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엉성해진 길 옆 가로수의 달랑거리는 잎새가 가을이 슬그머니 그 문을 닫으려함을 알려주는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새 희망을 가슴에 품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의 어루만지심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1:12)
- 믿음의 분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인간에게 복에 대한 언약을 하실 때, 꼭 이렇게 소개하시고 말씀하신다. 왜 그럴까?
① 복 주시는 하나님(계획하심, 인도하심, 섭리하심, 역사하심), ② 영속적으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③ 복음을 듣는 자의 하나님(히4:2 그들도 우리와 같이 복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니라)
이 은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불러주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에서 누구의 믿음이 더 클까? 누구의 믿음이 상대적으로 작을 것 같은가? 누군가의 믿음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정당한 것인가? 이런 생각부터 들 수 있다.
로마서12:3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했다.
분명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기 위해 스스로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야곱도 임종직전에 자녀들에게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 우리가 더 큰 믿음의 분량을 사모하고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성경에서 보면 이삭의 분량은 굉장히 짧다. 아브라함은 적어도 12장에서 25장까지 14장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다. 야곱도 28장에서 35장까지 8장, 그리고 창세기 후반에 요셉을 만나고 애굽으로 가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출연한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내용에 잠깐 등장했다가, 주된 이야기는 26장-27장에 나온다. 그랄에 거주했던 이야기, 야곱을 에서인줄로 알고 축복하는 이야기.
반면에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야기는 굉장히 풍성하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났고, 하갈을 취해 이스마엘을 가졌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중보자였단 이야기, 롯을 구해낸 이야기, 바랄 수 없는 중에 이삭을 갖게 된 이야기,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는 순종에 대한 이야기 등등, 긴장감 넘치는 내용이 많다.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산 이야기로부터, 형이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챈 이야기, 밤 노중에서 천사의 사다리의 환상, 라헬과의 러브스토리, 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생활, 에서를 만나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 오다가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야기, 딸 디나의 일로 또다시 위기를 맞은 이야기 등등 굉장히 많은 소재들을 찾아낼 수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파란만장한 인생들이었다. 조창환 시인은 ‘수도원 가는 길’이라는 시집에서 이런 말들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늙으려고 이 세상 끝까지 왔나보다. … 눈물겹다 세상의 길이란 길 끝에서는, 삭은 두엄 냄새 같은, 편안한 잠 만날 줄 알았건만 아직 얼마나 더 기다려야 저 기막힌 그리움을 벗어 놓는단 말인가.”(나는 늙으려고),
“저 기막힌 그리움” 인생의 회한을 보여주는 표현이리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인생에서 느껴지는 서정이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던 속사정, 형 에서가 두렵고 떨리게 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가고 팠던 야곱이다.
이런 인생을 겪으면서 아브라함과 야곱은, 그 믿음이 연단되고 강해지며 분량이 커져가지 않았을까?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삶과 신앙에서 동일한 관계와 원리를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우리의 다양한 인생을 발견하고 만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이삭은 격정적인 인생의 여정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야곱의 모습과 은혜와 믿음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만, 이삭은 별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삭의 믿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이삭
아브라함 때, 큰 흉년이 들었다. 그의 선택은 애굽이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하셔서 가나안에 왔다.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예배했다. 그러나 생존과 생계의 현실적인 문제로 점차 남방쪽으로 이동을 하더니, 급기야 흉년이 들어 애굽을 택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묻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생기는 은혜가 있다. 무엇인가? 소망과 용기이다. 현실은 캄캄한 밤처럼 어두울지 모르지만, 밤새 일하시는 하나님을 샛별처럼 바라보면서 새날의 동이 트기를 기다릴 수 있다.
아브라함은 어떤 마음으로 애굽으로 내려 갔을까? 생존에 대한 기대 뿐, 참 소망은 가질 수 없었다. 거기에는 길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길이 아니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이었다. 약간의 물질적인 이익은 얻었는 지도 모르지만 결국 성경은 처음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왔다고 증거한다.
반면에 이삭은 어떤가? 아브라함 때처럼 견디기 어려운 흉년이 들었다. 그도 애굽으로 내려갈 생각을 안한 건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먼저 듣는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창26:2) 그는 그대로 그랄에 머물렀다.
