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주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3이다. 왜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보라.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 영적인 게으름과 나태함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어떤 불행한 일이 다가오듯 말이다. 성만찬을 마치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다.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한 곳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부르셨다. 그리고 속내를 말씀하셨다. 주님은 지금 고통스럽다. 곧 예수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올테고, 엄청난 일들이 닥쳐올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다. 죽음의 공포와 그 고통, 그것은 참 큰 것이다. 100%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100%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은 우리처럼 똑같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새번역)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죽음을 예견하신 주님의 부탁이었다. 간절했다. 그러나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깨어서 함께 기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부탁을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우리는 누군가의 절실한 부탁을 너무나 쉽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가볍게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칠 때가 있다. 지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고 미안하게 여긴다.

 

절박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어떤 부탁을 ‘나’에게 할 때, 그것은 나에 대한 기대가 있고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반대로 여러분이 그 입장이 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청을 들어줄 만한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은 매한가지다.

 

절박한 상황에서 간절히 부탁을 하는 사람은, 정말 그 사소한 것에서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망감을 그에게 안겨준다.

 

주님도, 이 세 제자들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 여러분, 영적인 눈을 뜨고 은혜가 층만하길 빈다. 그렇다면 이 물음을 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가볍게 듣고 있지는 않은가? 혹 어떤 부탁을 말씀하시는데, 흘려듣고 있진 않은가? 그것은 나여서, 나이기에 맡겨주신 것이다. 나를 필요하기에 그 자리에 있게 하시고,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부탁에 제자들은 어땠는가?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겸손을 뜻하거나 순종의 표시를 뜻한다고 말하려는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주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본다.

주님은 어느 그림에서처럼 하늘을 우러러보며 바른 자세로 기도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이러한 체험을 언제 하는가?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낙심하여 괴로운 마음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그 절망을 경험한 적이 있는 분들은 알 것이다. 그 때 이 모습이 된다. 찬양 가사에, “주님은 아시네, 우리의 약함을”,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아실까?! 주님께서 고통 속에 기도하셨기에 그것을 너무나 잘 아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닮길 원한다. 낙망하고 힘든 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길 바란다. 고난이라는 것을 통해 내가 감당해야할 십자가를 주신다면,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주님은 제자들이 함께 기도해주길 바랬다. 우리 이웃 가운데에서도, 주님으로 찾아오셔서 기도해주길 원하는 심령들이 있다. 그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런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자고 있었다.

그 어려운 순간에, 누군가가 날 위해 깨어서 기도해 주고, 함께 해주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안일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 있었다. 두 번째 기도하고 오셨을 때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이 대목에서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찌르지 않는가? 주님은 기도하시지만, 자꾸만 자꾸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상태는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주님은 잠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느냐?” 탄식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깨어나기를 바라셨듯이, 주님은 오늘 우리의 잠자는 심령이 깨어나길 바라신다.

깨어나라. 영적으로 안일하고 나태한 잠에서 깨어나라.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길 바라신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다. 기도로 이겨내길 원하신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험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로 준비돼있고 무장돼 있어야 이길 수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시험이 닥치고 유혹이 찾아오면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 그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1. 시험에 들지 않게…

첫 번째 3의 의미는 세 번씩이나 주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말씀이다.

두 번째 3의 의미로 옮겨가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유혹과 시험과 관련된 것이다. 주님은 41절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셨다.

 

1) 시험 1 : 배반(유혹)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다. 이 말뜻은 무엇인가? 노예를 사고팔 듯이 했다는 말일까? 물론 그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이 없다.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도록, 그 좋은 기회를 알려주었다는 말일까? 주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거나 사역을 행하실 때에도 붙잡으려면 얼마든지 붙잡을 수 있었다. 주님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온 이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을 팔았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인지, 그것을 모르고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상투적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수님을 팔았다는 것은, 예수를 배반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계속 모의를 했다. ‘내간계’ 이것에 대해서 아는가? 그것를 이용해서 그 무리의 한 사람을 매수하고 밀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가룟 유다가 걸려들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물질이었다. 은 덩어리 세 개, 은 삼십에 예수에 대해서, 거짓 증거를 하도록 유인해 냈다.

