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 우리가 당하는 부활절 아침
부활절 아침 우리의 마음은 비통하다. 푸른 바다 보다 더 푸른 청춘들이었는데, 학생들을 삼켜버린 바다가 얄밉기만 하다. 그러나 이때야 말로 부활의 소망으로 모든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겨내야 한다. 참사를 당한 모든 이들과 그 가족, 이웃 모두에게 주님의 자비와 긍휼한 돌보심이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 우리가 다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이에 대한 설교는 성금요일 촛불예배 때 했기에, 이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로 먼저 달려가신다고 했는데, 아마도 주님은 그 곁에 여러 모습으로 이미 가 계신 줄로 확신한다.
- 부활 아침에
예루살렘도 비통에 잠겨 있었다. 예수가 죽다니!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손으로 죽였다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했던 군중들도, 무심히 지켜보던 이들도 모두 비통했다. 그 죄책감의 구름이 갑자기 골고다 언덕과 예루살렘을 뒤덮었다.
예수의 가족들, 지인들, 제자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 눈 앞에서 생명의 등불이 점차 꺼져가는 것을 봐야 했다. 아마도 지금 부모들의 심정과도 같을 것 같다. 아무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들 먼저 도망쳤다. 그 뒤에 ‘죄’이라고 하는 유속의 힘과 출렁이는 군중들의 파도에, 열쇠를 쥐고 있던 빌라도 마저도 예수를 풀어주지 못했다. ‘무지’라고 하는 부유물들이 백성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안식일 후 첫날, 이제 시신 수습과 뒤처리만 남았다.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보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해서 여인들은 무덤을 찾았다. 그러나 무덤은 비어 있었다.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천사를 만났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는 살아나셨다, 갈릴리로 먼저 달려가신다고 전해준다.
무슨 영문일까? 마리아는 영문을 모른 채 또다시 울음이 터졌다.
누구일까?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나타났다.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혹시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다 두었는지 안다면,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마리아야”
그 때 그의 귀가 밝아졌다. 주님이셨다. 신비였다.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겪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그 신비한 경험이 나타났다. 주님과 함께 길을 걷는데, 주님임을 몰랐다. 그러나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며 ‘집밥’을 정성스레 대접할 때, 그 식탁을 축사하시는 주님의 기도에, 눈이 뜨였다. 그제서야 그가 성경을 풀어주실 때, 가슴이 뜨거웠고 위로가 되었던 묘~한 이유를 알았다.
제자들은 어느 집에 숨어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다. 발각되지 않도록 숨죽여있었다. 불안했다. 두려웠다. 그 가운데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지니신 분이 나타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러면서 숨을 불어 넣어주셨다. 성령이 임했다. 그러자 이유모를 위로와 희망이 샘솟고 묘한 기쁨과 확신이 충만해졌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직접 손의 못자국과 창 자국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주님은 다시 찾아오셨다. 의심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상흔을 보여주시면서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확신시켜주셨다. 그분은 상처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못자국, 창자국, 고통의 흔적과 아픔을 가졌으면서도 평강을 말하시자, 위로와 용기와 담대함이 생겼다. 부활하신 주님을 깨달았다.
예수님의 무덤, 그 동굴에서 천사는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물었다. 갈릴리로 먼저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수님을 무덤에서는 찾을 수 없었지만, 삶의 자리, 산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자리,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또다시 제자들은 밤새 빈 그물만 걷어 올리고 있었다.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주님은 함께 하고 계셨다. 제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방금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뱃일을 다 정리할 무렵, “얘들아 와서 조반을 들라 말씀하신다.” 주님은 예비하심과 섬김을 보여주셨다.
갈릴리란 무엇이며, 어디일까? 갈릴리는 삶의 현장이었고, 애수(哀愁)의 장이었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배반한 죄책감, 버려두고 도망간 미안함, 두려움, 슬픔, 비통함이 있었지만, 부활을 통해 주님은 소망과 위로와 평강과 더 나은 사명과 미래를 위한 비전을 주신다.
