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4. / 부활절 셋째주일, 교회 창립기념, 어린이 주일)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4주년 되는 주일이자, 어린이 주일이다.
우리교회는 늘 어린이 주일이 창립주일이 된다. 둘의 개연성을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어린이의 순수함처럼 복음의 순수함과 열정을 가진 교회, 주님의 꿈과 비전을 가진 교회,
잘 자라나는 새싹과 같은 교회가 되길 바란다.
무엇보다 창립주일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4주년을 맞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얼마 안됐지만 요 몇 년 동안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꾸준히 성장시켜주셨고, 건강한 교회의 체계와 골격을 갖추고 행복한 신앙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끄셨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라. 우리가 이렇게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신비이다. 다들 여기까지 모이게 된 과정을 생각해보라. 어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는가? 아무 목적과 계획 없이, 그냥 된 일이겠는가? 우연인 것 같아도,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복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좀 거창할지 모르지만, 특별히 생명과 평화의 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소망한다. 시간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진실한 사랑이다. 참생명은 영원한 사랑에 잇대어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번의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나 짧고 아쉽다는 것을 배웠다.
두 번째는 평화의 복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가정에서는 화목하라. 일상의 자리에서 사람들과 관계할 때는 화평하라. 자기 심령 속에는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염려, 근심, 걱정에 싸여있던 마음에는 평안이 있기를 축원한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단지 숫자만 늘어가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 기뻐하시는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에 대해서, 또 우리 교회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실까? 오늘 주신 말씀을 가지고 가늠해보고자 한다.
먼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는 무엇일까?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위로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이 욥이 당한 고난의 소식에 불원천리하고 달려와 일곱 주야를 말없이 함께 해주었다. 말 없이 그 고통에 함께 해줄 때, 참 좋은 친구들이었다. 위로가 되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게 언제 깨졌는가? 그 고난에 대해 인간적인 생각을 말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때 더 이상 함께 울어줄 수 없었다.
또 세상은 다 부패하고 썩어도 교회만은 깨끗하기를 바란다. 모두가 돈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때, 교회는 물들지 않고 신성함을 지켜주기를 바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했다.
그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갈등과 다툼, 분쟁 속에 화해자의 역할을 하고 평화를 이끄는 역할을 기대한다. 용서와 희생, 섬김의 정신이면 못할 것도 없다.
또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 속에, 생명 존중과 그 역할들을 교회가 해주길 바란다. 세상은 효율성 따지고, 도덕적으로 정죄하고, 배타적으로 존귀한 생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낼 때가 많다. 그런데 교회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그 고귀한 생명사랑의 정신을 교회가 실천해주기를 세상은 바라고 있다.
뭐,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마도 이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요즘 믿음은 있지만 교회를 안나가는 성도들이 많다. ‘안나가’를 거꾸로 하면 가나안인데, 오늘날 가나안 성도들이 많다. 교회는 다니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를 일컫는다. 아마도 교회에서 받은 상처나 실망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안다닌다고 신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나 TV로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갈급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닐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모범적인 교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한다. 세상에서 교회를 향해 기대하는 모습들이 다 들어 있다.
- 거기에는 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있었다.(43절)
- 나눔과 섬김도 있었다.(44-45)
- 46절을 보면 위로도 있었고(‘마음을 같이하여’ 공감만한 위로가 없다)
- 친교도 있었다.
- 47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이들(46)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찬송을 올리는 신앙의 모범도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분명 유대인들의 모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율법을 중시하고, 정결과 속된 것의 경계를 구분지어 어떤 담벼락, 분리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모습과는 달랐다. 그래서 일어난 일들이 무엇인가? 47절 하반절을 보면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교회가 대안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기대와 현실이라는 갭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대형교회들이 생겨났다. 그러면 힘이 생겨나니까, 세상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 대형교회에서 제공하는 예배와 서비스가 최첨단이고, 편하고 좋다고 하는데, 그래서 은혜충만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세상에 대해서 점점 약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의 진단과 처방전은 이것이다. ‘성화’, 그것은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다.
교회란? 교회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다. 주님은 그 몸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각 지체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현, 현존하심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를 통해 예수의 모습을 기대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통해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성화라고 한다. 교회가 부흥, 성장, 영혼 구원의 목표점을 세우는 것까지 좋다. 그런데 한 가지 잃어버린 목표점이 있다. 무엇인가? 성화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4주년을 맞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기 위해, 메마른 세상을 시원케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다시금 이 성화라는 목표점을 되찾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어떻게 해야할까?