그가 과연 내가 그 배반을 하리라고 처음부터 생각했을까?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매수된 뒤에도 그는 갈등했다. 은 30은 물론 몹시 탐나는 것이지만, 주님을 쉽게 배반할 수는 없다. 배반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은 우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 유다는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기까지 했다. ‘그러면 안되는데…’ 유혹과 그 불안의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갈등과 그 염려에, 사실은, 사로잡혀 있었다. 아는가? 그런데 물질의 유혹은 사람을 쉽게 삼켜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을 본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같은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나 이겨내셨다.

유다는 예수가 붙잡히자, 자기가 저지른 엄청난 일이 무엇인지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찾아갔다. 돈을 도로 내놓으며 약속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시험에 휩싸인 가룟 유다의 모습을, 우리에게도 비춰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아니지요?’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2) 시험 2 : 비겁(부인)

두 번째 케이스를 살펴보려고 한다. 베드로다.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

 

예수님이 붙잡혀서 처음 끌려간 곳은 안나스에게 였다. 그는 가야바의 장인이었는데, 가야바는 그해의 대제사장직을 맡았다. 거기서 심문을 받았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일까? 거기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이나 증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기로 했던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다. 그런데 그는 자결하고 말았다. 거짓 증인들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베드로에게 주목해보라. 그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대제사장의 뜰, 문밖까지, 붙잡히신 예수님을 몰래 따라왔다. 거기서 한 여자가 베드로를 알아본다. 그도 같은 일당이라고 했다. 그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계속해서 심문한다. 쉽게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죄목을 붙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난항을 겪었다. 그 와중에 다시 베드로를 바라보라. 그 때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뜰 밖에서 불을 쬐고 있을 때, 같이 있던 사람 중에 베드로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베드로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것이 벌써 두 번째다.

 

한편 안나스는 예수에게서는 혐의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야바에게 보냈다. 그이라면 뭔가 덮어 씌울 구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야바가 심문을 한다. 그는 애매하게 유도심문을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라. 그 집 종 가운데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본다. 예수님께서 체포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칼로 어떤 사람의 귀를 내리쳤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그 귀 잘린 사람의 친척이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때 닭이 울었다. 여기서도 3을 발견했는가? 예수를 결코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했던 베드로다. 그런데 이 상황을 이기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동안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있다. 이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우리는 맥 놓고 있지는 않은가?

 

요한복음이 심문받으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권세자들 앞에 심문받으시면서 담대하신 주님과, 여종, 사람들, 대제사장의 종으로부터 심문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비겁한 제자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다. 제자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비추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박해 때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베드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교훈과 힘과 용기를 주려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쉽게 부인도 하고 배반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이처럼 연약한 자임을 잊지 말라.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손해보거나 피해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여기서 저는 또다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주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믿음을 부인하고, 그 권세 앞에 굴복하기만 하면, 부귀영화가 주어지리라는 유혹이었다. 지금 당장 타협·부인·굴복하지 않으면 앞으로 자기에게 일어날 번영과 축복의 기회가 송두리째 날아갈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두려움, 염려에 휩싸인다. 그러나 굴복하면 부귀영화를 얻을 것 같다. 하지만 모두 착각이고 환영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신기루이다. 그런데 예수는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보여주셨다.

 

3) 죄없으심

가야바의 유도심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냐?’ 묻는다. 주님께서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가야바는 안나스와 장로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것을 교묘히 이용할 잔꾀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것이었을까?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리는 로마에만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으로 이송되셨다. 우리의 시선도 빌라도 법정으로 옮겨 가보자. 여기서도 3을 발견하라.

 

우리는 어떤 단어를 문맥을 제외하고 사용하여, 이상한 결과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자기 편한 대로 갖다 붙이고 편집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에게 이 말은 신성모독이 되는 말이다. 그런데, 로마에게는 어떨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황제에 대한 반역이 되며, 곧 십자가 형을 씌울 수 있는 명분이 된다. (오늘 우리사회가 아무렇게 나 좌파라는 딱지를 붙인다.)

