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식탁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식사시간은 신비이다. 인스턴트 식품이나 패스트 푸드 때문이기도 할테고, 바쁘다 보니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마련하기 어렵다. 각자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가족이 하나가 되는 시간이고, 화목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일상적인 시간을 통해서 사람은,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존재감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재감을 의미있게 만든다.

 

지난주에 이어서, 의미있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위한 말씀을 생각해보겠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식사를 함께 할 때까지, 주님인 줄 몰랐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감사기도)하시고 떼에 제자들에게 나눠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길에서 성경의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겁고 따뜻해졌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바로 주님이셨다.

 

왜 식탁의 자리에서 눈이 밝아졌을까? 우연이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절망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고 소중하다고 추억할 만한 때는 언제인가? 대부분 어떤 특별한 추억과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상적인 식사시간, 식탁에 둘러 앉던 평범한 시간이다.

경주리조트 붕괴사고 때, 아들을 잃은 한 엄마는, 아들이 자꾸만 생각난다. 그런데 가장 생각이 많이 날 때가 언젠가 하면, 그가 대학에 붙었다고 좋아하고 기뻐하던 순간도 순간이지만, 가장 생각이 많이 날 때는, 식사와 관련된 시간들이었다.

아들 밥차려주기 위해 준비하던 시간들, 같이 과일을 깎아먹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던 시간들… 너무나 평범한 일상이 그를 괴롭혔다.

그날 바쁜 일이 있어 밥도 못차려 줬다. 사먹거나 어디선가 먹겠지 했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 이렇게 떠날 줄 몰랐는데, 마지막 가기 전에 밥 한 끼 잘 차려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억장이 무너졌다.

평범했던 식사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그 시간은 가장 친밀히 사랑하는 순간이고, 존재를 의미 있고 비중 있게 하는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가족의 화목과 살아갈 힘을 충전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니 여러분, 가족과의 식사시간을 잘 가지라. 이것만 잘 해도 가정이 무너지지 않는다.

 

저는 여기서 밥상은 생명이라는 것을 본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살아있게 만드는 생명의 자리요, 그래서 거룩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도 식탁의 자리는 정말 소중하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생생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월절기였기에, 그 전통에 따라 음식을 준비하고 먹었다. 이상한 점은 유월절 어린양은 없었다. 그 대신, 떡과 포도주가 그것을 대신했다. 주님은 떡으로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새언약을 세우기 위한 피라고 말씀하셨다. 의미를 알 듯 말 듯 했지만, 주님의 섬김과 헌신 그리고 나눔은 그 의미를 어렴풋하게 나마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일상적이었다.

식사 전에는 꼭 축사를 하셨다.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과 정성이,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음을 눈뜨기를 바라시며 함께 나눠 잡수셨다.

 

예수님의 밥상머

예수님의 밥상머리는 어땠을까?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식탁(코셔)의 규정과 법규가 있는지 모른다(카샤룻이라는 식탁법규). 사람에게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부정한 단계, 정결한 단계, 거룩한 단계다. 그 규정은 부정한 사람은 정결해져야 하고, 정결했다면 거룩해져야 한다. 그것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돌보실 때의 일이다. 식사시간이 다됐다. 차려진 음식을 모두가 함께 맛있게 들려고 했다. 그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왜 장로들의 전통대로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인지, 따졌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낫는다는 믿음으로 찾아온 많은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과 접촉하셨다. 율법대로라면 병자들 사이에 아주 가까이 있었고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부정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정하다.

잘 구분해보자. 불결하다는 것이 아니다. 부정하다는 것이다.

‘손을 씻지 않았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특히 현대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단순히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청결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장로들의 전통대로 그 복잡한 예식을 치러서 정결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건국대학교 최명덕 교수라는 분이 있다. 이스라엘 유학시절. 다윗(데이비드)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종종 맛있는 식사대접을 받곤 했다. 하루는 보답의 의미로 그 부부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정성스레 준비했다. 손님 맞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갑자기 초대를 거부했다. 이유는? 그 음식들을 만들 때, 자기들의 법규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만들지 않은 음식은 부정한 음식이고, 그래서 초대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음식을 먹으면 부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의식과 의례는 좋은 점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율법주의적이 될 때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사람들을 참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율법주의란 자기들 끼리만의 관계를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거룩’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리새인들이 정한 방식과 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 격식을 치르지 않은 예수님은 부정한 것이고, 그 식탁까지도 부정한 것일까?

