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날씨가 불안정하고 코로나라는 풍파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을 요동치게 하는 상황속에서, 구원의 안전한 포구에 우리의 믿음의 닻을 내리기를 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큰 폭풍이 닥쳐올 때 방파제가 파도를 막는 것처럼, 주님의 팔이 영혼의 방파제가 되어주셔서, 저희 예배가 평강으로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귀울이시리로다.(미가7:7)

 

 

  1. 공은 가로채지만 책임은 회피하는 세상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보험설계사였다. 수령할 보험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소액이라서 별로 신경을 안썼다. 보험설계사는 보험금 수령과 보험안내 차 방문하겠다고 했다. 그 의도를 모르고 오전에는 교회에 있을 거라고 했다.

다음 날, 손에 이것저것 들려 있었는데, 직감이 안 좋았다. 보험설계사는 다짜고짜 치매보험을 들어야 하는 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진행하려고 했다. 보험을 들만한 형편도 아니고, 필요치 않아서 중간에 제지시키자, 원망투로 말한다.

 

목사님이 치매보험을 안들 줄은 꿈에도 생각도 못하고 멀리서 바쁜 시간 쪼개서 왔다는 것이다. 이런 성의를 무시하고 보험가입을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원망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집요했다. 교회에 들어온 손님이기에 매몰차게 내보낼 수도 없는 일이고, 난감했다.

교회를 찾아가서 목회자에게 사정사정하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그러는 것이다.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음에도 1시간 가량 혼을 쏙 빼놓았다. 급노화된 느낌이었다.

 

마지막에는, 보험설계사가 이렇게 말한다. ‘자기에게 고맙지 않느냐?’ 보험금을 받게 해줬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보답차원에서 수령하게 될 보험금으로 가입을 하란다.

 

“무슨 소립니까? (반박하기 위해서) 첫째, 제가 고마워해야 할 분은 이것을 납입해준 분이지, 설계사님이 아닙니다.” 둘째, 수령하는 보험금으로 몇 번을 납입하다가 그후에 납입하지 못하면 설계사가 대신 내줄 거냐고 하자, 그렇지는 못하다고 한다. 물론 해약하면 돌려받지도 못한다. 10년을 부어야만 원금보장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강요하느냐고 하니까, 이렇게 했는데도 보험 안들어 주는 분은 처음봤다면서 멸시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기의 노동시간이 다 날아가게 됐단다. 그러면 역으로 저의 오전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게 된 것은 괜찮단 말인가?

 

남의 공을 가로채고 생색을 내고 다른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세상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사정과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데다가, 그 책임에서는 발을 빼는 세상이다. 보험가입을 하지 않는 나를 원망할 게 아니라 목적을 속이고 찾아와, 거부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집요하게 군 자기의 행동을 원망해야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살다가 번지수를 잘못찾은 상황을 접한다.

 

 

  1. 잘못된 원망

한나는 불임이었다. 남편은 엘가나였고, 대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브닌나를 얻게 된 것 같다.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삼상1:6)

 

적수, 격분케 됨, 괴로움. 한나가 받는 고통이었다. 7절을 보면 한나가 “울고 먹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헤아릴 수 있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열등감을 건드리고 민감한 대를 자극하고, 배려하지 못하고 내뱉는 말과 자기 자랑으로 누군가를 멸시하고 괴롭힐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자주 나타나는 폭력성과 유사하다.

 

성경에서 사라와 라헬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사라는 하갈이 자신을 멸시한다고 아브람을 원망했다.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를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창16:5)

 

아브라함이 밉게 느껴졌다. 하갈이 임신을 해서 자식을 갖게 됐다고 좋아하는 기색도 서운하고, 아끼는 여종이었지만 주인을 깔보는 것 같은 자격지심도 견딜 수 없었다. 의심, 불신, 서운함, 분노, 자격지심 같은 마음에 붙들려 흔들리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을 잡기도 쉽지 않다.

 

아브라함은 곧장, “당신의 여종은 단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말한다. 사라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 한 일인데, 아브라함은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아브라함을 원망해서 될 일도 아니다.

 

라헬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자식을 잘도 낳는데, 라헬은 그렇지 못했다. 아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많은 것을 가졌어도, 언니와 비교가 되니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이 됐다. 언니를 시기한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창30:1)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14:30)

우리는 살면서 시기를 잠재우고 시기심을 다스려야 한다. 뼈가 썩고 녹는다. 시기를 잠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나에게서 배울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을 긁는다고 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사라와 라헬과는 달리 한나는 “울고 먹지 못하고”있다. 이 일이 사람을 원망하고 화풀이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한나가 사라나 라헬이 사람을 원망하고 분통을 터뜨리는 대신 선택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기도하는 일이었다. 시기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리석게 할 뿐이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삼상1:10)

 

성경을 보면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의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마노아의 아내, 삼손의 어머니이다. 마노아의 아내도 사라와 라헬과는 달랐다. 주어진 처지와 상황을 인정하며 수긍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한나와 다른 점이 있다. 마노아의 아내는 기도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실 것과 나실인이 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반면에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을 하며 나실인으로 키우겠다고 한다.

 

 

  1.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영역과 사람이 해야 하는 영역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하나님의 영역을 하는 자는 원망과 불평을 하며 삶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라와 라헬이 그랬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를 택했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말했다가는 간 큰 남자 소리라는 말을 들을텐데, 우스개 소리로 듣길 바란다. 어느 목사님이 야곱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겠느냐고 말씀한다. 보통 한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서도 들들 볶이는데, 아내가 네 명이나 있었으니 얼마나 볶였겠는가라는 것이다.

 

복된 삶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란다. 매사에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할 수 없다고, 내 생각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을 지어놓으면 기도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대로, 바라는 대로, 소망대로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기도는 허황돼서는 안된다. 분명 그 기도는 얼마 가지 않아서 낙심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불편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씀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집 앞의 바위를 매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바위를 밀었다. 8개월이 지났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다. 그래서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보았다. 그런데 바위는 원래있던 위치에서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는 현관에 앉아 지난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씀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시며 말씀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to move the rock)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to push against the rock) 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는 거울로 다가갔다. 곧 그는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깜짝 놀랐다. 거울에 비춰진 남자는 병약한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남자였다. 동시에 이런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지난 8개월 동안 밤마다 하던 기침이 없었구나! 매일 기분이 상쾌했었고, 잠도 잘 잤었지.”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밀었기 때문’에 생겼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요구한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 경험들을 하게 된다. 12절에, 한나는 하나님 앞에 오래 기도했다고 증거한다. 기도하며 낙심하고 포지하지 않고 믿음을 가졌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마노아의 아내가 그랬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았지만, 기도하지 않으니 기회가 왔을 때, 믿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를 보라. 17절에 엘리 제사장이 이렇게 말한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제사장의 말을 기쁘게 믿음으로 받았다. 18절에 이어서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울며 먹지 못하던 한나가 얼굴 있던 근심의 빛이 사라지고 믿음으로 가족에게로 삶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 어떤 변화가 찾아왔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오늘 동일한 은혜와 믿음으로 삶의 자리로 나아가라. 기도하기를 쉬지 말라. 특별히 이 나라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말하야 한다. 선교사님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라.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와 복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전도와 영혼구원에 대한 기도제목도 놓칠 수 없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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