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4주)

 

  1. 도입

오늘 말씀의 서두는,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만찬을 위해 제자들에게 성 안 아무개에게 가보라고 하시는 것으로 시작된다(v.17).

예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참 신기하고 놀랍다.

때는 유월절절기 중이었다. 무교절 첫날, 무교절이라 함은 유월절 이후부터 시작하여 다음의 안식일까지 계속되는 절기이다. 무교절 첫 날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백 삼십년 간 남의 나라에서 설움을 받다가 해방된 최초의 날이다. 그들이 얼마나 급히 나왔는지를 후손들에게 기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급히 재촉되는가를 보여주는 모형이다.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먹으며 7일 동안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제자들은 주님께 유월절을 지키고 음식을 잡수시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었다. 18절 말씀을 보라. 주님은 성안 아무개에게 가서, ‘주님의 때가 가까이 왔으니, 주님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그의 집에서 지키시겠다고 하라.’고 일러주신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더니, 쉽게 유월절을 위해 머물 곳을 정했고, 그 모든 준비를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하다.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아셨을까? 그리고 성안 아무개는 누구일까?

주님께서 성안 아무개를 아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아실까? 아신다면 어떻게 알고 계실까? 이런 생각들이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일어나는 궁금증들이다.

 

 

  1. 주님께서 미리 아신다.

기억하는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비슷했다.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셨다. 거기서 어찌어찌 해야할지 일러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타고 가실,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게 하셨다(마21:2-3).

 

성경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몇 차례 더 등장한다.

 

가버나움에서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는 지 베드로에게 물었다(마17:24-27). 그때, 주님은 베드로가 와서 그것을 말하기도 전에 그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이 있었다.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바다에 가서 낚시를 하면 먼저 오르는 고기가 있는데, 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그 돈으로 주님과 베드로를 위해 내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부른 이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다. 비슷한 점이 있다. 혼미한 시대의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상이 낙망이었지만, 애써 잊으며 살려고 노력했다. 오히려 어떡해서든 혼란한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온통 관심이 있었다.

그때 예레미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모태에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에게도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43:1)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창조하셨기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을,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잘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도 그랬다(요1:47-49).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모세와 선지자가 기록된 대로, 그것에 응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이것을 증거하며 ‘와서 보라.’며 그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주님은 빌립과 함께 나다나엘이 오고 있는 것을 멀찌감치 보고 계셨다. 그가 가까이 이르자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속사람됨까지 알고 계시다.

 

주님께서 우리도 잘 알고 계실까? 알고 계시다면 어떻게 아시는 것일까?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되묻는다. 나다나엘도 신기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냥 안다고 하는 것은 아닌 지 궁금했다.

주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있을 때 보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아마도 예레미야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모태에 있기도 전부터 알고 계셨을 것이다.

 

 

  1. 성안 아무개

그렇다면 성안 아무개에 대해서도 잘 아셨을까? 그렇다면 과연 그는 누구인가?

 

오랜 친분이 있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고도 단번에 알았을까? 만약 오랜 친분이 있다면 제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성별은 밝혀졌다. 여자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잘 살았을까? 못살았을까?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수준에서 생각해야 한다. 저는 ‘물 한 동이’에서 그 가정의 식솔들의 규모를 생각해봤다. 그 물로 음식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정도다. 물 한 동이 정도 필요한 경제적인 수준이면, 일용할 것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정도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들어가셔서 유월절을 지키셨다. 그렇다면 가사(家事)일에 익숙하고 유월절 음식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연령대로 추론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를 도운 모든 여인들의 리스트를 살펴봤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역사와 상황을 담고 있는 서적들을 쭉 검토했다. ‘성 안에 사는 아무개’로 지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마르다? 그는 음식을 잘 만든다. 살림과 가사일에 능수능란하다. 그 동생 마리아? 그는 주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을 사모하고 순종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성 안이 아니라 베다니에 산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변방에 있는 마을이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일까? 예수께서 귀신을 내 쫓아 주신 이후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돕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여인이다. 그런데 그는 막달라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동굴에 함께 찾아갔던 살로메? 그는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다. 과연 누구일까?

