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18. / 부활절 다섯째주)
-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누구신가?’
이 물음 앞에 잠시 서보자.
자비하신 분인가?
무자비하신 분인가?
‘자비하시다’고 고백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
사랑인가?
고통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주시지만, ‘나’에게는 고통을 주시는가?
반대로 ‘저’ 사람에게는 고통을 주시지만, ‘나’에게는 사랑을 주시는가?
며칠전, 기독교방송(CBS) 라디오 ‘교회 가는 길’ 프로그램에서 이런 기도문이 낭독됐다.
“꽃 같은 아이들의 서러운 주검이 실려나오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가슴은 무너졌습니다. 주님, 차마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험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들을 징계해 주십시오. 이웃의 고통에 둔감한 굳은 마음을 도려내주시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웃는 참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57)의 기도문이다.
하나님이 자비하시기만 하면 안 되는 이유가 느껴졌다.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보혈로, 우리가 맞아야할 징계와 채찍을 피하게 됐기에 감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파’에서도 이야기하는 바였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여기에 새희망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참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신 것과 사랑하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이다.”(히브리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무엇일까? 신약
“고난 뒤에는, 특별히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 부활과 승리의 기쁨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이 있는가?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걱정이 된다. 염려스럽다.
그러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승리하시길 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고난을 능히 이겨내고 더 큰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가장 큰 복은 무엇인가?
무엇이 복된 것이며, 은총일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세상의 명예와 물질과 번영이 아니다.
‘변화’이다.
저사람의 상황은 변했는데, 그 속사람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십시오.”
올챙이가 개구리로 변화된 이야기 : 물밖을 뛰어나올 수 없을 것 같던데, 이젠, 그 뛰어나올 것 같다.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은혜를 충만히 받아누리길 바란다.
변화의 삶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하는 질문이다.
-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1-2절을 보자.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구습을 벗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는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엡4:13)까지 이르기 위함이다.
그 보다 더 구체적인 자화상은 무엇인가?
9절.
그래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당연하다. 젖과 같은 순전하고 신령한 은혜가 우리의 영적인 양식이요, 힘과 능력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과 존재가 성숙해지기를 간구하기 바란다. 니고데모와 주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변화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를 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은총, 그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이 시간 그 은혜를 누리라. 그러면 그 힘이 생긴다.
그런데 여러분, 아는가? 이 당연한 영적인 말씀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 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3:2)
‘지금도 못하리라.’
히브리서 기자 역시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할 자가 되었도다.”(히5:12)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했는데, ‘젖’밖에 먹지 못한다고 말한다. 왜인가?
마땅히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믿는 사람들의 본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자라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도’ 못한다는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할 처지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 1)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차례 이야기 했다.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분파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신앙 공동체에는 2) 시험도 있다.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저런 신앙의 위기를 만난다. 하지만 이겨내고 승리해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온갖 시험을 당하고 이기고 승리함을 통해서, 속사람으로 강건해지면, 자기 의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며,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다.
그런데 아직 젖먹이 신앙에 머물러 있다.
3) 또 세상살이라는 일상을 만나,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지 못했다. 주님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과 염려와 갈등을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처음에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으로 발전하고 성장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고 성장해 가기를 원한다.
1) 하늘 양식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영적인 말씀을 먹고 자라고 성장한다. 사람이 먹어야 산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젖이든, 아직 이유식과 같이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것이든, 단단한 음식이든, 먹어야 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앞으로 영양가 풍부한 단단한 음식이라도 소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라고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3-14)
2) 헌신적인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말씀했다. (로마서의 12장 1-2절말씀 참고)
예배만 하라는 것일까? 예배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헌신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훈련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제일 중요할지도 모른다. ‘산돌을 품고 살라.’
산돌이란 무엇일까? ‘산 돌’이란 간단히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편을 인용하고 있는 7절을 보자.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하나님의 경륜이 느껴지는가?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버린 돌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잘 다듬어서, 그 건축물을 대표하는 머릿돌로 삼으시는 분이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사람들에게서 버림 바 되어 십자가에 못을 박고 죽게 했지만, 하나님은 주님을 살리셔서 구원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건축자의 버린 돌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세계 선교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어땠을까? 그도 어떤 의미에서는 일찌감치 버려졌지만, 은혜는 유대 당국과 공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
기억하라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세상에서는 이런 저런 손해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지만, 머릿돌이 되게 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다.
여러분 이 신앙의 여정에서 분명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기뻐하시는 변화, 또 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가장 큰 선물이요, 은혜인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