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11. / 부활절 넷째주, 어버이주일)

 

  • 희망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오늘은 부활절 넷째주일이자, 또한 어버이주일이다.

주일날 가급적 좋은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 땅의 부모들이 큰 슬픔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5월은 실록의 계절이고, 어느 때보다 푸르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아닌 것 같다.

바람이 거세다. 그래서 오히려 시퍼렇다.

 

‘하나님, 하나님도 슬프십니까?’ 물는다.

 

지난주에 제부도에 갔을 때, 바다를 보며, 저 바다가 ‘세월호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삼킨 맹골수도와 연결된 바다’라고 생각하니, 평소 바다를 그리워했던 마음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 최고 책임자라는 분은 연일 섬뜩한 말을 하고 있다. ‘저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고레스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드러났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참담한 심정뿐이다.

 

이번 사건을 두고,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가 지적된다. ‘이토록 이 사회가 소돔과 고모라 같았단 말인가?!’ 심각하다. 물론 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언론이 참 중요하다. 그런데 예언자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 과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회의적이다.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가 전부가 아니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사회 곳곳이 부패하고 불의해도 상관없다고 살아왔다. 언론이 그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바벨론에 의해 남왕국이 멸망하기 직전, 하나냐는 그 시대의 언론 역할을 했다. 그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던 멍에를 꺾어버렸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멍에는 하늘을 속일 수 없다는 마음으로,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머금고 말해야 하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꺾어버렸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고 하나냐에게 하는 말씀을 들어보라.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고 하지만, 그래서는 더 큰 재앙과 재난을 피할 수 없다는 천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저는 이 시대에도 예레미야가 들었던, 똑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언론을 통제하여 멍에를 꺾고 왜곡을 일삼을 때, 하나님은 더 강한 쇠멍에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준엄한 섭리 말이다.

 

기도와 간구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고통이 너무나 큽니다.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고통당하고 절규하는 심령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주님께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뜻과 섭리를 다 헤아릴 수 없으나, 노여워 마시고, 고통당한 이의 심령을 살펴주소서. 하나님! 하나님!”

 

여러분, 불경하게 보지 말라. 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께서 승리하실 것이다.

 

 

  1. 도시와 유령

하나님은 이번 주에도 몇차례씩이나 밤에 잠을 깨우셨다. 왜일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펴서 읽어야 했다.

 

메밀꽃 필무렵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효석의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이 생각났다. 예언자적인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시작된다.

 

“어슴푸레한 저녁, 다 쓰러져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라웁단 말이다.”

 

내용은 미장이 일을 하는 어느 빈민이 동묘에서 노숙을 한다. 그러다 유령을 보고 실신까지 했다. 알고 보니 유령이 아니었다. 자기 같은 빈민계층으로 묘지에서 노숙을 하는 여자와 그의 아들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한 쪽을 잃었다. 발목은 끊어져 없고 말라빠진 장딴지만 달린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밤중에 다리가 너무 아파 약을 찾으려고 성냥불 한통을 다 그어버렸는데, 그 불과 여인네의 어렴풋한 형체를 보고 귀신으로 착각한 거였다.

그런데 대체 다리는 왜 그 모양이 되었느냐 묻자 불량배와 기생들이 가득 탄 자동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했던 거였다. 남편은 죽었고 집안은 원체 가난하여 병원비를 낼 돈도 없고 하여 이런 꼴이 되고 만 거라는 것이다.

 

도시화되어가는 문명에 치어 유령취급을 받는 현실을 그렸다. 그 현실이 우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독자여, 이만하면 유령의 정체를 똑똑히 알았겠지. 나는 모두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애매한 친구들을 유령으로 생각했다. 독자여, 살기는 살았어도 기실 죽어 있는 셈이니, 이 서울 안에 그런 유령이 얼마나 많이 늘어가는가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근본적으로 생기지 못하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나님,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이사야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1:15)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여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를 위하여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구나.’(1:23)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1:24)

 

슬프다! 이것이 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도 슬프십니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듣기를 원하시는 것이 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을 터이니,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희망의 품고 그 씨앗을 심기를 바라신다. 소망을 가지기를 바라신다.

 

 

  1. 끔찍한 세상

오늘 말씀을 보자. 18-19 ‘그러므로’ 이것은 앞의 내용과 연관된 말씀이다. 그 내용은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자를 고치신 내용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6장에도,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안식일 논쟁과 관련해서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저는 그동안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또 한가지 다른 점이 있는데, 단순한 병고침의 문제와는 다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귀신들려 앓으며’,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즉 영적인 사건의 입장에서 안식일에 관한 것이 소개된다. 안식일에, 주님의 사역은 악령에서 벗어나는 자유였고, 놓임이었다.

 

 

아는가? 예수 당시 그 세상에도 정말 끔찍한 일이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반로마인사(로마의 악마적인 통치방식에 반대하여 무장투쟁을 하던 사람들) 약 2천명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리처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 57) 다니엘은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올라오는 환상을 보았다. 그 중 네 번째 짐승은 가장 무섭고 잔인하게 여겨졌다. 그 이는 쇠요, 발톱은 놋으로 되어있으며, 그 통치는 가혹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환상을 연상시켰다.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는 슬로건은 있었지만, 그 체제에 적응하거나 그 주류에 들지 못한 이에게는 가혹하기 이를데 없는 세상이었다. 신질서 화폐경제 체제로 날품팔이나 농노로 전락하는 이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실직으로 가정이 붕괴되고 공동체가 피괴됐다. 이 원인을 로마에게 두고 로마를 반대하는 이에 대한 응징은 철두철미했다.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다. 제국질서 확립의 일환으로 2천 명이 넘는 이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참담했다. 유대당국은 뭐하고 있었을까?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기영달만을 위한 이기심과 보신주의만이 있었을 뿐이다.

