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5째주)

 

  • 죗값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왜인가? 여러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 가인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죄라고 하는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것은 당사자와 하나님만 아는 것이다. 요한복음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만, 그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까봐, 두려움이 있다. 그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있을 수 있을까? 그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기에, 가식적이고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말이다. 거리낌 없이, 주 앞에 서 있는가? 이게 우리의 결정적인 문제는 아닌가?!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이 죄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문제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 죄의 문제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 경각심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쥐가 쌀독에 들어가 쌀을 먹고 나왔다. 여러 차례 반복되는 일이었다. 언제든 그 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독의 깊이는 깊어졌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높이가 되었다. 결국 쥐는 거기서 죽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라. 어떤 죄들을 저지르는가? 불평, 불만, 자기 불만을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수군거림, 비방, 교만, 반복적인 죄,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안고 있지는 않은가?(롬1:29-31) 심지어 어떤 중독된 것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독안에 든 쥐처럼’ 죄에 갇혀 있다. 거기로부터 빠져나오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실정이다.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속절없이 동일 죄를 범한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죄를 어떻게 다루실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신다면, 여러분, 어떻게 실까?!

 

하나님은 다윗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사울은 하나님을 향한 첫마음을 버리고 불순종과 교만에 이르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다(삼상16:1). 그래서 하나님을 찾으며 물어도 하나님은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이것만큼 무서운 게 없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며 파멸에 이르러도 내버려 두신다는 것! 그는 곤고했다. 그래서 예전에 쫓아내고 박멸하려 했던 신접한자와 박수무당을 찾아간다. 결국 비극을 맞게 됐다. 그렇게 보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매를 들고서라도 개입하시는 것이 나은 것 같다.

하나님은 다윗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 그 왕위와 은총을, 사울과는 같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다(삼하8:15). 혹 그를 비롯한 자녀가 범죄한 일이 있으면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을 가할지언정, 그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겠으며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그의 삶에 개입하시겠다는 것이다. 지도하시겠다는 것이다. 훈계하고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라고 하는 것이다. 사울은 버려졌고, 파멸을 맞았지만, 다윗은 회초리를 대서라도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의지를 약속 하셨다.

우리가 겪는 ‘인생의 채찍과 사람의 막대기’는 하나님의 징계 같아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마치 그 부모가 자녀에게 회초리를 대는 것처럼 말이다.

 

잠언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해서 아무리 다윗 왕이라도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다윗왕은 더 이상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부강하게 했다. 신복이었던 요압을 비롯해서 그 부하들을 전장에 보내고, 전령을 통해 듣게 된 소식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포위했다는 승전보였다. 이제 그는 집적 전장에서 진두지휘하지 않아도 승전보를 듣는 막강한 군대를 갖추게 됐다. 부국강병하게 됐다.

그는 승전보를 들은, 그 밤에 그는 왕궁 옥상을 거닐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시나이까?” 그는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찬양을 올렸고 감사를 올렸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소중하고 더없는 분이셨다.

 

그런데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안목의 정욕을 자극했다. 목욕하는 여인, 심히 아름다웠다. 그러자 음욕이 불일 듯 일어나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다. 그 대가는 무엇이었는가?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꾸짖으셨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네 눈앞에서 아내들을 빼앗아 백주에 동침하게 되리라.’

자녀였던 암논과 다말 사건이 형제간의 살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의 반란이라는 징계를 맞았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고 추앙받는 왕이었다. 훌륭하게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흠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완벽에 가까웠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했다. 곧이어 예루살렘도 산헤립의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그 군대장관 랍사게가 이제 끝장났다고 히스기아와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웃을 때, 그 밤 하나님을 향해 뜨겁게 기도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크신 능력을 보이셨다. 다음날 앗수르의 군대는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그런데 그는 곧 중병에 걸리고 만다. 산 넘어 산이다. 지친 마음에 낙망하고 실망할 수 도 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또다시 벽을 향해서 기도한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눈물을 쏟아냈다.

