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0일

헤시테그 “정인아 미안해”

  1.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하나님 앞에 초대된 여러분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1. 사진 한 장을 먼저 보시라. 예멘 수도 사라알 사빈 병원에 누워있는 파이드 사밈이라는 7살 소년이다. 7kg밖에 되지 않는다. 영양실조와 뇌성마비로 죽기 직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보기 싫은 장면일지도 모른다.

 

예멘은 2014년부터 내전 중에 있다. 10만명 이상, 목숨을 잃었고, 현재 인구의 80%가 아사(餓死)직전에 있다고 한다.

그나마 사밈은 국제단체의 도움을 받게 됐다. 그의 부모가 검문소와 망가진 도로를 어렵게 지나 170km를 달려왔다. 지금은 상태가 호전되어 회복 중이라고 한다.

 

  1. 마음만 아프지 굳이 비참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천은 주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주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사람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금칠로 아름답게 제작된 작품이나 악세사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라.

 

  1. 인간의 몰골이라고 할 수 없다. 왜 이렇게 됐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고 주신 세상을 이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묻게 된다.

한편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인간의 몰골을 가지고 있을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선물이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측은지심이 아닐까 싶다.

가끔은 측은지심이 정말 선천적인 것인가, 의문을 갖게 만드는 일도 벌어지곤 하는데, 그래도 믿어보고 싶다.

누군가를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 선천적인 마음 때문에, 다툼과 분쟁을 돌이키게 되고, 전쟁을 중단하게 되고, 서로 보살피고 보호하면서 인간다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는 양심의 경보음을 울리게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측은지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흉측한 영혼의 몰골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치장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바꿀게” 챌린지가 진행되고 있다. SNS에는 헤시테그가 붙고 있다.

 

  1. 입양 전과 입양 당시와 입양 후의 정인이의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분노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면 불쌍한 일에 대해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동일하다.

죽기 전날 마지막 모습이 유치원 CCTV에 잡혔다. 이것을 보고 혼자서 오열했다. 한쪽 구석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무감정 상태였고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더 가슴이 타는 듯하게 아프고 슬프다. 교사가 정인이를 품에 안고 음식을 떠넘겨 주려고 했다. 거부했다. 의사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랬을 거라고한다. 정인이가 마지막에 어떻게 느꼈을지 모를 교사의 품이, 정인이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를 대신한 품이라는 것을 알고, 죽어서라도 외롭거나 버려졌다는 마음을 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치인들 중에는 고질병처럼 정쟁에 이용하려는 뻔한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고, 이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고 상술을 부리는 사람도 있어 불쾌하지만, 슬픔에 대해서 진짜 공감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잘 걸러내리라 믿는다.

 

어떤 유튜버들이 정인이를 입양한 이유가 아파트 당첨에 가점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세상이 보여주는 관심사와 가치관이 온통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범죄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경기대 이수정 교수는, 그런 것 같지는 않고, 행복한 모습을 찍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갖는 성향에서 찾았다. ‘남들에게 행복샷’을 보여주고, 칭찬과 인정하는 말을 해주면 만족하다가, 현실에서는 불행한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입양판타지’, ‘남들이 착하다고 칭찬하는 말’, 하지만 실제로는 감당할 수 없었고, (능력이 안돼서가 아니라 너무나 이기적 삶의 방식에 길들여진, 타자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현실은 달랐기 때문에 후회하면서 악마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입양한 부부, 그들의 양가 부모 모두 목사였고,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성장해왔다. 또 신앙 안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마만큼 신앙으로 세워가는 가정으로서 기대했는데, 어쩌면 이들의 신앙도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은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금칠된 십자가의 축복, 번영과 풍요와 남들에게 보이는 행복, 세상이 부여한 행복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따라 즐기려했다.

 

힌놈의 골짜기가 떠올랐다. 힌놈의 골짜기는 이방의 가증한 신과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자녀들을 불살라 몰렉을 섬기기 위한 도벳 사당이 있던 곳이다.

생각해보라. 자녀를 짐승처럼 대하거나 사물화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 근방에 있었다.

 

그 아래에는 토기장이의 밭이 있었다. 흔히 하나님을, 사람을 빚으시는 토기장이에 비유한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에게서 옹기를 사서 깨뜨린다. 그것이 깨지고 나면 다시는 사용할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이 그와 같다. 예레미야는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미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깨진 토기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오늘날에도 힌놈의 골짜기는 교회와 사람들의 중심 매우 근접한 곳에 서있다. 사람을 상품화 사물화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어디 아동학대뿐인가?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전략을 따라 누군가의 삶과 생명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행복샷을 찍기 위해 물질과 번영이라는 우상에게 타자를 불사르고 있다. 예레미야는 힌놈의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로 불리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에 성서일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의 활동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주현절의 의미는 주님이 신적인 모습을 드러내시고 활동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주님의 현존하심을 믿음으로 깨닫고 그 사역에 부르고 계심을 듣는 절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자복하며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지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사회 각계각층에 퍼졌던 일종의 챌린지 같은 성격이었던 것 같다.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며 일어난 부흥운동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진지한 숙고함이나 결단과 각오없이 단순한 챌린지 열풍에 그치거나 유행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유행에 편승해서 위선적인 모습에 가까운 정치적 행동이나 의롭게 보이려는 가식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 같다.