저는 확신한다. 지금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 진도의 평목항과 안산의 단원고등학교, 여러 애통해하는 이들이 모인 현장에, 도움과 섬김의 손길로, 우리보다 먼저 달려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비통함에 빠진 제자들, 사랑하는 이들, 예루살렘이 위로를 얻고 소망을 얻었다.
우리 이 시간 잠시, 배안에 아직 생존해 있을 이들과, 유족들과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자.
- 바울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
부활체험에 관해, 이상한 점에 대한 물음을 가져보자.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 몰라봤을까?
부활하신 주님은 신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아마도 제자들이 몰라봤던 이유도 그래서 일 것이다.
바울은 생전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얼굴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분명히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비의 눈을 뜰 수 있기를, 믿음의 눈을 뜰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한다. 그 체험이 오늘 우리의 상처와 아픔과 씻을 수 없는 고통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 시간 그 신비의 눈을 뜰 수 있을까?
1) 오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자.
1,2절 바울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 ‘예수의 잔당’이라고 생각했고, 진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등하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서울 만큼 아주 높다.’는 말이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해서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상태를 말하는가? 지금 심히 오버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다메섹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까지 가서 붙잡아 오겠다고 체포영장을 청구하고 있다. 오버 아닌가? 다른 나라에 있는 피의자까지 체포하겠다고 하니 말이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는 그 죽임 당함을 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의 의가 너무나 강했다. 그래서, 그 의에 어긋나면 죽어도 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에 큰 박해가 일어났고, 사도들을 제외한 제자들이 다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붙잡혀가 고문과 고초를 당했다. 교회의 불씨를 완전히 끄기 위해서 각 집집마다 숨어있는 신자들을 색출했다. 그것을 누가 주도했는가? 바울이었다.
그는 강해보이고 완벽해 보인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였던 가말리엘의 제자였다. 겉으로 보기에 흠하나 없어 보인다.
이것은 피해를 당하고 박해를 당하는 이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절망인 줄 아는가? 약점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텐데…, 약점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부탁이며 자비를 구하겠는가? 여러분 나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상황이 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 너그럽기도 하고 자비심을 갖기도 하는 것이다. 남 일이 아니라 자기일 같이 여기는 사람이 동정심도 갖고 공감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저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귓구멍이 막힌 것 같다.
그 착각이 심한 사람은 어떤가?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게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율법적인 훈계와 바른말만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사람이 고쳐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른 소리와 자기 의로 말미암아, 더 부패되고 악화된다는 것을 모른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로 말한다. “율법이 없는 자는 율법 없이 망하며, 율법있는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 당한다.”고 말이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의, 자기의 모습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로마에, 고린도에, 갈라디아에, 각 지역에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갑작스레 환한 빛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 경험이 무엇이었을까? 왜 그런 일을 당했을까? 좀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건강상의 문제가 일어났던 것 같다.
그는 다소 사람이었고, 만성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해져서 혈압이 높이 상승하곤 했다. 그러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이 하얘지는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은 떴지만, 보이지 않았다. 혈기를 부리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혈기가 머리끝까지 올라왔다가 가라앉을 때는 먼저 머리가 약해진다.
그렇다면 건강상의 문제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가 착각 속에 빠졌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물론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약하게 하실 때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다. 우리를 붙잡으시는 경험은, 어쩌면 우리가 약해지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다. 아빠의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 자녀를 강제적으로, up된 상태를 가라앉힐 때가 있다.
주님을 만나기전의 바울은 인간적으로 누군가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같은 편이 되지 않고서는 말이다.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피하고 싶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주님을 나타내셨다. 강한 사람,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약함을 보셨다. 약점을 잡았다는 말과는 다르다. 주님은 그 약함을 아시고, 그 약한 데로 찾아오셨다.
