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3일
시간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신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희망을 가득 안고 새해의 첫 단추를 채우는 신년주일에,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로 새롭게 다짐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새날이 밝았다. 2021년의 첫주일 예배이다. 처음 것을 기뻐 받으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이 방송으로 예배하는 모든 교우들과 또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매년 수많은 인파가 해돋이 명소에 모여든다. 새해 처음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한해의 소원을 기원하고 자신과의 어떤 약속을 세우기도 한다. 그 순간을 잊지 않고자 핸드폰에 사진을 담고, 방송 매체들은 붉은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고성능 카메라에 담아 중계하곤 했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고 한다. 일단 해돋이 명소를 폐쇄한 영향도 있었고, 캠페인의 영향이기도 하다. 시민들 스스로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간혹 해안도로변에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해돋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맞이했다고 한다. 영상으로나마 그 순간을 시청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로나 3차 대유행에 정신 못차린다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피곤을 무릅쓰면서 해돋이를 지켜보려는 것은, 그마만큼 살면서 느꼈던, 고통과 압박과 우울감을 밀어내고, 희망의 밝은 태양이 마음 속에도 떠오르기를 바라는 것이겠다. ‘다시 힘과 용기를 내자’고 저마다 마음속에 다짐했을 것이다. 새로운 각오와 계획도 세웠을 것이다. 2021년에는 보다 많은 소원을 성취시키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새해 첫 주일 예배를 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참생명과 능력을 공급받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구한다. 이런 신앙적인 다짐이 있기를 바란다.
2021년 우리교회의 표어는 “주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정했다. 작년 한 해, 코로나19라는 엄청난 상황을 겪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일인가, 늘 그래야 하지만 그 소중한 믿음의 체험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정(家庭)에, 교회에 맡겨주신 사명을, 혹은 삶의 몫을 잘 감당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기를 바란다.
창립년도부터 10년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앞으로의 10년은 선교의 초석을 놓기 시작하고, 이제 앞으로 전도하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든 일에 주 안에서 감당해야 한다. 버거워서 억지로 하거나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기쁘고 감사하게 말이다. 그래서 기본과 근본을 다시 세우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정했다.
요한복음14:8에서 빌립은 주님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구한다.
하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까? 없다. 빌립이 이 사실을 모르고 주님께 말한 것일까?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다고 인식하고 알고 있고 믿고 있다. 출애굽기19:12은 하나님의 경계를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시각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우상이다. 그 시각화하려는 의도자체는 하나님을 자기가 컨트롤하겠다는 욕망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 우상은 하나님을 시각화하려는 욕망일 뿐 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게 된다는 예화들은 우상인 경우가 많다.
미국의 대부호 록펠로우에 대한 예화를 목사님들이 설교에 많이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시작해서 세계적으로 이어진 대공항은 그의 독점과 인수합병으로 빚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주님께 드리는 빌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영혼이 곤(困)하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를 때, 확신만 있으면 그 길이 어떤 길이든, 힘들고 고된 길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 유명한 모세도 이랬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리고 그 비난을 모세에게 돌렸다. 그의 심령도 상처를 받고 지쳤을까? 그도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한다. 물론 허락되지 않았다.
살면서, 우리의 영혼이 곤할 때, 괴롭고 힘들 때, 우리의 믿음을 분명히 해줄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상황과 이유들이 생기는가? 하나님만 확실히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족하겠다는 심정은 빌립의 심정과도 같다. 하나님을 분명히 보게 된다면, 나의 기쁨, 나의 유익, 나의 자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참고 인내하며 어려운 일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해 때로는 의심하고 흔들리고 갈등하며 시험에 든다. 하나님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만은 그렇지 않다.
모세가 계속적으로 요구하자, 허락된 것이 있다. 하나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출33:23)
우리 인생에서 수많은 환난과 고난과 어려움이 불길처럼 지나간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셨음을 알게 되는 정도이다. 오히려 우리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던 풀무불 같은 고난의 불길 중에 하나님께서 손으로 덮으셨다가 거두신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란다. 주님 안에서 발견하시기 바란다.
주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신다. 9절,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분은 24시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작은 운동을 일으키시는 분도 있다.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영적 우월감이나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누군가를 정죄하고 배타적이 된다면 그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주님이심을) 지각하게 하신다(요일5:20). 그리고 우리의 영과 친히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신다(롬8:16).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누군가를 보살피고 아끼고 귀하게 여기도록 한다. 함부로 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외면하게 하지 않는다. 찢어진 것을 싸매시고 상한 데를 고치신다. 성령충만해졌다고 하면서 우월감을 갖고 분열을 일으키고 갈등을 만들고 차별을 일삼고, 더럽다고 혐오를 조장한다면, 그것은 성령충만함을 받은 것 아니다. 오히려 성령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일이다.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 같을 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14:26은 그 성령을 “보혜사”라 이름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가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죄인과 원수까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고,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고, 찾아가고, 따뜻하고, 자비를 베풀고, 더러운 것을 정화하고…. 이게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다. 야곱은 화해에 응하는 에서의 모습에서 “형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다.”고 했다.
주님께서 빌립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이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상
예전에 무한도전에서 어머니의 음식을 30년간 타향살이를 하는 아들에게 배달하는 것을 방영한 적이 있다. 아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영상)
만두는 단순한 별미가 아니었다. 어머니였다. 만둣국 안에 어머니가 있었고, 시절이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의 맛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격, 마음, 생각, 뜻, 나라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주님 안에 거하려면, 거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 연약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4절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하반절에는 “스스로 열매맺을 수 없음 같다.”, 5절에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하셨다.
연약함은 생명을 주는 힘(life giving power)을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것이 은혜이고 은총이다. 번영과 성공이 은혜의 증거나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주님 안에 있을 때, 약할 때 강함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다. 부족하지만 채우시는 은혜가 주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임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과 은혜 충만함을 알게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것을 말한다. 세상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욕망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은 주님을 떠나서는 쉽게 할 수 없다. 욕심이 가로막고, 유혹이 붙잡는다. 염려, 근심, 걱정이 우리의 눈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기 시작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고 담대함이 생겨나며 영적인 집중력이 생긴다. 영적인 집중력이란 다른 게 아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도 같다. 올해에는 그 능력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축원한다.
두 번째는 믿음으로 바라게 된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셨다. 히브리서11:1-2은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주님 안에 거하게 되면 보여서 믿게 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 안에서 갖는 믿음, 그것은 소망이다. 아시는가? 소망도 생명이라는 것을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사역을 하다가 소아시아에서 당했던 소회를 전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8-10)
세 번째는 사랑이 삶의 신비이자 하나님의 비밀의 열쇠임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진짜 생명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음식이 아니다.
8절에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열매는 인간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다. 사랑의 결실을 말하는 것이다. 9절 이하는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며 말씀하고 있다. 12절을 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일서에서도 곳곳에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4:12),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