빌라도에게 고발하는 죄목을 보라.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이 고소는 황제에게 반역하는 세력으로 오도해서 전하고 있다.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범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것이 유도심문을 통해서 얻으려 했던 가야바의 노림수였다.

 

아무리 거짓 증인을 세우고, 모함하고, 문제를 왜곡시켜도 어둠이 빛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했다. 그리고 하는 말을 들어보라.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그것은 유대 지도자들의 옹절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을 간파해냈다. 그 뒤 헤롯에게 보냈다. 성경은 그들이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는 친구라고 말한다. 어떤 점에 그렇다는 것일까? 분명히 예수님은 무죄하지만, 여론에 이끌려, 상황에 이끌려 재판을 공정히 하지 못했다. 헤롯은 예수를 조롱하고 희롱해서 다시 빌라도 법정에 보낸다.

재심을 했던 빌라도는 다시 그 입을 통해서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무죄를 선포한다. 벌써 두 번이나 무죄판결을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공정하고 의롭다면 석방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이, 사회가 그마 만큼 순수하지 못하다. 예수라는 희생양의 카드를 어떻게 사용할지 본인의 정치적 입지가 불리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하려 한다. 여기서도 인간의 이기적인 죄성이 드러난다.

빌라도는 한 가지 묘수를 생각해낸다. 정치적 해법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가상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묘수는 꼭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는 않다. 명절이 되면 특별사면 하는 관례가 있었다. 강도 바라바를 놓아줄지, 예수님을 놓아줄지, 군중들에게 물었다. 빌라도는 어떤 계산을 했던 것일까?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군중들을 동요시켰다. ‘바라바를 놓으라.’ 엉뚱하게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다. 다시 빌라도는 세 번째로, 예수에게서 무슨 악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고,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무죄를 판결한다. 여기서도 3이다. 세 번째 무죄판결이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민란이 두렵고 여론이 두려워서, 결국에는 자신의 손을 씻어, 그 죗값을 군중들에게 떠넘겼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형을 언도받게 된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이 떠오른다.

예수님의 시험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침묵에 대해서 의아해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낼 수 있는 무슨 기적과 표적, 아니 어떤 말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주님은 침묵하고 계시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 못박혔을 때, 십자가 아래의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유대인들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똑같은 시험을 당하셨다. 마귀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는 것이다. 천사가 받쳐주는 기적이 일어나는지 아닌지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하고도 연관된다. 예수에 대한 의심, 기적을 바라고 요행을 바라면서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불신!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 사순절, 특별히 고난 주간에 주님은 우리가 담대한 믿은 가운데 서기를 원하신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감사히 이겨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1. 승리의 비결

시험을 이기길 바라는가?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실까? 기도는 이 시험들을 이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깨어나라. 십자가 앞에 담대할 수 있기를 빈다. 물론 기도한다고 시험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이 찾아오더라도 기도는 시험을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님을 보라

처음에 올라가서 기도하실 때, 39절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고난을 피하고 싶고, 그 괴로움이 역력하다.

두 번째 기도하실 때, 42절 “내 아버지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계시다.

세 번째는 어땠는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용기가 생겼고 담대해지셨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누가의 설명은 피땀흘려 기도하시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다고 말씀한다. “화면의 말씀 읽어보자.”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기도의 땀방울이 이미 핏방울로 떨어졌다. 여러분 그 핏방울 같은 기도의 땀방울들이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걷고 용기있게 만드는 비결인 줄 믿으시기 바란다.

 

여러분 삶의 자리에 고난이 있는가? 시험이 몰려오는가? 신앙적으로 나태해져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승리하길 바라신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기도하자.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예수와 함께 담대하길 바라신다. 용기를 주신다. 격려하시고 힘을 주신다. 그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을 물으셨다.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였지만,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롬11:29)

 

이번 부활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꼭 이루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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