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셋째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된 성탄목과 거리마다 울려퍼지는 캐롤이 성탄절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 안에서 심신의 안위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살후2:15)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코로나와 그로 인한 세상이 동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어둠이 길고 낮은 짧다. 대림절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의 주의 부르심이다. 사실 엄격히 말하자면 탄생일을 누구도 특정할 수 없다. 기록에 남겨진 것이 없다. 이단들은 이점을 악용하여 교회를 흔들어 왔다. 그러나 탄생일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대림절은 동지를 향해 가는 세상에 대해 믿음으로 소망의 주를 기다리는 것이다. 곧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이 동터오며, 깊어가던 차디찬 밤이 서서히 물러갈 것이다. 여러분 힘들도 어렵지만 지혜로운 열 처녀처럼 믿음으로 잘 인내하며 견디시기 바란다.

 

  1. 위선과 검은 의도

세상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동정녀탄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한다.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진실로 믿고 시인하며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신과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신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프라하의 봄을 맞았던 체코는 소련의 침공으로 다시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됐다. 타국으로 망명을 하거나 이민갔던 사람들이 있다. 비밀경찰들이 대중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도청했다. 그리고 그 사생활을 라디오방송으로 내보냈다. 싱거운 수다를 비롯하여 소련 점령 치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욕설이 담겨있었다.

 

청취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방송은 이민 간 사람끼리 서로를 비열하다고 비난하는 대목을 특히 강조했다. 분명 비밀경찰들이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악의적으로 편집한 내용을 내보는 것이었는데도, 청취자들은 방송에서 나오는 부분만 믿고 판단했다. 특히 존경받는 사람들의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 실망을 하게 된다. 그 점을 노렸다. 소련과 공산당, 비밀경찰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존경했던 사람들의 매우 사소한 흠집을 보고 오히려 소련과 공산당의 편에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또 작가는 지식층들의 위선도 보여주고 있다. 저녁 모임에서 자주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체코도 무장을 해서 소련군대와 맞서야 했다고 정부를 비난하거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순진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바나가 그런 말을 할 거면, 당장이라도 지금 귀국해서 총들고 싸우라, 비판하면 곧 언성이 높아지곤 했다. 대안 없는 비판,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 작가는 이런 시대의 모순, 사람들의 거짓된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1.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택하는 군중

예수 때는 안 그랬던가? 성경을 읽으면서 늘 의문이 들었던 점은, 군중들, 대중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조롱과 저주를 퍼붓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찬동했을까,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찾아가 어떻게 하셨는가? 병을 고쳐주시고, 어려운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시고 구원의 징표들을 보여주셨다. 소외받고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편에서 정죄함을 당하지 않도록 살펴주시곤 하셨다.

그런데 예수와 바라바 중에서, 바라바를 선택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는가?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아무런 죄가 없고, 보복하지 않는 이에 대해, 본질은 잊은 채 함부로 대하고 조롱하고 헐뜯는 것, 그 속에 타락한 본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항상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도된 의식이 죄성에 편승해서 자기도 모르게 악의 편에 서게 된다.

 

 

  1. 예수에 대한 음모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사를 싣지 않았다. 마태와 누가만 전하고 있다. 왜일까? 굳이 그것에 대해 전하지 않아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달랐다. 어떤 도전이 있었을 것이다.

마태와 누가 역시 어조가 좀 다르다. 도전받고 있는 문제가 다르다는 얘기다.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소개하지만 부정적인 내용이 없다. 마태는 스캔들(파혼, 계시, 재결합)을 연상하게 한다. 누가의 관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나눌 것이다.

어떤 상자를 열어볼 마음도 없었는데, 그 상자를 열어보지 말라고 하면,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마태는 왜 굳이 하지 말아도 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가? 단순히 예수 탄생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자 했다면 누가의 방식을 택했을 수도 있는데, 왜 스캔들을 굳이 연상시키게 하는 것일까?

 

답은 나와 있다. 예수님을 흠집내고 이미지를 손상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이 교회가 추종하는 예수에 대해 온갖 헛소문과 가짜뉴스를 통해 퍼뜨리는 것이다. 특히 출생에 관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린다면 순결주의나 완벽주의 내지는 완고한 고정관념과 보수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가진 사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마치 체코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로 떠들어 댈 줄 알았지, 정작 자기가 희생하고 헌신하지는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명인사에 대한 기대에 대해 왜곡된 의식을 끌어내기 위해 소련의 비밀경찰들이 사용했던 방법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도 살펴보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경험하고 목격했던 것이 아니다. 주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달려가 상부에 보고했다. 장로들은 경비병들을 많은 돈으로 매수했다. 예수의 일행들이 밤에 그 시신을 도둑질 해갔다고 퍼뜨리도록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에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인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하려고 했던 의도와 맞물린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교회의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성도들의 선한 영적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 모세보다 더 능한 모세

자, 그렇다면 왜 굳이 애써 스스로 스캔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일까?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해서 사전지식이 풍부하고 거의 믿음의 대상과도 같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애굽에서 모든 남자 아기들이 태어나면 죽는 마당에, 도대체 왜 유대의 부모들은 부부관계를 계속했는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아므람과 요게벳은 임신보다는 파혼을 결정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재결합하게 됐다.