 

‘거룩’을 규정하는 장로들의 전통을 보자.

부모를 공경하라는 문제, 특히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물질을 드려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이다. 그런데 장로들이 만든 전통과 규정은, 그것을 이용해서 대충 넘어가거나 소홀히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정작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지 못하고 사람의 계명을 지키면서, 스스로 거룩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헤세드)와 공의(미쉬팟)와 정의(체다크)의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구현될 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레위기 법의 본래정신이다.

주님께서 입으로 나오는 것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말씀하셨다(마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이란 무엇일까? 마15:18을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란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모순투성이인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가식적이고, 남보다 우쭐하려고 사람을 냉대하는 그 모든 마음의 수작들이 더러운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시비를 건 이유는 무엇인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나누고 분리시키고 차별하는 경계선을 그어서, 자기가 인정받으려는 유치하고 옹졸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식탁은 경계와 차별이 없었다. 고린도 교회가 갈등을 겪었던 이유는 식탁의 자리에서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종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마음으로 따로 식사를 하고, 누구는 먼저 먹고, 누구는 나중에 먹고, 누구는 잘 먹고, 누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자 고린도교회는 병들기 시작했다.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식사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밥 잘 먹어야 힘도 나고, 건강도 빨리 회복하지 않겠는가? 제자들도 식사를 맛있게 즐겁게 해야, 그 고된 일들을 함께 할 것 아니겠는가? 병자들을 위해, 몸이 불편한 분을 위해, 죽이라도 쒀서 찾아가고, 작은 식탁이라도 대접하는 손길이 얼마나 거룩하고 귀한 것인가? 자비와 긍휼은 특별하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은 34절, 37절에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주라고’ 말씀하신다.

 

학교 다닐 때, 어떤 식당 할머니. 가격 1,500원. 메뉴 할머니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밥과 반찬 그것도 마찬가지로 그때 그때. “밥은 먹고 다니는지?” 늘 물으셨다. 이 마음이 거룩한 것 아닌가?

예수님의 식탁은 또다른 공격받았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시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마9:10-11), 많은 죄인과 세리들이 함께 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봤다. 좋은 마음이 들리 없었다. ‘선생이라는 작자가 죄인과 세리들과 식탁을 함께 한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사실 ‘죄인과 세리’라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해놓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아니다. 자비와 긍휼의 대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규정하고 있는 죄인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육체적인 질병이나 남에게 보이기 싫은 약점이 있어서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 계속되는 기근과 가난으로 용기를 잃은 이들, 로마질서에 적응하지 못해서 계속되는 실패를 거듭한 이들, 그래서 절망하고 주저앉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정죄의 대상이었고 죄인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6:6) 교만과 강퍅한 마음으로 악독한 일들은 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스스로 의인인척 착각하며 나아오는 백성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그 제사와 번제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이다. 오히려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진정한 뉘우침으로 마음을 낮추고 회개하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야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긍휼이 있을 것 아니겠는가?! 또 두 번째 의미는 강퍅했던 마음이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회복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제사보다 긍휼을 더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에 능한 이들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주님의 식탁은 긍휼과 자비로움의 회복의 시간이다. 식사를 나누면서 삶의 이야기와 고충도 듣고, 어려움을 파악하시면서도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고,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야 할 길들을 보이시는 시간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나쁜 습관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남에 대한 험담과 비방과 불평불만이다. 스스로는 그런 줄 모른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가 너무 강하고 자기기준이 있기에, 거기에 어긋나면 모든 게 가십거리이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의 식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의 식탁을 흠집내려 했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 좋은 말로 번역해서 그렇지,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방이다.

