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뜻 깊은 성탄절 및 송년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빗장을 잠그고 들어가는 집 주인처럼 한 해가 마무리 지어지는 날에, 한량없는 은혜로 일으켜 주시고 감싸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욱 더 충성하기로 결단하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의 마음 중심을 기뻐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만일 하나님이 그로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요13:32)

 

오늘은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이자, 2020년의 마지막 주일예배이다.

저는 이번 성탄에 우리 교우들과 케이크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각 가정에서 케이크에 초를 켜고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서는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을 인증샷으로 올려주신 분들도 있다.

올 한해 참 고생하시고 수고하셨는데, 뭐라 위로하고 격려할지 모르던 차에, 조금이나마 행복한 순간이 되셨기를 바랐다.

 

올해 3분의 1내지는 절반을 온라인 예배로 드리면서, 서로가 잊혀지지 않을까,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보낸 것 같다. 그러나 새벽 제단의 불은 늘 켜져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가? 여러분 한 명 한 명, 심지어 새로 태어난 도율이와 라온이까지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하시고 힘을 내시길 바란다.

 

코로나19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래도 모두가 무탈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게 돼서 참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

 

2020년에 세상에 일어난 일들을 키워드로 몇 개 살펴보자. ① 코로나19 바이러스.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힘들게 했다. 예비부부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고, 모든 국민이 조마조마해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멈춤에서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을지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② 부동산 문제. 전세나 임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4년을 보장받을 수 있고, 상가임대료도 무턱대고 오를 일이 없으니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전세값이 올라서 당장 이사할 집을 찾기가 어렵고, 집값이 올라서 내집 마련의 꿈이 꺾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③ 의료대란.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은 노심초사 했을 까? 특별히 이와 관련한 의대생들의 재시험문제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국민의 건강을 책임질 의사들이 될 사람들인데 다른 국가시험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공정을 위해서라도 원리원칙대로 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④ 검찰과 법무부의 갈등. 결과야 어떻든 결국 뿌리 깊은 카르텔을 드러냈다. 어떤 사람들은 삼권분립차원에서 정부가 사법기관을 관여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막강한 권력과 특권을 가지고 온갖 비행을 저질러온 검찰을 개혁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⑤ 인천의 두 형제 사건, 방배동 모자 사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학대와 무관심에 고립된 우리의 이웃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N번방 사건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각종 가짜뉴스와 거짓말이 난무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장마가 길어 비 피해와 강력한 태풍으로, 수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고 농민들과 어민들이 많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디에 서 있느냐, 어떤 입장에 있느냐, 어떤 마음의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평가와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 편안한 자리에서 남의 사정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이 교회들 때문에 식당 장사가 안된다고 교회를 원망하고 조롱하는 글을 봤다. 사실 교회보다 코로나19에 더 위험한 곳이 식당이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불완전하고 연약하다. 수많은 모순을 가진 죄인일 수밖에 없다.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모순을 가졌으면서도 완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공평(미쉬팟), 정의(체다카), 자비(헤세드)를 찾기 힘들었다. 욕심, 거짓, 탐욕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와 걱정거리를 이용해서 쓸데없는 경쟁을 부추겨 그 이익을 챙겨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여름 긴 장마에 농산물피해를 당하자, 사람들은 심지어 자연까지도 야속하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이제 기후문제는 인간이 파괴한 자연으로 인해 앞으로 더 극심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사회와 세상도 사실 죄인된 인간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일들이라면 사회환경은 어떻게 변할까, 의문이다.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이하는 기점에 있다. 올해의 힘들었던 것, 안 좋았던 기억, 괴로움은 다 떨쳐버리고, 새해에는 정말 모든 게 새롭고 회복되고 더 나아지기를 희망한다. 행복한 새해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나은 세계 혹은 세상, 삶이란 게 있는 것일까? 죄와 악은 세상에 더 깊어지고 사람들은 무정해지며 비인간화돼가고 있다. 악이 세상을 지배하고, 어둠이 세계를 덮고 있는데, 빛 되신 주님, 선하신 주님은 역사하시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만들어낸 자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정짓기도 한다.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하박국선지자는 이렇게 묻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1:13)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대답하신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게 명백히 새기라. 정한 때가 있다.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응하리라.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하신다. 주님을 믿다가 실족하는 일이 생긴 사람들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랑이 더디 오거나, 바라던 일이 멀어지고, 세상은 꿈쩍도 안하고, 여전히 변함없는 현실에 이런 마음을 갖기 쉽다.

 

옥에 갇힌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은 세상이 좋아지고, 아니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사역했던 활동가였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선포했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시대를 호통치기도 했다.

 

이랬던 그도 감옥에서 손발이 묶이고, 사람들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는커녕, 점점 로마의 세속화에 적응하고, 세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캄캄해지는 것에 실망하고 낙심이 들었다. 예수라면 뭔가 세상을 바꾸실 수 있다고 기대했다. 2019년이 지나고 2020년을 맞으면서 뭔가 좋은 변화가 오길 바라면서,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했다. 21년을 맞아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 반신반의하면다행이다.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더 메마르고 무정해지고 각박해진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이런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다. 그런데 요한이 몰라서 말씀하시는 것일까? 아니다. 요한도 모르지 않는다.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기대됐다.