 

다시 본문의 중심을 바로잡고 봐야하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성 안 아무개’에게 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목적과 용무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기간,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 마지막 만찬이 될 수 있는 식탁을 준비하고 마련해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저는 이 대목이 의미 있게 와 닿는다.

이 대목부터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사건들이 있는데, 무엇인가? 최후의 만찬, 가룟 유다의 배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함, 제자들이 도망을 친다. … 이런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데 집중하느라 어쩌면 묵상하지 못했던 대목이 있다. 이 집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있다. 이 집 안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섬김을 보여주신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일까?

 

로잘린드 마일스라는 사람이 쓴 책이 있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참 도발적인 책제목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식탁에는 모두 남자들이었다. 그는 그 식탁의 이면을 보고 있다. 그 식탁이 오기까지, 차려지기까지, 그리고 치워지고 준비되기까지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은 누구인가?

‘성 안 아무개’는 예수님의 식탁을 준비했다. 제자들의 손발을 씻을 수 있도록 세수대야와 수건을 준비해줬고, 또 물을 퍼다 날라주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을 섬겨주었다.

 

정희진 이라는 여성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제주도에 혼자 다녀왔다. 식구들과 같이 간적은 여러 번 있었는데, 혼자 간적은 언제이던가 싶었다. 민박집에서, 잠에서 깨어났는데 난생 처음 겪는다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준비된 밥상을 받은 것이다. 그 사실이 참 놀라웠다. 평생 입맛 까다로운 식구들의 식사 담당을 해왔던, 그였다. 밖에 나가서도 어디를 가서도, 늘 가족들의 식사걱정을 하는 게 주부 아니겠는가. 그런데 저절로 놓여있는 식탁!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하고 감격적인지, 주부로서 낯선 경험이었지만 참 좋았다. 또한 먹고서 치우지 않고 상을 내놓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부담감 없이 마음이 편하고 신선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섬김을 받는다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남자들은 이런 고마움과 감사를 잘 모를지도 모른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려진 밥상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그 식탁을 차린 이의 고마움을 알아야 한다. 식사를 준비하면서의 번거로움, 귀찮음 같은 것들이 있는 것이다. 먹는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걱정, 남은 음식 치우기, 설거지 이런 수고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떠나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고마운 일인가, 미처 알지 못했다.

 

가사노동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나 가정의 풍토도 문제다. 또한 그것을 준비하는 이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장한 일을 하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정희진 씨는 이 책을 읽으면서, 책제목을 바꾸어 다시 묻는다. “누가 그 설거지를 다했을까?” 재밌지 않은가?

밥 먹고 난 다음에, 제일 하기 귀찮은 게 설거지고, 누가 해줬으면 하는 게 설거지란다. 여자분들은 공감이 되는가? 남자들이 생각해보라. 먹은 것을 치워라, 정리하라 하면 얼마나 망막한가? 열심히 잘 한다고 해놓고도 아내에게 한 소리 듣는다. 2% 부족한 것 때문에 말이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그 섬기는 마음으로 설거지 같은 봉사를 했으면 좋았겠다는 다음 대목을 연상해봤다. 물론 그럴 리 없다. 아직 그 수준까지 단번에 성숙과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여전히 그 몫은 내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의 몫이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 남성들은 이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사순절 기간에, 오늘만이라도 식사 후의 설거지를 대신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내 일이라 여기는 사람은, 그 일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내 일도 아닌데,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불평한다.

