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의 하나님, 강림절 첫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란 은행잎이 거리를 덮으며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계절에, 따뜻한 주님의 품에 지친 몸과 영혼을 맡기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품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이 시간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 모두와 인터넷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부터 4주간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이다. 매년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교회력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대림절이다. 영적 암흑기와 차디찬 현실, 냉혹한 상황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셨다.
1년 동안 참 어렵게 지나왔다. 몸과 마음이 지치신 분들이 많다. 공중을 날던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쉼을 청한다. 예배는 우리의 일상에서 쉼터 역할을 해왔다. 올 한 해는 때때로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고한 여러분 모두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고 소망을 갖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번 대림절은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은 예전의 낭만을 찾기가 힘들다. 성극, 캐롤, 사랑의 선물 같은 것들로 마음이 참 훈훈했는데, 모든 것이 상업화가 되어버리고서는 상막하기 그지 없다.
그럴지라도 소망의 기쁨이 여러분에게 밝혀지기를 축원한다. 분위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희망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크리스마스로 인도하는 것이다.
동방의 박사들은 값진 보물들을 들고 큰 별을 따라왔다. 황금, 몰약, 유향. 그 모습은 마치 어두운 밤 더욱 빛나는 샛별을 따라 길을 걷는 인생을 보여준다. 보물들은 물질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가치들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그런 만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길어낸 소중한 것으로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한 보물을 준비했으면 좋겠다.
동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밤에 말을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있던 세 사람이 이상한 나그네 한 사람을 만났다. 그 나그네는 그들에게 얼마 가지 않아 마른 시내 하나를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당신들이 그곳에 도착하거든 말에서 내려 시내에서 자갈들을 주워 자루와 호주머니에 가득 채우도록 하시오. 그리고나서 계속 여행 하다가 해가 뜰 때 당신들이 주워온 자갈들을 살펴보시오. 당신들은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해 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의 말처럼, 세 사람은 마른 시내에 도착했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많은 자갈 들 중에 몇 개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다음날 해가 뜰 무렵 그들은 주워온 자갈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그 자갈들은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및 기타 여러 가지 보석들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막에서 만났던 나그네의 말을 떠올린 그들은 그제야 그 나그네의 말을 이해했다. 그들은 주워온 자갈들이 보석들로 변해 있어 기뻤다. 그러나 더 많이 주워오지 않은 것이 애석했다.
처음부터 보석이었을 수도 있다. 그때는 어두워 모르다가 나중에 밝아져서 보석임을 알게 됐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시간이 그렇다. 특히 ‘지금’이라는 시간은 나중에 주워담을 수 없는 보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해보면 안될까? 처음에는 그냥 돌맹이에 불과했나 걷는 도중에 보석이 되었다고 말이다. 인생길을 걸으며, 아픔을 감싸고 보듬다 보니, – 조개가 모래를 진주로 만드는 것처럼 – 보석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기도 한다.
대림절 4주간을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릴까? 요셉을 통해 발견한 것이 있다. 자비로움이다. 정혼녀의 상처와 아픔, 혹은 오해받고 비난받게 될 것을 외면할 수 없어,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겼다. 일이 이렇게 흐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기에게 부여된 운명이라고 결정하게 된 용기도 자비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70, 80년 대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교회 장로였던 구봉서와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게 진짜 버전인지 모를 만큼 이야기는 변색이 됐는데, 큰 골자는 이런 내용이다. 구봉서 장로가 전도한 후배 코미디언과 함께 예수님 탄생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는 중에, 후배가 “동정녀 탄생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질문했다고 한다. 목사님이 어떻게 이해시키고 믿게 할지 난감해 하는데, 구봉서가 코미디언 답게 대답했다. “요셉이 가만히 있는데, 댁이 왜 따지긴 따지냐?”(남편도 뭐라고 안하는데, 왜 문제를 삼느냐?)는 것이었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리아가 임신했다. 동침을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시는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것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조용히 파혼하고자 했다. 어느 날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일러주었다. 그리고 마리아를 데리고 왔다.