 

유대인에게 정말 천인공노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늘 읽은 말씀의 앞부분을 살펴보라. 빌라도가 갈릴리에서 온 이들을 성전에서 살해(피가 성전의 제물과 섞임, 눅13:1)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의 신성한 성전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얼마나 민심이 흉흉했는지 짐작해야 한다. 성전에 기대고 있는 사람들은(우리식으로 말하면 기관 책임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종교상인들과의 유착관계! 굉장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또 실로암 망대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대형사고였다. 그로인해 사상자 수십명 발생했다. 그 중 사망자만 18명이나 되었다.

아는가? 이 모든 일이 개발과 번영이라는, Pax Romana라는 미명하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오늘 우리 시대상과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지 않아도 안다. 엄연히 사회악이 존재한다. 이것을 타파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이 의외다. 주님은 냉정하시다. 그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고, 오히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분노하실 줄도 모르시는가? 분개하지 않으시는가? 왜 위로하지 않으시는가?!

이효석이 “모두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애매한 친구들을 유령으로 보았다”고 말하는 대목을 기억해보라.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애매한 친구들’, 고통과 불행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래서라도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타파하지 않으면 또 똑같은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것 아닌가? 이미 우리가 이 사회를 경험하면서 배운 교훈 아닌가? 그런데 왜 주님은 그 말을 듣고도 분노나 혈기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냉정히 말씀하실까?

 

주님은 오히려 너희가 회개하라고 하신다. ‘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가?’ 정작 회개해야할 대상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

 

가야바의 음흉함을 들여다보라. 이 혼돈과 불안한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있었다. 그 권력기반이 위태로웠다. 그 와중에 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한 사람이 대신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다. 책임을 전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신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무작정 미화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죽음을 이용해서 불순한 이득을 누리려는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이 시대에도 가야바의 음험함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것 같다. 때로는 죽음을 방조하고, 그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주님은 어찌 분노를 표현하지 않으시는가?

 

그런데 여러분, 주님은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하고 계신 일이 있었다.

1) 귀신들려 앓는 이를 고쳐주셨다. 그는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 주님은 더러운 영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셨다. 이것이 누가가 바라본 주님의 능력이다.

2) 그 행위를 안식일에 했다고 분을 내는 회당장을 꾸짖고 계시다. 회당장은 안식일에는 ‘가만히 있으라.’말한다. 안식일에 자유와 생명의 회복을 가져다 주는 일이 무엇이 잘못인가? 안식일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생명을 구원하는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라.’ 그게 정답인가?

 

여러분 아시는가? 단순한 의분은 잠시 타오르다가 더 큰 절망을 준다는 것을 말이다. 때론 혈기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이사야에게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상황과 또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사6:8) 물으신다.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 좀 끓는 것 같더니, 식어버리고, 의분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또다시 잠잠해져버린 경험을 통해, 해도 안된다, 해봐야 소용이 없다,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휩싸인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상태였다. 주님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여러분 그런데, 아는가? 예수님께서 분노와 혈기를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그 사역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하시는 모습이 더 큰 힘과 능력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묵묵히 생명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시고 생명과 평화의 일을 도모하실 때, 의롭지 못한 이들은 오히려 더욱 불안해했다. 어떤 보수 논객은 예수님의 저 사역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하는 것이라’고 독화살을 쏴댔다. 그러나 아는가? 그 말이 예수님께 박히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분노와 혈기를 부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또 이기적인 계산이나 자기영달을 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공격적인 말에 상처를 받고, 가슴에 박히는 것이다.

기억하라. 사람의 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히려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17절. 한 번도 회당장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순응했었는데, 주님은 사람들을 일깨우셨다. 진짜 잘못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며,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이다.

왜 하나님은 밤중에 자꾸만 깨우셨을까?

회개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묵묵히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돌아서야 한다.

여러분 ‘그러므로’라고 말하는 것 뒤에,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라.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저는 이 주신 말씀이 가슴을 설레게 했고 뛰게 했다.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여러분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심겨져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겨자씨와 같이 작지만 생명력 있는 믿음이 심겨져야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라. 시인하라.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거룩한 씨가 심겨지기를 바란다.

이상하지 않은가? 채소밭에는 채소가 심겨져야 하는데, 왜 채소밭인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삶의 공간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공간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틈이 없는 것이다.

여전히 자기를 위한 밭을 경작하면서, 그 땅에서 하나님나라가 열매 맺기를 바랄 수는 없다. 자기 채소밭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겨자씨가 심겨져야 한다. 회개의 씨앗, 희망의 씨앗, 눈물의 씨앗. 장차 자라서, 새들이 깃들 복음의 씨앗.

 

특별히 사랑의 씨앗을 심으라.

또한 헌신과 희생과 섬김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여러분 대접을 받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못난 모습인가를, 우리는 팽목항에 다녀간 고위간부들의 모습을 봤다. 그것은 쉽지만,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원봉사를 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손길을 통해,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보았다.

나눔의 씨앗을 심고, 믿음의 씨앗을 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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