본문에 집중하며 그 요소와 비결을 찾다가, 금방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무엇일까? 찾아보시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서 칭송을 받으니’
보이시는가? 발견하셨는가? 이 모습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기대하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성도의 모습이다.
이 본문을 교회에 일어난 모범적인 모습으로서 우리에게 비춰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빛 아래 꼭 살펴봐야 할 것이, 그 교회 안에 있었던 성도들의 모습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했다. 그리고 고전12:14이하를 보면,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이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각 지체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져야 하는가? 교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나와는 다른 사람이 있다.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아는가? 단순히 역할과 기능만이 아니라 이러한 모습을 실천하며 따랐던, 인정받고 쓰임받는 일꾼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일꾼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말없이 순종하며 충성하던 이들이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고린도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또 그와 함께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후8:18-19)
디도는 그렇다고 쳐도 그 이름 없는 사람, ‘한 형제라고 소개 되어있는’ 사람, 즉 그는 칭찬받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대로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같이 명하노라.”(고전7:17) 이렇게 명하고 있다. 그는 명령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나,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사람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은 신실한 사람들을 보내어 교회 안에 생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 사이의 오해를 푸는 평화의 사자 역할을 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에 속한 모든 분들이 이처럼 성숙하고 신실한 복음의 사자로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말씀에서도 47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더니.”라고 증거한다. 그는 누구인가?
다시 살펴보자. ① 44절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② ‘서로 통용하고’ 그는 교회 일에 뒷짐지고 있거나 불참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교회일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사람이었다. ③ 45절을 보면, 그는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④ 그는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을 같이하여”남의 일에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주고, 웃는 자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었다. 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그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예배하는 사람이었다. 즉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었다. ⑥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그는 자기를 개방할 줄 알고,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 때문에 어느 누구하나 예외없이 존중받고 사랑받았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예수의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 믿고 구원받기로 결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한 사람의 모습을 표현했지만, 모범이 되는 초대교회 성도의 모습이 모두 이와 같았다.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고, 그 달려갈 길을 주저하지 않고, 경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교회의 7대 핵심가치는 바로 여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
여러분 처음부터 이런 수준과 모습을 갖추었던 것일까? 43절에 나타나는 ‘사도들’만 보자면 적어도 그들만큼은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베드로가 상한 갈대였다. 자신의 용맹과 담대함만을 믿었다가 주님을 배반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실수투성이고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힘입어 그는 사도의 사명을 감당한다.
교회를 통해서 변화되고, 성숙해지고, 성화되어갔다. 왜냐하면 거기엔 성령의 역사도 있었지만, 주님의 시험과 훈련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겨내고 단련되면서, 성화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편한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TV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선호할 수도 있다. 쉽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한 성화의 목표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17:3) 말씀했다. 우리의 신앙은 연단을 통해서 성숙하고 성화되어간다. 교회라고 하는 용광로와 풀무불에서 연단이 있고, 훈련이 있어야 정금과 같은 신앙을 갖게 된다.
때로는 실망도 하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보기 싫은 사람도 있다. 자기 손해를 보고 귀찮은 일도 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으로 이겨내며, 성화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비유에서, 말씀이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돌짝밭과 같은 마음도 있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칠고 메말랐던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으로 바뀐다. 그리고 복음의 열매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줄 믿으라.
사랑의 연단과 훈련을 통해 우리 삶에 주어지는 약속은, 세상의 가치나 물질로 살 수 없는 참 사랑과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러분 기억하라. 우리의 성화된 모습을 통해, 각 지체의 연결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간다.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감리교의 신앙의 특징은 개인적 성화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 넘어 사회적 성화에도 이르는 것이다. 신실한 신앙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충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더 좋은 교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이 ‘성화’의 과제를 달성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43절을 보면 기사와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부흥한 것이 아니라 성화된 모습을 통해서 이런 영적인 능력이 나타났고, 그것은 세상을 시원케, 복되게 만드는 능력이 되었다.
기사와 표적은 어떤 마술적인 신비와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통해 오병이어의 나눔의 기적이 일어나고, 고난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었기에 치유와 회복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