바울은, 남들은 어떻게 볼지 몰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약함을, 여러 차례 기도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시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내가 약할 때 강함이니라.” 주님께서 자기의 약함을 아시고, 그 약함이 드러나게 하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영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건강상의 문제를 통해 주님이 그를 터치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은 그를 붙잡으시기 위해 그의 약함을, 문제를 드러내셨다. 그의 약함을 통해 주님은 그를 만지시고 계시다. 또한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주님께서 터치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만지심을 경험해야 하지 않을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의 비결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 신비에 눈뜨는 비결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니라.”
사실 그는 완벽한 것 같지만 곤고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사실 결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고 괴로운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것을 감추느라, 더욱 자기의 의를 드러내야 했고, 더 율법적이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깊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었다.
“오호라, 곤고한 자라,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절대적으로 선하고,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있는가? 문제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이다.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는 대답해야만했다.
그의 독백을 생각해본다.
‘나도 곤고하고 부족한 사람인데, 왜 누군가를 박해하고 괴롭혔을까? 저 사람의 저주와 고통은 당연하며 마땅하다고 여겼는가? 이런 폭력적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런 교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도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는가? 내가 왜 예수를 박해했던가?’
우리의 독백은 아닌가?
“왜,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박해했던가? 이런 못된 사람아! 교만한 사람아!” 하고 말이다.
바울은 주님 앞에 대답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없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다른 제자들에게 것처럼, 그에게도 동일한 경험과 체험을 주셨다. 주님을 만나고 신비에 눈 뜨는 체험을 말이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문제, 상처, 아픔, 고통 많은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부활의 신비를 경험하길 원하신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자유함과 평강이 그에게 찾아들었다. 구원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그 은혜와 긍휼로 이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 심령 속에 사무치기 시작했다. 아는가? 그가 직가에서 아나니아를 만나 눈을 뜨기 전부터, 이미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눈물은 그의 눈을 씻어주고, 심령을 씻어주고 있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사모해야 할까?
첫 번째 주님의 부르심을 사모해야 한다. 주님은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다. 주님께서 마리아도 부르셨다. 그 부르심은 단순이 이름이 아니다. 주님께서 그를 아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약함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갈급함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알아야 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2-3)
목자의 음성은 무엇인가? 단순히 voice일까?
(우리 교회에 주방 티슈를 보내주신 분 이야기 – 목소리가 같아도 그 생각은 다르다)
주님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주님의 생각, 주님의 나라, 영광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를 사모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율법적인 삶이 복음적인 삶으로, 남을 정죄하던 삶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 아닌가?
수차례 말씀드린 바이지만, 변화(성화, 예수를 닮아감)는 구원받은 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세상적인 출세와 부와 명예로 생각하지 말라. 그래서 신앙이 비뚤어지고, 이단과 사이비가 그 심령을 도둑질 하려든다.
‘어느 목사님’ 이야기 : 성령사역. 그러면 교회가 한 방에 부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에게 부정적인 마음을 심어주고, 치유와 성공을 선포하면, 수많은 사람들 중, 한사람만 적중해도, 딱 들어맞아도 ‘되는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험하다는 경계심
제단에서 목회자를 함부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리와 거짓, 목자와 삯꾼을 구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린다. 양은 참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다.
자신이, 가정이, 교회가, 우리 삶의 자리가,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축원한다.
세 번째는 주님의 응답이다.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한다면, 하나님 살아계시지 않다, 주님 죽으셨다 말할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 필요한가? ① 굳건한 믿음을 가지라. ② 주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라. ③ 겸손해야 한다. 교만 때문에 하나님보다 앞서가고, 주님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약함을 알고 주님은 겸손하길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 약함을 도우시고 강함되시기 위해이다.
이 부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다시 한번 만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그 은혜로 위로자가 되길 빈다. 또 아픔과 시련을 당한 이들에게 주님께서 먼저 달려가심을 깨닫고, 우리 역시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설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