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27. / 부활절 둘째주일 )
- 슬퍼하라.
세월호 침몰사고로 10여일이 지났지만 온 국민은 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에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들려오는 예수의 절규를 들어야 했다. 여전히 분노와 슬픔이 가득하다.
어제는 또다시 안타까운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서 들었다. 송파 세 모녀 비관자살 사건에 이어, 강동구에서 또 생활고에 비관한 시각장애인이 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런가 하면, 어제, 게임중독에 빠진 부모가 자신의 15개월 된 쌍둥이 아이들을 몇 개월 동안 방치해서 기아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조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우리는 얼마저 게임에 중독된 철없는 22살 아버지가 게임하러 나가려는데 28개월짜리 아기가 운다고 하여 코와 입을 막아 숨지게 한 사건 소식에 접했다. 그 흉악한 애비는 아기를 죽인 후 태연하게 게임하러 나갔다.
여러분, 이것이 지금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습이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욕심에 오염되고, 물질에 중독되어, 타인과 생명보다는 ‘자기 좋을 대로 행동’ 악마적인 세상 풍경이다. 정신 건강에 안 좋으니까 외면하고 잊어야 할까?
절망? 절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고통이다.
어제는 주님께서 하루 종일 마음이 괴로웠다. “너 무엇하느냐?” 물으셨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이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이어폰을 들으면서, 마침 누군가 심방할 일이 있어 탄천에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 애써 귀를 막으려 했다.
그런데도 주님은 계속 밤까지 “너 무엇 하느냐?” 물으셨다.
나름대로 할 일도 있고, 바쁘고, 교회일도 해야 하고, 성도들을 위해 중보도 해야 하고,
놀고 있지는 않습니다. 변명도 해봤다.
동네에, 정말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세 살배기 아기가 4층에서 떨어져서 죽었다. 부모는 아이가 떨어진 지도 모르고, 부모님 생일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119에 실려간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달려갔다고 한다.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다. ‘참 안됐다.’고 생각했다.
주님은 물으신다. “너 무엇하고 있느냐?”
“주님 오늘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내일 주일 준비하기도 벅찹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멀리도 아니고 가까이 저와 함께 하는 사람들과 희망을 말하고 위로하는 일뿐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부활 주일을 지나고 오늘은 부활절 둘째주를 맞았지만, 우리는 슬프고 아프고 찢어진다. 그런데 아시는가? 지금 주님도 슬퍼하고 아파하고 눈물짓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세상의 악 때문에, 그리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 때문에 말이다.
“너 무엇하고 있느냐?” 또 들려온다.
어제 이집사님이 빨리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장례식장이 어딘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아내와 이집사님도 같이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앳되보이는 부모들인데… 가슴이 먹먹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분인데, 이렇게 찾아와 줘서 감사하다고…
오래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까이에서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 행하기를 바라셨다. 그것은 우리의 태도, 자세, 습관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 이시간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그 마음을 우리가 느끼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시는 그 심정을 우리가 깨닫길 바란다.
오늘 말씀 22절에,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 새로움과 성실하심을 노래한다.
영광과 축복 속에, 감사와 기쁨의 확신 속에 이 노래를 부른 것 같다.
그런데 아는가? 그게 아니라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된 괴로움과 비탄 가운데 부른 슬픔의 노래라는 것을 말이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어쩌면 더 불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가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v.22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남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다. 괴롭다. 삶의 동력을 잃어버렸다.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함락되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다.
그리고 성전이 불살라지고 파괴됐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유다 사람들에게 믿음 한 가지가 있었는데, 이 예루살렘은, 마치 에어포켓처럼, 이스라엘의 생존의 보루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 성전이 있었다.
히스기야 왕 때도, 앗수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함락의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앗수르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자중지란으로 결국 도망가고 말았다.
거기는 마지막 생존의 땅이었다.
이번에는 어떨까?
시드기야왕 제 9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됐다. 그리고 제 11년이 됐다. 그러니까 두해가 지난 그때까지도 버티고 있었다.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러자 바벨론은 특수공법을 이용한 공격방법을 생각해낸다. 성이 견고하니까, 토성을 높이 쌓아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삼국지에서 원소의 70만 대군과 조조의 7만 강군이맞붙었을 때, 원소가 사용했던 방법과 똑같다. 게다가 성 중에는 기근이 심해, 양식이 떨어졌다. 그 결과 믿었던 예루살렘은 파괴됐다. 그것은 희망이었는데, 한 가닥 기대였는데, 그것마저 다 빼앗기고 말았다.
바벨론 군사들이 불을 질러, 가옥들을 비롯해서 성전과 왕궁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예루살렘을 짓밟았다. 그 날은 이스라엘의 가장 슬픈 날이었다.
곳곳에서 바벨론군의 칼과 창에 살상이 벌어지고, 가족이 참담하게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시드기야 왕은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앞에 섰다. 그 앞에서 비참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아들들을 잡아다가,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였다. 그리고 더 잔인한 것은 그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놋사슬로 결박해서 베발론의 포로로 끌고가, 거기서 죽을 때까지 지내게 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더 이상 다른 장면을 볼 수 없다. 그의 마지막 눈앞에 기억된 장면은 자식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는 평생 그 마지막 장면만 보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이의 고통이 이와 같은 것이다. 마지막 그 불행한 장면을 지워내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을 지옥과 같이 살아야 한다.
시드기야 뿐이겠는가? 유다 전체가 이와 같았다. 남은 자의 무거운 고통이 있다.