과연 쉬운 일이었을까? 물론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말씀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에서 깼을 때에도 그럴까? 물론 꿈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요셉이 의심없이 쉽게 믿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당사자라고 생각해보라. 그 말씀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쉽지 않은 믿음의 한계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가? 주의 사자가 “무서워하지 말라.”고 다독이신다. 요셉이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람마다 인내의 한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이면 누구나 정혼자에 대한 의심, 배신감, 복수심을 갖는다. 생각이 과대해지만 망상에 시달린다. 그것이 빚게 될 불행, 파국에 대한 두려움, 이런 생각에 괴롭다. 파혼 혹은 이혼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스트레스다.
무엇이 주의 사자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했겠는가? 그의 자비로운 성품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특별히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이 대목은 얼마나 고심했을까, 읽혀지는 대목이다. 성향이 그런 사람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요셉의 도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했다가는 문제가 커지고 서로가 불행하게 된다. 사람들이 소녀나 다름없는 마리아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자기와 관련되어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괴로운 일이다.
‘드러내지 아니하려 했다는 것’는 단순히 모르는 척 하려고 뒤덮으려 했다는 뜻이 아니라 마리아를 최대한 배려하고 신경을 써야 했던 그의 요셉의 고뇌를 드러낸다. 사실을 떠벌리고 불행을 초래하는 게 정의롭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게 더 의로운 것이다. 합법적으로 결혼해서 잘 살던 사람들도 헤어질 때에는 상대방의 험담과 나쁜 점만을 부각시켜서, 자신의 이혼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가 좋은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이다.
주의 사자가 현몽했다. 저는 단순히 꿈에 나타났다는 메시지로만 들려오지 않는다. 잠에서 깨고 나면 현실은 꿈과는 상반될 때가 훨씬 많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백성들을 향한 자비로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계획을 들었다. 요셉 속에 있는 자비의 진동수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속에 나타난 자비의 진동수가, 주의 사자가 현몽함으로 일치되는 것이었다. 그 일치된 진동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서도 여전히 그 진동은 남아있는 것이다.
러시아 문호의 대가인 톨스토이가 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하돈’이라는 작품이 있다.
에사르하돈이 적장을 잡아 놓고 어떻게 처형을 할지 궁리를 하다가 잠에 들었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이상한 경험을 하게 했다. 그가 곧 적장이 되어 고통을 느끼고, 자신이 죽인 병사가 되어 슬픔을 겪었다. 심지어 사냥하여 죽인 짐승으로 변하기도 했다. 타자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 것이다. 다음날 에사르하돈 왕이, 적장을 비롯한 모든 포로를 풀어주고 사형 집행을 멈추게 했다.
엣살핫돈이 잠에서 깨었을 때, 단순히 꿈에서 깬 것만이 아니라, 감히 생명을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꿈으로부터 자비심이 깨어난 것이다.
마찬가지 아닐까? 무엇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요셉의 자비로운 마음을 사용하셨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의심도 들고, 화도 나고, 배신감이 들 수도 있고, 파국에 대한 두려움이 일 수도 있지만 요셉 속 마리아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일기 시작했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였다.’
25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는 증언 또한 인간적으로 얼마나 자상한 배려심인가?!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한없는 자비와 무한한 사랑으로 대하신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예수님을 얼마나 닮아 있는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측은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 누군가 겪는 고통은 그의 잘못을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어떤 이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실 때, “죄인이요, 세리들과 식사를 하신다.”고 이상한 눈으로만 보려고 했다. 의사는 병자에게라야 필요하듯이,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눈이 없었다. 제사장과 레위 역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외면하고 가버렸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뽐낼 뿐,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깨닫지도 못했다. 어쩌면 자기를 향하고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아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심으로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나눠먹자 하셨다. 죽은 나사로를 불쌍히 여기시고 비통한 심정으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다.
베드로는 이 마음이 부족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사람을 향해 함부로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주님은 그까지도 불쌍히 여겨 그의 귀를 고쳐주셨다.
바울은 이 마음을 잃고 분쟁하고 다투며 믿음과 멀어졌던 고린도교회에,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말씀했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물의를 일으켰던 사람들을 말한다.
빛이 없어 세상이 어둡고, 땔감이 없어 세상의 현실이 차가운 게 아니다.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 세상이 어두워졌고, 차가워졌다.
강림절 첫 주, 우리가 낮은 곳에 그리스도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자비로운 마음,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준비돼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