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7일
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늘진 구석에 남아 있는 눈덩이가 따뜻한 햇살 앞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때에, 몸과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도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함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12)
모든 만남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신비이다. 특히 결혼을 생각해보면 신비이다.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어떻게 한 사람을 만나 연인이 되고 결혼하게 될까? 아무리 우연이고 악연이라고 해도 긴 시간에서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때도 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의 신비를 보여준다.
35절. 세례 요한이 제자 두 명과 함께 있을 때, 갈릴리에 모습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소개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그중에는 안드레가 있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형제이다. 그가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다. 주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장치 게바(베드로, 반석)가 되리라.” 기대감이었을까? 예수님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될지 알고 계시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결국 베드로와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증언과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는 계기가 됐다.
그런가 하면 빌립은,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실 때 만났다.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마을 사람이었다. “나를 따르라.” 하셨고, 빌립은 마치 찾던 것을 발견이라도 한 듯 나다나엘에게로 달려갔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사람을 만났다.”고, 눈에는 보배를 발견했을 때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편견을 드러냈다.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은 놀랐다. 언제 보고, 자신을 어떻게 알고 이런 말씀을 하실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사실 앞에서부터 의문이었다. 베드로를 맞아들이실 때도 그랬고, 친분이 없는 빌립에게 따르라고 하실 때도 그랬고 나다나엘에 대해서도 그렇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물속은 알 수 없는 법”인데, 주님은 사람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시지도 않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하시면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모으실까?
어쩌면 진작부터 알아보셨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누구나 사람 보는 안목이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안목으로 진실한지 아닌지 판가름 한다. 목소리와 제스쳐가 큰 사람이라고 해서, 자기 피알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말을 다 믿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신뢰를 갖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판단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때로는 오만이 되고 독선이 될 수도 있고 오판할 수도 있다.
조지 오엘이 그의 장편소설 ‘버마 이야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우포킨은 하급치안 판사인데, 굉장히 비열하고 악질 인물이다. 걸림이 되는 사람은 은밀한 모략으로 제거해왔다. 누군가가 자기를 소송하면 거짓증인을 매수해서 소송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 법망을 잘 빠져나갔다. 대신에 철저하게 복수를 해주었다.
의사이자 교도소장인 베라스와미는 교양있는 지성으로서 고급공무원이다. 우포킨은 이 사람을 파멸시려고 한다. 자신의 계획에 걸림이 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찾다가 이렇게 말한다.
“불온성을 걸고 넘어져야겠어.”
하수인이 증거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포킨이 말한다.
“유럽인(일반사람들도 마찬가지)들은 증거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익명의 편지 몇 통이면 놀랄 만한 효과가 나타날 거야. 그것은 얼마만큼 끈질기냐의 문제야. 고소하고 또 고소하고 계속 고소한다, (유럽인들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익명의 편지를 많이 보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야.”
그러면서 바라스와미를 곤경에 빠뜨린다.
악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망있는 사람으로 대우해줬다. 바라스와미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한 의심을 갖는다. 왜 그랬을까? 우포킨과 각을 세웠다가는 보복당할 게 두려워, 차라리 그렇게 대하면서 그 그늘 아래 있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길들여져 갔기 때문이다. 대신에 바라스와미를 의심하고 핍박해야 자신들의 양심이 가책받는 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 색안경과 편견과 선입견, 오만과 독선의 시계창을 열어야 했다.
악당을 좋은 사람으로 믿어버리고 선한 사람을 악당으로 믿어버리는 경향에 대해서 우리와 이 시대는 어떤가? 나다나엘의 편견도 이런 것의 일종이지 않았을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사람들의 작전도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투시력과 천리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래서 시몬에 대해서도 게바라고 하셨던 것이고, 나다나엘에 대해서도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점만 강조해서 생각한다면 결국 제자들의 마음이 지배당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인격적인 만남과 그 신비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결실을 얻기도 전에 관계를 결론 짓고 정해버리기 쉽다.
그릇된 종교인들 중에는 이런 점을 오용해서, 자신에게도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신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지배하려는 사람도 있다. 정말 성경이 요구하고 있고 우리의 결단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언20: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내느니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다지만, 지혜와 명철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준다. 주님은 그와 같은 분이시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마음을 길어내셨다. 사람의 편견과 선입견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셨기에 선한 용기와 믿음을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결단을 이끄시는 분이셨다. 죄인들, 세리들과도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셨다.’, ‘의인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나님께도 돌아온 사람들을 기뻐 맞으셨다. 반기셨다. 주님은 제한을 두신 분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소중한 자녀임을 깨닫고 믿기를 바라셨다. 선입견과 편견의 색안경을 벗어야 또 누군가의 색안경을 벗게 해줄 수 있다.