 

백성의 원로들은 애굽의 바로 왕이 내린 명령 때문에, 남편들이 아내와 동침하지 못하게 하자는 규칙을 제안한다. 비극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므람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가서 내 아내를 취할 것이며, 나는 왕의 명령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들 보기에 옳다면, 우리 모두 이런 식으로 행동합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갓난아기의 생명을 건 무모함처럼 생각된다. 바로의 권력의 칼에 맞설 수 있는가?

그런데 아므람이 생각한 전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첫 번째 계시가 나타났다. “그에게서 태어날 아이는 나를 영원히 섬기게 될 것이다.”

레위 지파의 아므람은 아내를 취하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자신들의 아내를 취하였다.

두 번째 계시가 있다. 미리암을 통해서였다. “태어날 아이는 물 속에 던져질 것이며, 그로 인해 물이 마르게 될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서 이적을 행하여 나의 백성을 구할 것이다.”

 

모세의 출생과 관련하여 이와 비슷한 여러 개의 이야기 버전이 있다.

파혼 – 계시 – 재결합의 패턴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역사가 있었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믿음으로 역사하신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험난한 파도나 그것을 만드는 사람과 우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행동함으로 역사를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통해서 모든 백성을 죄와 그 파멸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역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나 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예수님의 탄생을 왜곡하고 거짓된 루머를 만들어서 흠집을 내려는 사람의 말이 맞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데 쓰신다면 그 뜻을 막을 수 있을까? 없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반대의 경우라서 인간적인 목적의 준자로 판단한다.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마1:5에 룻이라는 여인이 언급된다. 이레적으로 네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모두 어떤 사람들인가? 유대인의 율법에 합당한 사람인가? 인간이 세운 고상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인가? 오히려 정죄를 당하고 부정당하는 사람들이다. 특별히 룻은 모압의 여인이다. 이스라엘은 모압인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23:3)

 

영원히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 마만큼 멸시하고 경멸하고 천대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룻은 다윗의 증조모 할머니이다. 그 고조모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생 라합이다.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고 거룩하게 사용하시겠다고 한다면 사람이 어찌 대항할 수 있겠는가?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이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과학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문자주의적인 과학적 설명을 하려는 사람들의 억지는 이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동정녀의 탄생에 관한 믿음은 어떤 차원인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와 역사를 믿음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소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

 

어찌 보면 성경은 인간의 선민의식, 혈통주의, 편견, 선입견, 오만함에 맞서고 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추문거리로 만들어서 기득권과 특권과 자기 욕심과 야욕을 챙기려는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라합과 모압 여인 같은 멸시당하는 인생을 통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을 내셨으며, 밧세바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지혜의 왕 솔로몬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말이다.

 

마태의 고민과 초대교회가 도전을 받았던 문제로 돌아와보자. 예수님의 제자도를 따르며 세상에 전도, 선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 생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자기 십자가를 감당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 편안하고 아무런 문제나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박해를 받고 고난이 있다지만 부활의 승리를 믿으며 담대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고난 당하는 자들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눔과 사랑과 섬김을 실천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날로 늘어갔다. 전통적 유대교의 오만과 율법주의를 이념과 사상처럼 우상화하며 믿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질투하고 샘을 냈다. 마치 애굽의 바로왕이 히브리인들의 수가 늘자 불안해하며 두려움이 일어 히브리인들을 박해했던 것처럼 기득권을 가진 자들로서는, 그 수가 늘어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헤롯의 유아살해 명령은 역사적인 사실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는 것처럼, 유대인의 괴롭힘을 반영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애굽에 바로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 했던 산파가 있었던 것처럼, 마태의 공동체 안에는 유대인들의 완악한 시선, 유대민족으로부터 출교당할 위협,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에 길들여져서 따르기를 강요당했던 가치관에 대해 눈치를 보아야 하는 딜레마, 이런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믿음의 산파역할을 했던 제자들이 있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정말 우리가 들어야 할 사명이 여기에 있다. 갓임신한 여자가 아기를 유산할 위험과 같이 믿음이 흔들리는 위험이 있을 때와 같다. 체코의 군중들은 민주투사의 사소한 오점이 싫다고 소련공산주의를 택했던 것처럼, 세상은 복음을 거부하고 어둠을 택하고, 바라바를 택하며 믿음을 저버린다. 그러나 이 대림절에 우리가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자녀로 서서 믿음의 산파역할을 해야할 때이다. 그 사명이 여러분에게 주어졌을 믿고 용기를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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