여러분,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다고’ 눈물을 쏟아낼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하는 심령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그의 진심어린 눈물의 호소를 들으셨다. 그는 곧 중병에서 낫게 되었다. 그 때였다. 바벨론에서 사신들이 왔다. 히스기야의 병문안을 온 것이다. 그는 병상에서 일어난 기쁨, 병에서 완쾌된 기쁨 때문에 모든 것이 좋았다. 그래서 바벨론 사신들에게 예루살렘 곳곳을 보여주며 영광스런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습을 자랑했다. 그런데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결과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백 여년 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함락되고, 수백년을 지켜온 성전이 불타 사라지고, 유다백성은 굴비구름 엮이듯,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가야 했다. 치명적인 실수란 게 무엇인가? 성경은 히스기야가 교만했다고 말한다. 그 정도 가지고 히스기야에게 교만하다고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병문안 온 바벨론 사신들에게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성경은 그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벨론이 쳐들어 왔을 때, 손바닥 보듯 예루살렘 구석구석을 알고 기물들을 탈취한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히스기야 왕 때, 이미 예루살렘에 대해서 모든 것을 파악했다. 도피처는 어디인지, 공격로는 어디로 해야할지, 각종 기물과 보물들이 얼마만큼 있는지, 모든 것이 파악됐다.

죄의 문제는 사회와 국가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루살렘이 멸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왕의 문제만은 아니다. 고관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에게 죄의 문제가 있었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배반했다. 그러하기에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가 두 가지 악을 저질렀는데,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저축지도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것이라’(렘2;13), 아무리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느니라.’(렘2:22),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렘4:1) 부르셨다. 하지만, 죄에 가리워져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다.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세계 패권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옮겨가고 있었다. 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포로들을 원래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돌아오는 길은 꿈만 같았다. 그 징계와 채찍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죄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가 저지른 범죄와 앞으로도 저지르게 될 범죄는 우리에게 언제 부메랑이 되어서 징계와 채찍으로 돌아올까? 그것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탄식했다.

주의 하라. 이것은 바울의 탄식만이 아니다. 죄(사망)가 저와 여러분을 삼키려 들것이다. 마귀가(죄와 사망의 권세가) 우는 사자와 같이 집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닌다. 그러기에 더욱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에게는 의와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히브리서 12:11).

 

여러분,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괴로워도, 낙망하지 말라.

그 뒤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다. 다시 복되게 하신다.

 

다윗에게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을 가하셨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사울에게 한 것처럼 하시지 않으셨다. 그 혹독한 환난 가운데에서도 그 왕위를 지켜주셨고, 그 보좌를 솔로몬에게 넘어가도록 하셨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전혀 예상 밖이다.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있다. 우리의 염려와 불안, 걱정을 완전히 비껴나간다. 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자 감격과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1. 복음과 은총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당시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꺼리는 3대 부류중의 하나다. 죄인, 창녀, 세리. 그 직업은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에 조세를 내는 일을 맡은 직업이었다. 로마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당국으로부터 녹을 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순전히 백성들에게 혈세를 받아서 살아갔다.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구제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가족 중 자녀를 다른 데에 노예로 빼앗기거나 혹은 본인 자신이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시대는 더욱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심한 착취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유대인의 경제정의와 율법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경제체제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는 굉장힌 민감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함정에 빠뜨리려고 바리새인들이 시도했던 적이 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세리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무자비하게 악행을 저지르고 횡포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세리를 대하는 유대인들의 감정이 어땠을까? 고울 리가 없었다. 더구나 하층민들의 감정은 더욱 그랬다. 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떤 일이 이 사람에게 닥쳐야 하는가? 닥칠 것인가?

‘분명코 정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그들을 심판할 날이 올 것이다.’ 사람들은 세리를 저주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기를 바랐다.

 

당사자들은 어땠을까? 당사자들을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을까?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 하신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는 당시 세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아주 극단적인 한 부분만을 꼬집어서 주님이 일반화시키실 리는 없다. 누가복음 18:9-14을 보라.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한다. 세리의 기도에서 보여지는 감정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감히 죄책감, 두려움 때문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지도 못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비를 구할 뿐이다.

저는 세리들도 두 가지 감정을 가지고, 심한 스트레스로 갈등했음을 본다. 로마와 유대, 사이에서. 로마의 횡포를 따르자니, 유대가 울고, 유대에게 유리하게 하자니, 로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로마의 군대의 힘도 두렵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상을 빗겨나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변화되거나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그 정죄의 대상이었던, 삭개오 아래에 다가오셨다. 그리고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말씀하셨다. 삭개오는 주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라. 징계와 채찍을 통하지 않고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분 용서와 구원사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님에게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텍스트의 맥락을 살펴보자.