그런데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묻는다. “예수님이 오기로 하신 분”이신지, 아닌지 말이다. 주님의 사역들을 보고들으면서도, 세례 요한은 왜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하시는가?

세상이 먼저 바뀌길 기대했기 때문이 아닐까? 종교, 사회, 문화, 현실의 환경에 변화가 오기를 갈망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한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들이 있다. 특히 빛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고 전하고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고 이어서 말씀한다.

 

이스라엘 절기 중에는 수전절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하누카 ‘닦다’, ‘고치다’의 의미를 가진 수(修), ‘대궐’이라는 뜻을 가진 전(殿)으로 번역했다. 요한복음10: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한복음에서 딱 한 번 언급된다. 유대인의 달력이기 때문에, 태양력으로 어떤 한 날을 특정할 수 없다. 대략 이맘때다.

 

간단히 말하자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유린하고 유대인들이 역겨워하는 돼지머리를 제단위에 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교도의 상징물들을 설치했다. 사제가문의 후손인 마타티아스가 게릴라 운동의 지도자가 됐다. 숫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게릴라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지휘권을 계승했다. 워낙 작전 실력이 뛰어나서 망치라는 뜻을 가진 마카비우스로 불렸다.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결국 비교도 안되는 군사력을 가졌지만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서 퇴각하고 말았다.

마카비는 지성소에서 가증스러운 것을 제거하고, 유대 상징들을 다시 세웠다. 새롭게 복원된 성전을 위해서 예배를 드렸다.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예배하면서 축하하는 동안, 메노라(여덟갈래촛대)의 불빛이, 그 8일 낮과 밤 동안 기름을 보충할 필요도 없이 기적처럼 타올랐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빛이 성전에 돌아왔다고 외쳤다. 그 후 매년 ‘빛의 축제’를 지키게 됐다.

사람들은 빛이 성전에 돌아온 순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예컨대 제 2성전이 지어졌을 때, 하나님의 빛인 ‘셰키나’가 성전으로 돌아왔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빛 ‘셰키나’가 성전에 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 성막 안에 하나님의 빛 ‘셰키나’가 현존했다.

마카비왕조는 한 세기만에 막을 내렸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말이다.

 

세례 요한이 기다리고 바랐던 것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세상이 바뀌는 것, 세상이 변하는 것, 하나님의 참빛이 이스라엘에 돌아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실 분이신지,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은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맹인들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이 바뀌고 변화된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게 아니다. 자유함을 얻는 것도 아니다. 광야를 지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곧바로 옮겨 놓으면 어땠으리라 생각되는가? 사람들은 또다시 그 세계에 젖어들 게 뻔하다.

주님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생명을 주셨다.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소망을 주시며 희망을 주셨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이지만, 이 예배를 드리고 삶의 자리로 나아갔을 때,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괴롭히는 일들이 가득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얼마든지 세상과 우리의 삶의 자리를 행복하고 복된 자리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 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이 위대하고 큰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참 빛이신 예수님,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면 극히 작은 자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큰 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에 밀렸다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며, 열등감을 갖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용기를 얻고 힘과 능력을 얻어 다른 방식의 승리를 살아낸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도 보람있고 의미있고 값진 일이 아닌가?

큰 상처와 아픔을 당한 사람, 심지어 쉽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당한 사람이 십자가까지 용납하며 고통당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상처받은 자의 치유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 아닌가?

삶의 위기를 맞고 휘청이며 위태롭던 사람이 믿음의 반석위에 든든하게 서서 누군가의 버팀목이 돼주고 희망이 돼준다면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의도는 바로 이런 것이다.

 

어느 유명한 여행전문 유튜버가 최근에 제주도를 방문해서 50만원이던 땅이 2천 만원 돼서 갑부가 된 사람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유하게 살면 좋은 점이 뭐냐고 물었다.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며, 그의 행복은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치 불행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갑자기 기회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찾아올 때가 있는데, 그때 잘 잡는 사람이 능력자라는 식의 말을 했다. 유튜버가 역시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일을 좋아하고 성실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게으르고 불성실한가? 소박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모두 불행한가? 사람의 크고 작음, 행복의 크고 작음을 성공의 잣대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

이런 기준으로 행복을 말하는 게 이 어디 이뿐인가? 특권의식을 가진 부류에 들어야 하고,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투자의 덕을 봐야 하고, 막강한 권력을 가지면 가질수록 좋다고 말한다. 세상은 사람들을 이런 가치관으로 길들여 놓는다. 그리고 행복의 자격을 논한다.

 

2020년을 어렵게 매듭지어야 하고, 2021년도 어렵게 열어야 한다. 연도만 바뀌는 것일 뿐 우리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코로나19, 부동산문제, 권력싸움, 기득권과 특권을 지키기 위한 밥그릇 싸움은 2021에도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참 빛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비추시는 빛을 받아, 우리 모두 각자각자가 하나님의 돌아온 빛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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