예수님께서 투시력으로 안드레, 베드로, 나다나엘을 부르신 특정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맑은 눈으로 부르신 일반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애초부터 ‘주님께서 어떻게 알고 베드로나 나다나엘에게 천리안이나 투시력을 가진 분처럼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하는 물음은 우리도 모르게 세상에 길들여진 기준과 자격이 있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자처럼 여겨질지라도, 세상이 또 그렇게 규정할지라도 들의 핀 꽃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렇기에 고백이 더 놀랍다.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도마에게 말씀하셨던 것과 비슷하다.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주님은 도마에게 십자가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의심하던 도마가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여주시며 믿는 자가 되게 하시려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결단하며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고백했을 때 주님은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편견을 넘어서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했다.
‘와서 보라.’ 과연 어디였을까? 무엇이었을까? 의문이 든다. 38절을 보면 처음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주님께 ‘어디’에 계신지 묻는다. 그때 주님께서 “와서 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46에서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예수님 계신 곳에 대해서 ‘와서 보라.’ 말한다.
문자적으로 장소나 위치 혹은 사역지라고 생각하면 요한복음서를 잘 모르고 해석하는 것이다. 요한은 문자주의자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을 정말 오인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들을 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한 밤 중에 찾아왔을 때,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말씀하셨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아까, 두 번 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모르는가? 그런데 니고데모는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답했다. 주님께서 풀어서 설명해주실 때에도 그는 결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되풀이 했다. 문자주의의 갈림길에서 영적으로 믿음으로 주님을 보는 눈이 적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가? 곧바로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 분위기를 짚자, 주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말씀하신다. 여자 역시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주님께서 모든 의미를 자세히 풀어주실 때,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며 전했다.
니고데모는 문자적이해를 넘어 주님의 신비를 깨닫는데 갈등하며 한계를 보였지만 사마리아의 여인은 신비를 깨달았다.
‘어디에 계신지’에 대해 ‘와서 보라.’는 말씀과 증거도 마찬가지다. 39절에서 제자들이 주님께서 계신 데를 보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고 빌립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만났다.’며 ‘와서 보라.’고 전했다.
그곳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드러나는 곳이다. 믿음의 눈이 열리는 곳이다. 예수님 계신 곳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모습이 나타났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이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
중요한 변화가 있다. 예수를 랍비(글을 읽는 독자를 위한 번역)로 부르던 이들이 주님을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한 고백이다.
첫째 아이가 고난이도(高難易度) 고등수학문제를 가지고 와서 풀어달란다. 그러면 쉽게 풀어주는 편이다. 예를 들면 복소수는 여러번 제곱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간단히 치환회는 풀이의 실마리가 나온다. 그러면 은지가 그것을 다른 문제에도 적용해서 쉽게 푼다.
걱정이 생겼다. 성경을 가지고 와서 물어보면 좋으련만, 이성적 사고가 커가고 머리가 커지면서 하나님을 논리와 이성의 눈으로 파악하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신비의 눈을 뜨지 못하고 현학적인 사람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할 때가 생긴다.
어느 날 보니까, 아이가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용하고 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말씀과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빠를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겠다.’고 말할 때도 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장소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경험하고 고백했던 신앙의 신비를 말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란 단순히 나무 그늘 밑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나다나엘의 영적 갈급함을 드러내는 대명사다. 그곳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던 곳인데, 누가 말씀의 완성을 보일 수 있겠는가? 영적 갈급함은 늘 문제로 남는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그것을 채우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현존을 발견했다.
어쩌면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방점은 여기에 있다. 천리안과 투시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과정은 생략돼 있지만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던 이들이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부르고 있다. 아마도 신비로움을 전하기 위한 요한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신비로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과감하게 그 이유를 생략한 채, 호칭에 대한 고백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발견한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영적 갈급함을 채울 수 있었던 신비. 요컨대 그것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말씀하신다.
이것은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닥다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믿음을 지향해왔다. 과연 이것이 환상의 눈으로 보이는 것일까? 영적인 신비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눈이다.
나다나엘에게 약속된 것은 바로 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의 눈을 뜨시라.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 가운데에 임하셔서 역사하고 계심, 살아계심의 증표들이 약속돼있다. 믿음으로 승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