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강림절 둘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삼라만상이 겨울 추위로 오그라드는 때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사랑의 온기로 차디찬 저희의 마음을 녹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 대림절 둘째 주일의 초대

대림절 둘째 주일에, 주님 앞에 선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하고 계시다. 힘내라. 용기내라. 주님은 우리가 믿음의 반석 위에 서길 원하신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향해 서시기 바란다.

 

만약 누군가가 울면서 고민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면 시민들은 어떤 반응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이따가 두 편의 실험영상을 볼 것이다.

 

  1. 고통

모두가 힘들고 어렵다. 걱정과 염려가 크다. 불안과 두려움의 고통을 겪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안쓰럽다. 큰 슬픔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텐데, 마음이 먹먹하다. 밤은 길어지고 날씨는 더 추워지며 가슴이 시린 일도 있다.

동네 골목 식당, 주점, 호프집 9시도 안 됐는데, 불이 꺼져 있다. 평소 같으면 장사하느라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을 텐데 말이다. 손님이 많아서가 아니라 영업을 해야 마음의 의지가 돼서 살 수 있을 텐데, 9시 이전에 문을 닫아야 한다. 캄캄한 절망을 눈물로 견뎌야 하는 소상인들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임대료 내는 날은 어김없이 다가올 테고…, 이번 겨울은 참 혹독하다.

 

  1. 십자가

주님은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과 함께 하신다. 십자가 사건은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연대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가족, 자녀, 부모, 부부간의 불화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다.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을 당하고, 괴롭힘과 학대와 핍박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문제로 고통을 당한다. 고통 없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아니면 회피하려 들기 십상이다. 외면하거나 직접 관여하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아니 함께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혹은 왜 나와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에 관여해야하는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런데 주님은 굳이 우리의 고통과 연결될 필요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연결되려고 하셨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우리 죄를 위해 고통 당하셨다는 고백은 바로 이런 설명을 대신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 슬픔, 눈물, 죽음, 멸망으로부터 건지시기를 바라시기에,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다.

 

히브리서2:18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고통과 연대하신다.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절망에 빠진 이를 위로하며 용기를 얻기를 바라신다.

 

  1. 마굿간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다. 가장 낮은 곳에 우리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이 오셨다. 사람들은 위로만 향하려고 한다. 세상적인 힘을 우상화하고 교만해진다. 상향욕구로 남의 고통은 외면한다. 그런데 주님은 낮은 곳에 오셨다. 위로만 향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굉장히 역설적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고집과 욕심이라는 이기심으로 살아간다. 이기심은 자기의 유익, 자기의 나라, 자기의 의, 자기의 행복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나눔, 헌신,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요청하신다. 그것이 참으로 우리 모두를 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길 바란다.

 

  1. 구유

저는 요셉과 마리아가 방을 구하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출산을 하고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누인 모습에서 외면당한 현실, 무관심과 무정한 현실 속에 태어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에 ‘호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시대와 맞지 않다. 또 예수님께서 태어날 무렵 중동지역을 비롯한 로마의 관할지역에서 대대적으로 호적사업이 벌어진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호적해야한다’는 것은 정책의 방향일 뿐이다. 그것을 시행하는 것은 각 지역에 세운 총독의 재량권에 달렸다.

행정력이 미치는 곳은 그렇게 하지만 모든 일을 법대로 사람이 만들고 정한 원리원칙대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는 공간도 있는 것이다. 치외법권도 있어야 하고 도피소도 있어야 한다.

 

요셉 혼자 다녀올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애굽에서는, 여자들은 호적을 하지 않아도 됐다. 남자들만 다녀오면 됐다. 그런데 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마리아를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해야했을까? 유다에서는 여자들도 호적을 하게 했다는 말이다. 호적을 하게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인구세를 받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총독은 누구인가? 2절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가 언급되고 있다. 구레뇨는 수리아 지역의 총독인데 유대와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일까? 병합이다.

이 호적에 관한 행정을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을 때 처음 한 것이라.”는 설명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호적법이란 세금을 거두기 위한 로마의 정책방향이었다. 일시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총독이 판단해서 원활하게 세금을 거두고, 무엇보다 총독이 정말 해야할 일은,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로마제국 전역에 인구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구레뇨가 수리아에 부임한 뒤에, 특정지역에 이 법을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을 황제에게 귀속시킴으로 성과와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집트와는 달리 여자들까지 조사해서 세금을 받으려 했다. 그래서 악명높은 인구조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소설을 보면 6.25동란 때를 기억하게 해준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라디오 방송으로 하는 말만 믿고 있다가, 한강다리가 끊기고 결국에는 피난을 가지 못 했다. 나중에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만 믿고 가만이 있으라던, 서울을 버리고 먼저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그러더니 빨갱이들과 내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피난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즉결처분으로 죽이거나 ‘왜 피난을 가지 않았는지’ 고문과 심문이 이어졌다. 동네 반장이 인정하는 시민증을 발급받지 못하면 통행할 수도 없고, 생존할 수도 없었는데, 동네 반장에게 밉보이던 사람들은 희생양이 되곤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 사람들 간의 평화, 세상의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국가, 제국의 평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이면 혹은 민낯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정책, 풍조, 유행하는 것들을 영적으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영혼을 서로 미워하고 멀어지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닌지? 서로 욕심과 이기심과 죄성을 부추김으로 개인의 행복이 타인의 불행을 만드는 것인지, 아닌지?

 

이 사회의 선택적 정의, 선택적 평등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여관을 찾을 곳이 없어서 구유에 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준비성과 계획성이 많은 사람들은 왜 빨리 서두르지 못해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보호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 어느 때,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숙박업소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숙박업소라고 해도 아기를 받기란 쉽지 않다. 여관을 뜻하는 말은 카타루마(καταλυμα)인데, 손님방(사랑방) 같은 것을 의미한다. 요셉과 마리아가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아기가 거절당했다.’

생각해보라. 해산할 때가 된 사람에게 처소를 제공하고 출산을 돕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이다. 실험카메라가 있다. 영상을 보자. (실직한 직장인)

 

자기 코가 석 자인데,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다. 남의 아픔, 슬픔, 고통에 관여는 물론이거니와 들어주기 조차 어렵다.

 

여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빈방이 없었다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어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 형편, 여건이 되지 않는 풍토, 사회, 환경,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7절, “구유에 뉘인 아기”, 베들레헴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상상해보자. 틀림없이 한 지붕 밑에 방 한 칸짜리 본채와 마구간이 함께 있는 가정이다. 사실상 거실과 방과 주방이 구분되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끓이고 여러 가지 출산을 돕는 무명의 사람들의 손길이 소박하지만 고마운 자리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이 태어났다. 하나님은 누추하고 허름한 곳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사람들이 때로는 불결하게 여기고, 선입견과 편견을 갖지만, 하나님은 평화의 꽃, 희망의 꽃이 피어나게 하신다.

 

(또 다른 영상)

 

고민을 들어주고,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이것만으로도 용기와 힘이 된다. 이것이 오늘날 구유가 아니고 무엇일까? 연약하고 가장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생명싸개와 같은 위로와 관심의 강보로 감싸 눕히는 돌봄 말이다.

 

사람들이 외면한 곳에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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