 

정말 웃긴 건, 뭐냐하면, 이중적 잣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이중잣대로 자기 편리한대로 말하는 나쁜 습관, 이런 사람들하고 밥을 같이 먹자고 해도 먹기 싫은 게 사실이다.

 

예수님의 식탁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첫 번째는 누구라도 귀하게 받아들여지고 사랑과 긍휼로 보살핌을 받는 거룩한 식탁이었다. 바리새인의 거룩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두 번째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한 정죄가 아니라, 존중과 사랑으로 삶이 회복되는 식탁이었다. 주님은 교회라는 주님의 몸을 통해 우리를 초대하시고, 이 은총 가운데 머물기를 바라신다. 주님의 보살핌과 회복이 우리가운데 있기를 기원한다.

 

세 번째는 이제 말씀드릴,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식탁이었다.

 

주님의 식탁은 기적을 일으켰다. 5병2어의 기적. 단순히 음식이 불어나듯이 일어난 기적사건이 아니다. 항상 맥락이 중요한데, 예수님의 식탁공동체가 갖는 성격과 그 힘이 어떠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장정만 5천명이 넘는, 가히 폭발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저는 마가복음에서 이 장면을 소개하기 바로 직전에,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잔치에서 세례요한의 처형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맥락에서 이 사건을 다시 바라봤다. 빈들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하라고 외쳤던 세례요한이다. 그가 헤롯왕과 고관들이 흥청망청 먹고 즐기는 잔치자리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바로 굶주린 군중들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와 함께 오병이어로 나눠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고관들은 수많은 연회에 참석하느라 많이 먹고, 손가락을 넣어 토하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헤롯이 고관들과 함께 술에 취하고 토할 정도로 먹고, 여인의 관능적인 춤을 구경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 사회에서도 일부 몰지각한 정제계 인사들, 그들만의 축제가 성상납으로 이어지는 은밀한 파티가 일어나고 있다는 보도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아냥거린다. 정말 이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가계경제의 궁핍함 때문에 어려움을 격는 굶주린 백성들, 오클로스들일까? 오히려 헤롯과 그 고관들은 아닐까?

 

보이시는가? 주님은 늘 굶식을 하는 이들에게 찾아들어가셔서, 고관들이 즐기는 축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축제를 만들어내고 계신다는 것을 말이다. 주님은 정말 그 먹는 자리를 즐거움과 기쁨과 애정으로 바꿔내고 계셨다. 삶의 애환, 실수담, 실패담, 낙담, 모든 것들이 이야기나눔의 소재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새로운 소망과 가치로 승화되고 있었다. 어느새 서로 공감하고 느끼면서 힘과 위로가 됐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힘을 느끼고 영원을 체험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우리 삶의 자리에 이와 같은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한다.

 

나중에 깨달은 점은 예수 자신이 유월절 희생양의 제물이었다는 것이다. 어린양 대신, 떡과 포도주로 대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도살하는 양과 같이 희생제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식탁은 부활하신 예수를 볼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는 기회이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그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복음을 보면 그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밤새 물고기를 잡았다. 그 잡은 생선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으로 아침을 준비하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불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도록 식탁의 자리는 신비한 눈을 뜨게 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일상적인 식탁과 나눔과 섬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깨닫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한다.

 

여선교회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주일 식사를 준비한다. 여러분 믿음으로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얼마만큼, 어떤 음식을, 잘 준비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시험에 들어서도 안된다. 먹으면서 이러쿵 저러쿵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이고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적인 비교를 한다면 더욱 그렇다.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또 우리 교회가 주위의 독거노인들에게 반찬을 공궤한다. 그 작은 돌봄과 섬김과 나눔을 통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현존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식탁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부활이 나타나야 한다. 사순절기에 지친 이들에게 욕려와 격려의 차원에서 합 한끼라도 같이 하라. 여러분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하심이 나타나길 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정성스레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식탁의 자리가 확대되어서, 거기서 일어나는 생명나눔이 우리 이웃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모든 삶의 자리가 돌봄과 섬김과 나눔의 은총의 자리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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