그런데 성 안에 사는 아무개는 불평없이 그 수고를 자기의 일로 여기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 전에 가장 값비싼 순전한 향유를 부어드렸던 여인을 기억해보라. 가룟 유다는 그 순전한 향유를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으로 바꾸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 여인을 핀잔했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 여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은 무엇인가?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이 어떤 명분이나 돈의 가치로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존재에게 순전한 향유옥합이 아까운 것인가? 주님은 그것을 아셨기에, 그 여인의 모습에 감동했고, 그에게 고마워하셨다. 저울을 가진 자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계산하고 따른다. 그리고 명분을 내세워 배신도 하는 것이다. 기억하라. 계산된 마음, 명분을 앞세우는 마음 때문에 언제든 관계가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진실함으로 하면 된다.

성 안 아무개는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 잊을 수 없이 생생했던 식탁의 자리와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자리를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겸손함으로 함께 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제자들보다 더 제자는 아닐까?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를 돕는 여인들, 말없이 순종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그들은 묻지 않고 의심을 품지 않아도 주님의 생각과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부활의 소식도 여인들이 제일 먼저 알았다.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다. 여인들은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다. 그 섬김과 돌봄과 응당 내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며 봉사의 손길을 놓지 않았던 그 마음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하게 했던 믿음의 모양새는 아닐까?

또한 성안 아무개는 주님의 일을 위해 예비된 사람이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루디아를 만나게 됐다. 루디아는 예비된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지만 주님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이 ‘성 안 아무개’가 주님의 방법이 된 사람이다. 주님은 예비된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역사와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마찬가지다. 성안 아무개는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1. 나 아무개

성 안 아무개는 누구일까? 이런 단서들을 가지고 기억을 떠올려보라.

주님의 일을 위해 예비된 사람! 예수님 곁에서 해야할 일을 응당 자기일로 여기는 사람!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준비하는 사람! 주님의 방법이요 도구가 되고 있는 사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일까? 이쯤이면 여러분이 알아챌 수 있다.

 

여러분, 얼마 전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신문기사 보셨는가?

 

한 패스트 푸드점에 남루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음식도 주문하지 않을 채 한 쪽에 오래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휴가를 나온 한 군인이 있었다. 그는 슬며시 주문대로 가서 햄버거와 커피를 추가 주문했다. 그리고 점원에게 그것을 그 할머니에게 전해달라고 하고는 자기 길로 가버렸다.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서 알게 된 일인데, 군복을 입은 옷으로 자기가 전해주면, 사람들의 시선이 그 할머니에게 쏠리고, 할머니께서 무안해 하실까봐 조용히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는 ‘군인 아무개’였다.

 

아르바이트생이 이 일화를 국방부 싸이트에 올렸다. 그가 입었던 군복을 기억해냈기에 소속부대가 어디인지 금방 찾아낼 수 있었고, 그 부대가 제 1군수지원사령부임을 알아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이사야, 나다나엘을 비롯한 그 부르심을 입은 모든 이들을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방법으로 사용하신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성안 아무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인가? 누구여야 하는가? 저는 여러분이 그가 누구인지, ‘성 안 아무개’가 누구인지 이미 찾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기로 결단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해답을 주실 것이다. 여러분 그 답을 깨닫기를 축원하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계실까? 우리 역시 유명하지 않은 채 이름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지만, 주님께서도 우리를 보시고 아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으셨고 지명하여 부르셨기 때문이다.

나다나엘의 경험은 무엇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그가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해석할 뿐이다. 여기서 그 해석학적인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나다나엘에게는 무화과나무 아래의 그 순간, 그 자리, 그 때에 대해서 분명한 것이 있다. 뭔가 의미있는 사연이 있고 내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무화과나무 아래’를 지목하시자, 그 짧은 순간에 나다나엘은 바로 주님이 자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심을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한다. 주님은 또한 “네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는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말씀하신다. ‘보았다 함’으로 ‘믿게 된 나다나엘의 경험’은 무엇인가?

주님께 주님께서 자기를 아심을 통해 그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주님이심을 보았던 것이다. 이 능력을 통해 주님의 전지하시는(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으로 여러분을 주님께 맡기라. 그리고 순종하며 충성하라. 주님의 도구와 방법이 되라.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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