아브라함에게는 안들려주셨고, 이삭에게는 들려주셨기 때문이 아니다. 듣고자 하는 자만이 들을 수 있다. 청종하려는 자에게는 분명히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왜? 주를 의지하고자 청종하려는 자에게 응답하시고 흑암 중에 빛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처음부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한 사람의 이야기와 그 반대의 이야기 중, 사람들은 어느 이야기에 흥미를 더 두는가?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다하며 살다가 큰 실패를 만나, 매를 맞고 난 뒤에야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주신 이야기와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어긋나지 않는 길을 갔다는 이야기 중에서 사람들은 누구를 더 대단하게 보는가? 분명히 세간의 이목은 전자에 더 쏠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갈등과 망설임은 있어도, 이삭과 같은 믿음과 신앙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신앙인들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값지고 귀한 것이다. 자칫 신앙적인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얻어 더 가식적이거나 영적인 교만에 빠질 수도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교해보자면 처음부터 이삭이 더 나은 길을 걸었다. 그러니 일부러 신앙의 스토리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성실한 신앙의 일상을 채워가길 바란다. 변곡점도 좋지만 꾸준한 향상은 더 값진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이삭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며 견디고 이길 때다.
- 더 큰 주의 복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조금의 물질적 이익을 얻어 돌아왔다.
‘이상하다.’(여기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성서는 분명히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해서 돌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왜 조금의 물질적 이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창세기26:12을 보면, 이삭은 그해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백 배나 결실을 얻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신 것에 비하자면 조금 이익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에 대한 선택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얻는 복이 이익의 결과로 보아도 더 큰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길이 없어 보이고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음성을 청종하고 따르는 것에 대해 분명히 보상하시고 더 좋은 것을 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직접 복을 주시는 것과 자기가 복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이 될지니라.”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삼는 사람만이 정말 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역시 복이 되길 바라신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복의 근원으로 삼을 줄 아는 믿음과 용기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삭의 모습을 통해서 다시 깨달으시라.
- 복의 근원
이삭이 우물을 팠던 사건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 질투로 메웠다. 다시 이삭이 팠더니 샘 근원을 얻었다고 성경이 말씀한다. 이번에는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이 다시 판 우물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나섰다. 결국은 빼앗기고 다른 우물을 팠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랄의 목자들은 그것 역시 자기들 것이라고 이삭의 것을 가로챘다.
이쯤 되면 이삭의 상태가 어떨가? 어차피 또 우물을 파봤자 그랄의 목자들이 또 괴롭힐 수도 있고, 이전의 자기의 노력이 허사가 됐던 것 때문에 실의에 빠질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면, 아니 자신의 삶 속에서 한두 번 실패와 상처, 특별히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그게 트라우마로 작용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평소 그의 신앙과 믿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창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또 다시 복을 주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실망스럽고 괴롭힘을 당하고 낙심이 오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로 인해 힘과 용기를 얻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우시고 갚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다시 우물을 파는 시도를 했겠는가? 그는 복의 근원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 그는 기도와 믿음으로 이겨냈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대목이다. 물의 근원을 찾아 우물을 파면서 그는 복의 근원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기도하며 팠을 것 같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우리 교우들이 이것을 잊지않게 하시고, 주를 의지하게 하소서.” 늘 기도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기대를 갖는 것일까? (자기 기대와 바람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특별히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런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 승리하는 신앙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계약을 맺자고 먼저 찾아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라. 아비멜렉은 이삭을 부당하게 대하고 억울하게 대하는데 모른척했고, 자기들 보다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아 쫓아냈던 사람이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창26:28)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9)
원수라면 원수일 수 있는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승복을 했다. 우물에 관한 일 때문만은 아니다. 이삭이 매사 믿음으로 승리하고 이긴 것을 지켜봤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라고 말이다.
그날에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승전보’가 이렇게 날아든다. 32절, “그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면 우리가 승리한다. 하나님께서 승리하지 못하실 때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하길 바라신다. 여러분 이삭과 같은 승리하는 신앙을 갖기를 바란다.
# 승리하시는 하나님(시편 묵상_승리하라, 찬양하라, 감사하라)
- 맺음
신앙의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는 분명히 누군가에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갖지 않았다고 해서 은혜와 믿음이 약하거나 분량이 적은 게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큰지도 모르겠다. 유명한 강사 목사님이나 인기 있는 간증자의 영적 은혜와 믿음이 더 크다는 생각 때문에 바로 자가와 함께 하고 소중한 지체들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런 이야기들을 좇느라 부활하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를 안다녀서가 아니라, 교회의 지체가 되어 섬기지 못하고 관람객에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이삭은 인생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평소의 조용한 신앙과 믿음으로 성실하게 헤쳐나갔다. 낙심 될 만한 일을 만났을 때는 더 큰 복으로, 다른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을 확신하며 주님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복에 대한 근원에 대한 믿음이 뿌리박혀 있었다. 이기고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