마태는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길가 어귀에서 기도샷으로 인정받으려고 했고 금식샷으로 의를 드러내려고 했다. 그래서 마태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세례요한이 내뱉은 독설을 여과없이 전하고 있다.

누가 역시 마태처럼 형식적이고 말뿐인 회개와 세례에 대해서 요한의 독설을 생략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했던 요한의 외침을 전하고 있다.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 세리들이 부과된 것 외에 더 사리를 챙기지 말 것, 군인들은 강탈하지 말 것, 거짓 고발하지 말 것” 등등이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한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8)

 

그 때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태는 요한이 예수님께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만류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도 아무런 구분 없이 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진정성이 의심이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 대해서, 혹은 구체적인 행동의 결단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 요한은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런 의혹이 없다. 마태는 세례를 주는 요한보다 더 흠결이 없는 분이지만 도덕적 우월성 없이 겸손하신 분으로, 누가는 똑같이 세례를 받지만 (구체적인 삶이 나태내 보여줄) 결과가 입증해주는 것으로, 마가는 오실 이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이 증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마태, 마가, 누가 모두 하늘이 갈라지고, 열렸다고 전한다.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해되지도 않는다. 복음서가 그 신비한 광경을 맹신적으로 전하는데 그치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사고(思考)에서 궁창은 둘로 나뉜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실 때, 물과 물로 나누셔서 땅 아래와 하늘에 두셨다.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엘리사를 통해서 아래 땅의 물을 가르게 하신 것을 기억해보라.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져서 마른 땅과 같이 건넜다. 이스라엘의 현실적인 구원과 약속의 성취와 능력이 나타남을 의미했다. 억압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 광야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은 통해서 하늘을 가르시는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진다. 희망이다.

 

참된 신앙과 믿음은 무엇인가? 일상화된 폭력과 악의 평범성에 물들고 길들여진 채 살아간다. 세상에서는 악이 승리하며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일상화된 절망을 가지고 살기 일쑤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학대와 차별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거짓과 이간질은 끊임없이 평화를 위협하고 정의와 공평을 무너뜨린다. 자기 의와 만족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불사르며 숨통을 조이는 짓은, 예루살렘 근방 도벳 사당처럼 우리 삶의 근방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길들여지고 있다. 선에 대해 무력감을 갖는다.

그런데 참된 신앙은 하늘이 열리는 믿음에 눈을 뜨는 것이다. 세상이 그래도 소망을 갖고, 미약한 일이라도 실천할 줄 알며, 선에 대한 믿음과 긍지를 가지고 해야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눈을 열어주심을 믿고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 위에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동할 수도 있다.

복음서가 하늘이 갈라졌다는 증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바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단순한 챌린지나 유행하는 열풍에 우리의 도덕성을 맡기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행동 없는 자기기만에 빠져서, 한편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무기력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11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것 역시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 문자적인 이해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도그마와 교리를 만들어 믿게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를 숙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 잘 믿는다는 인증샷을 남들에게 보이려는 신앙만 가졌을 뿐, 번영과 성공의 복에 취해,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로서의 정체성은 버린채, 세상을 힌놈의 골짜기로 만드는 데 일조하거나 방관하거나 외면해 버렸다.

유대인들이 즐겨 부르곤 하는 찬양이 있었다. 시편 2편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다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7절은 이 곡의 하이라이트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세상의 군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헛된 일들을 꾸민다. 세상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길 바라며 권력을 행사한다. 관원들이 그 일들 꾀한다. 재판관들과 고관들이 동조한다. 그렇게 세상이 길들여지길 바란다. 그러나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떨면서도 즐거워한다.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는 주님은 세상의 군왕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분이시라는 것을 복음서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있다. 변화산에서 똑같은 음성이 들렸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9:7)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들을 수 있다. 병자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 혐오대상자들, 차별과 냉대를 받는 이들, 외면받고 거절당한 이들, 미움을 받고 돌에 처맞아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Pax Romana의 시대지표에 척박하고 힘들게 살아갔던 무리들,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며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쫓아 주셨다. 이들 곁에 있을 용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의 용기를 가진 자이며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능력도 가진 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들으셨기 때문일까? 복음서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주님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똑 같이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처럼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정인아, 미안해. 우리가 바꿀게” 챌린지를 벌이고 SNS에 헤시테그를 붙이고 있다. 다시는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각성일 것이다. 잠시 부는 바람이 아니라 정말 이 사회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 됐으면 좋겠다. 더 밝아지고 더 나아진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생명의 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생명보호와 보살핌의 분위기와 여건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파이드 사밈이라는 7살 소년의 비참한 모습이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고 평화를 열망하는 바람이 불기를 바란다. 예멘에 평화가 찾아오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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