이나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따져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첨단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었다.
18절에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아덴의 입장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온 또 하나의 종교요,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종교와 사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니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의미는 담고 있지만, 자기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바울이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은 그리스 아테네인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내용이다.
성경의 내용을 아테네 시민의 용어와 말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잘 사용하는 언어가 세상에서도 잘 이해하리라는 것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쉽게 사용하는 말도 세상에서는 생소한 말인 경우가 많다. ‘성령충만 받았다.’, ‘은혜 받았다.’ 이런 말들을 세상사람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많이 배우고 학식이 있으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학식과 상식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주님의 복음은 ‘십자가’라고 하는 고통을 통해 나타나는 ‘신비’이다.
참 복음을 전하기 어려웠다. 그곳이 아테네였다.
19절에 그를 ‘붙들어’ 이 말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임의 동행 형식으로 따라가게 되었다는 것인지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레오바고는 새로운 종교와 교육의 검증의 장이 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바울이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울이 복음에 대해서 핵심적인 내용을 설득력 있게, 알아듣기 쉽게 잘 전했을까? 바울이 말을 잘 못한다고 비난 했던 고린도 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말은 틀리다. 18절을 보면 바울에 대해 ‘말쟁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굉장히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수준 높은 수사학을 사용할 줄 알았다. 무슨 말인가? 말을 참 잘했다는 뜻이다. 24절부터 31절에 증거되는 바울의 말을 보면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은 좋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칭찬하면서, 마음을 열게 한 뒤에, 창조주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을 설득력있고 감동적으로 전한다. 이보다 더 잘 전할 수 는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늘 우리 시대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복음을 감동적인 말로 전해도 전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여지기도 어려운 상황과 여건이다. 여러분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복음으로 포장하며 인기 있는 말을 전하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게 없는 순수복음을 전하는 것은 다르다.
32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대놓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관심을 보였다는 말이 곧 결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작은 결실이 있었다.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하는 여자,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주님은 네 곳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하나가 30배, 60배, 100의 결실을 얻었다. 한 명 전도하기가 참 어렵다. 모든 수고가 허사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낙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한 명의 전도에 대한 결실이 어떤 결과와 열매를 맺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처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솔직히 물어보자. 우리의 믿음에 관한 모습은 어떤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길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그 뒤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믿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에게 정말 절대적인가? 십자가 복음과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의 종교와 사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악세사리처럼 장식하고 두르려고 하지 않는가? 물어야 한다.
물론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건전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욱 이 물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종교와 사상과 문화 속에서 변질되고 왜곡된 것을 예수의 복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여러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한참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불안해졌다. 내일 먹을 것에 대한 염려, 광야 생활의 어려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내일에 대한 불안…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을 없애고자 하는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달라고 한다. 아론은 사람들로부터 금을 모아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아온 금을 불에 던졌더니, 송아지가 나왔다고 말한다. 여러분 이 송아지가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을 아는가? 다른 신으로, 새로운 신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다. 아론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신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변질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가 절실하지 않은 시대에 맞춰 대충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기대하실까? ‘대충’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성경을 통해 증거되는,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대충 믿거나 두 주인을 섬기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십계명의 제 일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말씀하셨다. 주님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믿되 온전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신다.
- 다문화, 다종교, 다원화 사회에서의 신앙생활
하나님은 어떤 신앙과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실까, 묵상하다가, 여호수아 24장 14절의 말씀이 생각났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고,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에게 한 말이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백성들이 대답한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16)
거기에는 광야에서와 비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기회와 안정과 풍요의 땅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몰아내지 못한 아모리 족속과 그 우상들이 공존하고 있고, 풍요와 번영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들의 이름이 있었던 곳이다. 세상적인 것들, 사상, 문화, 신념들이 우상이 되어, 욕망에 사로잡힌 심령들을 유혹하기 쉬운 곳이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헛된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기 쉬운 곳이었다. 광야에 비하면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황폐할 수 있는 곳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섬길지, 우상을 섬길지, 지금 양자택일을 하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 좋은 것들, 당장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었다.
오늘 우리 신앙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아테네와 같은 최첨단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가나안처럼 번영과 풍요로운 삶의 편리한 면들이 추구되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굳게 붙잡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들을 과감하게 떠났다. 또 유다의 살아남은 자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지만, 고생 끝에 일군 삶의 터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받고 황폐한 고국에 돌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삶을 살기를 원하셨을 때, 순종했던 이들이 있었다.
여러분 기억하라. 오늘 주님은 세속에 얽매여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모습에서 과감히 떠나,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오늘의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다고, 세상과 인간적인 방법과 타협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맡기기를 원하신다. 그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모두 새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