성중에서 사로 집힌 핵심인사들은, 한 60 여명 되는데, 포승줄에 묶여, 바벨론 왕 앞에 잡혀갔다. 립나에 진채가 있었다. 그는 어떤 지시를 내리고 끌고 가게 했다.
그들은 짧은 거리이지만, 하맛으로 끌려갔다. 영혼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거기서 모조리 죽이고 말았다.
전쟁에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그 땅에 남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어떤 고통을 겪었을까?
이 장면을 보면서 예레미야는 탄식한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렘8:18)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렘8:22) 유향이 있다는 것은 치료제가 있다는 것이다. 의사가 있다는 것은 치료자와 그 기술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로 치유되지 않은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그렇고, 영혼의 상처가 그렇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들의 깨달음은, 이 모든 것이 인재였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부패한 결과였다는 것이었다.
- “이것을 내가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이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빨리 잊어야 할까? 오래오래 기억해야 할까?
어떤 분들하고 식사를 하는데, 요즘 연일 tv에서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고, 덩달아 우울해지고, 기분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빨리 잊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주님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구나!’ 조금 놀랐다.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일은 빨리 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물론 상처를 받은 사람은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것에 사로잡혀 인생이 더 고통스럽고 온전치 못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역을 지나실 때, 군대 귀신들린 자가 주님 앞에 나왔다. 그는 삶의 자리에서 온전히 살 수 없어, 마을 밖 무덤 근처에 버려진 채 살았다. 그에게 상처를 주었던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기억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떨쳐버리지도 못했다. 그 사는 모습은 짐승 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러분, 그러면 다른 가족이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21절에 예레미야는 다르게 말한다. “이것을 내가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말한다.
19절-20절,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는 지금, 주님께서도 이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주실 것을 말하지만 또한 자기 역시 고통과 낙심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고 말한다.
잊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 아시는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는 자에게는 희망도 주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슬퍼할 줄 알아야 희망도 품을 수 있고, 침묵할 줄 알아야 용기도 생기며, 행동하고 실천할 줄 알아야 그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소망 없는 자는 잊는 게 낫다. 계속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치 못할 삶으로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잊는 게 낫다. 그러나 소망 있는 자는 기억하라. 왜냐하면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한다. 잊으면 또다시 그 불행이 찾아온다.
v.22 ‘진멸되지 아니함’ 남은자의 고통과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주님 안에서 남겨진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니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아파하고 괴로워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v.20 ‘낙심이 되오나’ 현실은 낙심이지만, v.21 ‘소망이 되었사옴은’ 남은 자의 사명과 소망이 있다.
동네에서 어른들이 하지 않으니까, 아니 어른들이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공원에다가, 자발적으로 노란 리본을 붙여 놓은 것을 봤다. 세월호에 아직 남아있는 실종자들이 단 한명이라도 살아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말이다. 저 사고와 아픔의 현장만이 아니라 이 땅 곳곳에서 기다림과 희망의 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아이들은 이미 순수한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희망으로 나아가고 있다.
저는 그 모습을 통해, 행동하는 모습에 생명과 평화의 희망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작은 위로가 됐다. 하나님은 행동하는 이들의 마음씨와 노력과 정성을 통해, 주님도 위로를 받으신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을 품기를 바라신다.
찬양가사처럼,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기를 원한다. 아버지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한다. 아버지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우리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하다.
우리가 이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주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을 향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이야 일어나라.’ 명하셨다. 그 명령에,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다. 아이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에스겔이 골짜기에서 주의 말씀을 대언하여, ‘너희가 살리라.’ 했더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봤다. 생기가 불어와 이 뼈 저 뼈 맞으며, 힘줄과 살이 붙고, 살아나는 환상이었다. 아이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잠자던 이들이 일어나는 부활의 소망을 우리가 갖기를 원하신다. ‘아이야 일어나라’ 주의 말씀을 대언함을 통해, 이 땅에 어린 학생들의 생명의 꽃들이 피어오를 것이다. 날마다 새로운 주의 인자와 긍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빛이 말이다. 주님은 그것이 성실히 피어오르도록 역사하신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와 언더우드 목사는 같은 배로 한국에 왔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목사였고, 언더우드는 장로교 목사였다. 그렇게 한국교회가 시작됐고, 오늘의 한국교회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펜젤러 목사님이 한국 교회의 밀알이 된 사연을 아는가?
1902년 목포에서 성서번역자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가는 길에,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여객선이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일본 상선(구마가와마루호)과 충돌했다. 배가 침몰할 때, 아펜젤러 눈에 들어온 한 소녀가 있었다. 정신여고 학생이었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그를 구하기 위해 다시 선실로 다시 들어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목숨 버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린, 그 고귀한 희생정신은 이토록 오늘날 한국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양온유는 명성감리교회 관리집사님의 딸이었다. 이번 세월호 사고당시 갑판에 나와서 구조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판 밑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친구들을 봤다. 그리고 외면할 수 없어, 친구들을 구하러 들어갔다가 결국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교인들이, ‘그 애는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라고 말할 정도다. 이것으로 평소 그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똑똑하고 착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아이였다. 기가 막힌 것은 부활절에 온유 이름으로 부활헌금 봉투가 올라와 있었다. 수학여행 가기 전에 아르바이트 해서 번 돈으로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다.
이 사연들은 우리에게 슬픔을 주기는커녕 희망을 준다. 인간에겐 추한 모습도 많다. 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도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의 모습을 닮아야 하겠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정신을 기리며 희망으로 일어서자. 용기를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