1)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본문(18:9-14). 이 이야기는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부자관리와 예수와의 만남(18:18-30), 부자 세리장 삭개오와 예수와의 만남(19:1-10)

2)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 바리새인은 율법을 준행하며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반면 세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자비를 구한다.

3) 그런데 이것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 똑같이 나타난다. 부자관리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했다고 자부한다. 주님 앞에 당당히 나왔다. 반면 삭개오는 자신의 핸디캡과 죄인된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한다. 다만 돌무화과 나무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

4) 기도하러 올라간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예상을 뒤엎고 세리를 의롭게 여기심, 부자관리와 부자 삭개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선포는 예상을 깨고 삭개오와 그 가정에 이루어졌다.

5) 부자 관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유를 나눠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예수를 떠났다. 하지만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 여러분 전자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이고, 후자가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전자는 율법의 모습과 결과이고, 후자는 복음의 모습과 결과이다.

여러분 이 대목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기 위해서 꼭 회초리를 드시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우리가 변화되고 성화되어 가는 것은 율법과 징계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의 전적인 은총으로 일어난다. 자기 공로나 의지나 율법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손가락을 입에서 떼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24시간 손을 빤다. 야단쳐서(매로) 못빨게 하면 할수록 더 손가락을 빨고, 강제로 못 빨게 하면서 성격이 나빠지고 고집스럽게 된다. 영적인 영역도 마찬가지다. 못하게 하면 할수록, 강제하면 강제할수록 심령이 강퍅해진다. 전문가의 치유법이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손빠는 행위를 멈추었을까?

양손으로 할 수 있는 놀이를 통해, 이 아이에게 다른 자극과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그 놀이 때문에 손가락을 입에서 떼고, 두 손을 이용해서 재밌게 놀이를 한다. 그 시간이 연습되고 훈련되자, 그 행동이 어느새 사라졌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영혼의 전문가이신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마음과 은총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복음의 비결이 되는 것이다.

 

이 은혜는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길 원하신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어떤 이들이 일어났는가? 6절과 8절의 말씀을 보라.

첫 번째는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다. 성령이 그 속에 들어온다. 삭개오 속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셨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그는 예수를 영접함과 동시에,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셨다. 삭개오를 변화시키셨다.

두 번째는 그는 뉘우침과 동시에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했다.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을 때, 두 배만 갚으면 된다(민수기5:7). 그런데, 네 배를 갚겠다는 것은 그의 뉘우치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안한 것이다. 잘못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것을 갚으려 해도 다 못갚는다고 여기고 넉넉히 갚으로는 것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두 배, 아니 그대로 원상복구만 요구해도, 그것조차 아깝고 억울하게 느끼는 것이다. 주님은 그에게 9-10에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셨다.

세 번째는 그의 변화는 억지로 된 것이나, 두려움과 공포로 인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원해서 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징계와 채찍과 보복으로 우리를 대하신다면, 아마도 사도 바울은 제일 많은 저주와 파멸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여러분 기억하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영원한 사랑이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것이다.”(빌1:6)

 

여러분 사순절 순례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참 용서와 자비를 깨닫고 경험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깨닫기를 바란다.

그 은총을 체험하고 경험하길 바란다. 구원의 감격과 뜨거움이 우리가운데 있기를 축원한다.

여러분, 영적으로 자유하라. 예수를 마음 가운데 다시 한 번 영접하라. 죄에 찢기고 눌렸던 마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유하기를 선포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채찍과 징계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길 바라신다.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보라.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우리가 영접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과 징계를, 십자가 위에서 대신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 주님이 부활과 생명의 왕이 되어 우리에게로 오고 계시다. 영접하라.

더 이상 죄의 권세가 우리 가운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를 빈다. 우리의 죄가 이제 줄어들고, 끊어지길 바란다. 대신에 주님의 권능과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고,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길 축원한다. 고전 15:55-58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을 피하신 여러분 이 사순절 절기에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시라.

우리의 삶과 존재가 예수님의 은혜로 변화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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