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7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세상 모든 나라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거룩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언제 비가 내릴 종잡을 수 없이 불안정한 일기가 계속 되는 날처럼,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불안정하기만 한 이 때에, 평안과 평강의 닻을 하나님께 내리고자 이 자리를 사모하며 나왔아오니,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주님을 찾고 이름을 부르는 이들마다 크신 은총을 부어주옵소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
사랑의 합력
-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세상 _ 힘의 지배, 죄악의 편만, 욕망에 순응
: 분식집 사장의 죽음, 식당을 하시는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 “잘 되던 식당도 5-6년을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뭔줄 아세요?” ① 상처가 생긴다. ② 오래간다. ③ 치유되기도 전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 ④ 계산을 해보면 장사가 싫어진다.
: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 ① 삶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다. ② 치유받지 않는다. ③ 염려 걱정으로 인간적 생각을 하다보면 안되는 것 같아 보인다. ④ 기도해도 소용없을 것 같다.
: 상처받고, 신음하고, 죄로 고통 _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지고 화살이 박히고 찢겨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고쳐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치유해주셔야 한다.
: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가?
다윗은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하나님이 모욕당하는 것 때문에
다윗은 용기가 있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거룩한 분노와 용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도록 십자가를 담당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중풍병자의 친구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왔다. 사람이 많으니까, 지붕을 뚫고 친구를 달아내려 예수님 만나게 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나 먼저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러다가 큰 언쟁이 발생했고, 욥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다. 이와 비교해보면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친구의 아픔은 이해는 하고 안타까움은 있지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그의 아픔을 공감하고 자기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와야 하는데, 우리는 어떤가?
- 죄사함의 권세 : 다섯 개의 논쟁 중 하나
마가복음 2장에서부터 3장에는 예수님의 권위와 관련된 5개의 논쟁이 있다. ① 죄사함의 권세에 관하여, ②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는 문제에 관하여, ③ 금식에 관하여, ④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은 것에 대하여, ⑤ 안식일에 손마른 사람의 병을 고침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다. 모두 주님의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 준다.
– 주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가 있는 것처럼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혼인 집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다.
–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첫 번째에 관한 것이다.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서기관들이 이 말을 들었다. 불쾌해한다. 주님께서 곧 중심을 아셨다고 증거한다. 불편해하는 마음을 아신 것이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되물으신다.
- 교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
서기관들이 반문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죄가 사해졌다고 하시는 말씀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의 의미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너무 교리적으로 해석하려다 보면 정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을 놓치게 된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니까, 어떤 죄를 지어도 주님께 용서를 빌면 된다고 이해하면 성경을 너무 모르게 되는 것이다.
13절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죄인이란 누구인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하고 있는가? 사실 주님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죄인, 세리 이런 식으로 나누신 것 같지는 않다.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사람들로 여기셨다. 다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편에서 죄인과 세리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테고, 그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적인 이중잣대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 대우받지 못하고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무시 당하면서도 숨 죽여살고 기죽어 살아야 했던 사람들에 더 가깝다. 13절에서 ‘무리들’ 오클로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또 있다. 삶의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 상처받은 이들, 눈물 흘리는 이들, 질병으로 비참해진 이들도 죄인으로 단정하고 정죄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사람 취급을 했고, 그 인과응보로 삶의 고난과 빈곤과 궁핍이 찾아온다고 여겼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의 옆에서 좋은 친구이더니, 나중에는 죄를 실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재앙을 주실 수도 있다고, 위로한답시고 죄인취급 했다. 그래서 욥은 “너희들은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욥16:1) 욥이 질병과 재난을 당했다고 해서 죄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 교리적 해석 넘어 _ 사랑받는 사람
중풍병자도 분명 죄인 취급 당하는 사람 축에 속했다. 그 사람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뜻은 무슨 뜻일까?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던 38년된 병자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지금까지 이런 신세로 있다고 주님께 말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메워서 데리고 왔다. 죄인 취급을 받는 중풍병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에게는 꼭 병이 치료되고 나았으면 하는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사람들이 함부로 손가락질을 하고 수군거리고 비아냥거려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귀한 존재이다.
길이 막히고 사람에게 막혀서 주님을 못 만날 수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데려왔고, 죄인 취급받고 기 한 번 펴지 못해서, 자기에게도 기회한 번 달라고 요청해본적도 해볼 엄두도 안난 사람을 데리고 주님 계신 곳까지 왔다. 단순히 선행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그를 데려온 네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그를 외면하고 사랑하실 수 없고, 인과응보에 따라 갚으시는 분이라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네 사람만 못한 분이신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은혜가 풍성한 분이시다. 어미가 젖먹이를 잊을 수 없음 같이, 집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음 같이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교리적이나 도그마적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복음으로 들린다.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자비의 목소리로 들린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죄인 취급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차원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모습과 광경을 사랑의 눈으로 보아내고 계시다. 이런 의미에서 오인을 받고 낙인이 찍혀 고통당하며 규정당한 삶으로부터 자유하라는 주님의 위로의 말씀으로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말은 옳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선입견과 편견, 규정하고 정죄하면서 죄를 용서한다는 것과 자비의 마음과 긍휼한 마음으로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실 수도 있는 것이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으실 수 없다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 전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복을 누리는 데에는 자격과 율법이 있어야 하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시고 사랑하신다는 은혜가 더 중요하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랑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관점에서 “네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다.
- 사랑의 협력
세상에는 정말 신음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감에 휩싸이고 괴로운 인생들이 많다. 영적으로보면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많다. 편견과 선입견의 시선으로 규정하고 정죄당해야 하는 이들이 아니다. 욕심에 길들여진 눈으로 자신의 이익 여하에 따라 대해도 좋은 사람이 없다. 하나님께서 애타는 마음으로 사랑하시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사랑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닌가? 오늘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면 주님을 어떤 믿음을 보기를 원하실까? 한 영혼을 예외 없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을 바라신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중풍을 앓고 있는 이를 주님께로 인도하기를 바라신다.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신다. 이런 마음과 자세로 사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