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리는 정말 신나고 즐거운 마음, 큰 기대와 기쁨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힘겹게 지나고 있다. 백신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효과를 보고 정상화되기까지 얼마나 더 지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변종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염려가 크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잃고, 가족을 잃고, 고립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의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무척 예민해졌고, 남을 돌아볼 여유가 많이 사라졌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크리스마스크’로 들릴 지경이다.

 

서울 이수역 앞에 한 남자가 모금함을 두고 앉아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라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다. 늦은 밤까지 그는 앉아 있었다. 석 달이 지나는 동안 그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성이 남성 주위를 서성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고 곁에 머물러줬다. 구걸하던 사람은 35세 발당 장애인이었고 여성은 민간 사회복지사였다.

세간에 알려진 방배동 모자의 비극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복지사가 눈여겨 본 것은,

 

“우리 엄마는 5월 3일에 돌아가셨어요. 도와주세요.”

 

삐뚤빼뚤하게 쓴 글씨였다.

 

막상 이 남성은 처음에 여성분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고기잡이 배에 팔려가게 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여성 분이 한 달을 넘게 남성을 찾아갔고, 이야기의 전말을 듣게 됐다. 그리고 미디어는 ‘충격’이라고 전한다. 마치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몰랐다가 비밀이 밝혀진 것 때문에 놀랐다는 태도다. 사실 충격은 무심히 지나친 사람들의 무관심 아니었나? 그는 벌써 3개월 간을 도와달라고 싸인을 보냈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데 인색하고, 궂은 일을 외면했던 우리 시대의 양심에 물타기 하며 심리적 부담을 덜려는 표현은 아닐까?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은 성냥의 온기로라도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밤새 켜다가 동난 성냥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심함 때문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이슈화하고 정치화하려는 기사들을 보면서 인간의 타락의 끝은 어디인가, 생각하게 된다. 타락한 존재의 끝판왕은 남을 해치는 악귀가 아니라 어쩌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의 본성이 이런 슬픈 사건 앞에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게 만드는 대목이다.

 

남성의 어머니는 핸드폰 글자를 읽다가 쓰러지고 숨을 이상하게 쉬시다가 다음 날에는 숨을 쉬지 않고, 파리가 날라들었으며, 애벌레들이 어머니의 몸에서 나와 자기방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추우실까봐 이불로 덮어 테이프로 붙여놨다.

 

세상 사람들은 성탄절이 분위기 좋은 장소, 행복한 순간, 낭만적 분위기를 함께 보낼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성탄은 힘든 세상과 어두운 현실에 대해서 의미있게 보내야 하는 때이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성탄트리 위에 놓인 큰 별’, ‘낙타를 타고 걷는 동방박사’, ‘목자들의 경배’ 이쁜 크리스마스장식이 상점을 채우고 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이런 이쁜 장식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

 

첫 성탄의 자리는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외쳐대는 그저 기쁘기만 한 자리가 아니었다. 기원전 37년,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왕권을 받고 귀국한 헤롯은, 그의 정권을 견고히 하기 위하여 정적들을 무차별하게 억압하였다. 심지어는 자기 장모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까지도 정권유지를 위하여 서슴지 않고 죽였다. 그는 집권하는 동안 숱한 피를 흘렸고, 너무나 많은 정적을 만들었다. 동방의 점성가들(동방박사)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헤롯은, 정적이 또 하나 나타났다고 생각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또래와 그 아래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했다. 폭정을 일삼고 정권욕에 불타던 헤롯이 죄 없는 어린아이들마저 무참하게 학살하는 현장이, 바로 아기 예수가 태어난 자리라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칼날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난 갈 수밖에 없는 피난민의 상황이, 바로 아기 예수의 현실이었다. 이렇듯이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첫 성탄의 자리는 정치 권력에 의해서 만삭의 몸으로 난민 같이 떠도는, 나그네 신세가 되어야 했던, 지극히 현실적인 자리요, 인간사회에서 소외된 마구간과 같은 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어둠에 뒤덮이고 불의가 기승을 부릴 때, 더 이상 빛과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셨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분은 ‘빛’으로 오셨고, 절망과 좌절 속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오셨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새로운 ‘생명의 원천’으로 오신 그분의 선택은 바로 ‘인간의 참길’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나심은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사건이었을까? 동방박사들의 별은 남들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큰 별이었을까? 천사들의 노래는 거리에서 용량 큰 스피커에서 울리는 듯한 소리였을까?

아기 예수님의 나심을 헤롯과 관원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소동만 일어났다. 어둠에 잠긴 예루살렘 도시는 그 별을 발견하지 못했다.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은 천사들의 찬송을 듣지 못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 빛나는 별빛을 큰 소망으로 주목하며 그 빛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에게 크고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한 밤을 외로이 지키며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며 졸지 않고 불렀던 노래를 가진 사람에게 천사의 찬송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나는 천사의 노래와 동방박사들이 본 별빛과 베들레헴 구유에 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있는가?

 

인터넷 SNS에 많은 목사님들이 새해의 다짐을 올리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의 다짐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목회자가 되게 하소서.”라는 주제들이다. 은혜로운 목자상을 소망으로 말한다.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새로운 다짐과 각오는 물론 중요하니까 말이다. 복지사가 쏘아올린 공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데 왠지 불편해지는 대목이 있다. 겸손한 듯하나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생각하고 있는 대목에서 그렇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에 놓이게 만드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기도와 거룩한 길을 걷는다는 명분으로, 궂은 일을 피하고, 이중직을 가져야만 하는 목회자들을 함부로 폄훼하고, 그는 세속에 물들어 거룩하지 않다는 스스로의 낙인을 찍는다. 목회자의 거룩성이 오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차별과 그 폭력성의 양면을 잊은 채, 말이다.

거룩한 성도가 되시라. 그것은 세상을 정죄하고 경건의 모양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낮은 곳, 소외된 곳, 사람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곳까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이다. 성탄을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일명 방배동 모자 사건, 참 안타깝고 부끄럽다. 만약 나였다고 해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절망과 극심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과 상관없이 그냥 지나쳤던 사람들과 말이다.

나는 민간 사회복지사를 통해서, 인간이 악마가 될 수도 있지만 천사가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배운다. 누구보다도 거룩한 사람, 성탄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이 아닐까?

 

제 2차 이라크 전쟁 동안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전사한 미국 병사의 유해를 담은 관을 찍은 사진, 자녀를 잃고 우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진을 TV에서 보여주는 것을 불허했다고 한다. 왜일까? 그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의 결과를 볼 수 없으면,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행에 빠지거나 비참한 생활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외면하기 일쑤이다. 왜일까? 마찬가지 이유가 있다. 그 비참한 실상을 보지 않으면, 양심의 고동이 울리지 않는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테이프로 붙여놓은 이불로 덮인 노모의 시신, 서로 상반된 듯하지만 인간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복지사의 일화는 ‘생명에 대한’ 양심의 고동이 울리도록 부르는 천사의 노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럽 어느 마을에 전해지는 민담이다. 그 마을 교회에는 줄이 없는 종탑이 있었다. 그런데 이 종탑에 달린 종은 성탄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값진 선물을 드린다면 스스로 울린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기 위해 교회를 찾아와 수많은 선물을 놓고 갔다. 부자와 귀족들이 찾아와 진귀한 보물과 금화를 내놓았다. 마침내 소문을 들은 왕도 자신의 왕관까지도 내어놓았다. 그럼에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며 몇 년이 지나도 종이 울리지 않자 사람들은 종과 관련된 전설은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왕의 권력보다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줄이 없는 종탑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갈 즈음 성탄절에 온 마을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종탑으로 달려가 어떤 선물이 놓여있는지 확인했다. 종탑 밑에는 동전 한 닢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전 한 닢은 가난한 농부가 성탄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로 오다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바람에 예배시간이 늦어 드리지 못한 성탄 헌금을 종탑 밑에 두고 간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그 어떤 선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셨는가? 받으신 분도, 또 특별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 오늘이 가기 전에 마음이 빚진 사람처럼 작은 선행을 하나씩 행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를 지나며 맞는 성탄, 무관심, 예민해진 때, 낮은 곳, 누추한 곳, 우리는 생명의 보살핌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거기서 소중한 생명을 돌보며 정말 환하고 밝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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