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비와 늦은 비로 오곡이 자라게 하시고, 따뜻한 햇볕과 은은한 바람으로 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사랑의 하나님, 뜻 깊은 추수감사절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이슬과 비, 그리고 햇빛을 먹으면서 자란 열매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의 절기에, 한 해 동안 지켜 주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저희들이 드리는 감사의 찬송과 예물을 기쁘게 받아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리오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시119:7-8)
- 추수감사절의 유래
01_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주님 앞에 나아온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우리의 영혼을 가장 편안케 합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를 가장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시험이 찾아왔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에 이보다 평안을 주는 일이 없어요.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한 포구에 옮겨 놓으실텐데 말입니다.
우리 삶에서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에서 어느 실험카메라에서 직원을 뽑는 인터뷰가 진행됐습니다. (예전에 영상으로 보신 것을 기억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24시간 일을 해야 되고, 페이는 전혀 없습니다. 일이 쉬운 것도 아닙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때로는 무한대의 헌신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이 그 일을 해냐는 사람이 있느냐고 어이없어 반문하니까, 면접관이 있다고 합니다. 누구냐고 물으니까, 당신의 어머니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갑자기 감사의 마음에 감정이 복받쳤을 겁니다. 감사할 때 소중한 것을 알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던가를 알게 되죠.
담대한 용기도 감사의 기반 위에 더 힘을 낼 수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함 때문에, 앞길이 막막하고 어떤 길일지 알 수 없으나 용기 내어 담대함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시편57편 9절에서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고백합니다. 평탄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다.”고 위기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맹수에게서 양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리고 골리앗도 이기게 하신 믿음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감사는 우리의 믿음의 눈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열게 해줍니다.
감사는 우리의 의지와 생각으로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의 뜻대로, 의지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눈을 뜨는 것도 인간의 의지와 지식과 노력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부어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지름길이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감사의 충만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새로워지고 참된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길 빕니다.
02_올해는 많은 신앙의 결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랐는데,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물론 코로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렇다고 감사의 크기와 마음이 작은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한 일들이 참 많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고, 우리 집 같은 교회를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주현숙 권사님이 손녀를 보셨다고 했을 때, 갑자기 생각 난 게 있습니다. 은지 태어나던 날 큰 교통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수지가 뱃속에 있을 때, 청운동 어느 학교 앞에서 아이들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학부형들이 있었는데, (내리막으로된 커브길이었습니다.) 아내랑 심방을 다녀오다가 졸음운전으로, 연달아 들이받을 뻔했습니다. 깜빡하는 사이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느닷없이 왜 이런 생각이 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올해는 정말 많은 감사와 은혜를 깨달으라고 주님께서 도와주시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나 현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키고 계시고 인도하심 때문에 괜찮다고 위로하시는 것 같습니다.
-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성경적으로는 수장절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유래가 된 사건이 있습니다.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모진 고통을 이기고 첫수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함께 잔치를 즐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영상을 하나 보시죠.
☞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영광돌리는 것에 그칠 게 아니라, 이웃과 하나님 주신 은혜를 나누고, 친교와 사랑을 더하며, 복음이 증거되는 기회로 삼아야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죽음의 이벤트와 나눔의 이벤트
01_애굽에서 죽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집트에서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음을 맞았습니다. 바로왕의 맏아들로부터 몸종의 장자, 심지어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이스라엘인들, 히브리인들에게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엇일까요? 유월절 사건.
하나님은 애굽에서 재앙이 일어나는 동안 이스라엘(히브리인들)을 지키시는 내용이 여러군데 나옵니다. 파리재앙, 가축재앙, 우박, 흑암, 그리고 장자의 재앙. 애굽에 재앙이 미칠 때,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고센 땅에는 재앙들이 없게 하십니다.
어떻게 애굽에는 있지만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없을까? 동시에 일어나면서 동시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을까? 애굽에는 흑암이 찾아왔는데, 이스라엘인들의 처소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아하, 인생의 어둠과 위기가 찾아왔을 때, 눈앞이 캄캄해질 때, 믿음의 영역 안과 밖은 이렇게 다른 것이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운 밤, 인생은 슬픔과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고통으로 바뀌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어두운 밤은 자비로 지키시는 은혜입니다.
(밤중에 농작물에 논을 준 농부이야기)
우리 인생의 밤중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과 자비가 있구나. 이것이 흑암 속에 빛에 머무는 은혜 아니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유월절 사건’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그 피를 바름으로, 그 표시가 된 곳은 재앙이 지나가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날을 기념하여 절기를 삼고 영원한 규례로 만들어 대대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곳에는 죽음의 재앙이 지나가는 사건이다.’ 이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 와중에 “그 고기를 구워 먹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음식을 말합니다.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음식을 나눠 먹는다는 것은 공동체와 관련이 있죠?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함양되기도 합니다. 이날을 절기로 삼으라는 명령 자체가 공동체와 관련 있는 겁니다. 마치 명절 음식을 나눠 먹듯이 말이죠! 하나님의 백성, 언약 공동체로서 말입니다.
애굽에서 일어난 것은 죽음의 이벤트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난 것은 생명과 나눔의 이벤트입니다. 아시다시피 죽음의 이벤트는 애굽 바로왕의 완악함으로 인함입니다.
02_죽음의 이벤트와 나눔의 이벤트가 일어나는 곳이, 또 한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공관복음서는 헤롯의 생일잔치와 오병이어 사건을 연결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생일잔치에서 대신들, 천부장들, 귀인들이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면서 요한을 참수하는 죽음의 이벤트가 벌어졌습니다. 헤롯의 치부를 감추고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의 이목에 부합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복음서는 곧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을 소개합니다. 마태복음은 초막절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과 동일한 유대인들의 추수 축제였습니다. 헤롯 잔치의 음식들에 비하면 어린 아이가 내민 오병이어란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떼를 지어 50명씩 100명씩 푸른 잔디 위에 모여 앉았고, 주님은 오병이어를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나누자고 하시면서 떼어주셨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고, 신기하게도 12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습니다. 성인 남성만 오천 명이 넘었습니다.
03_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다를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이벤트란 무엇입니까?
음주운전자가 사람을 죽여놓고 진정한 사죄와 뉘우침 없이, 자기의 부와 명성을 잃게 되었으니 선처를 부탁하는 모양새가 가인이 아벨을 죽여놓고도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오히려 하소연하는 것과 다름없는 세상입니다. 자기가 가진 힘으로 자기 보다 못한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세상입니다.
보복운전 당해보셨습니까? 얼마 전 한남대교를 건너오는데, 고급 승용차 운전자가 앞으로 갑자기 끼어들더니 연속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습니다. 시비붙지 않을려고 차선을 변경했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추월당했다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있으니 이런 위협을 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N번방 사건처럼 어린 학생들을 협박하고 위협해서 그 영혼을 유린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주눅들게 만들고 눈치 보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이미 고등수학과 영어에 대한 선행을 마치고, 게다가 국어와 과학도 어느 정도 마친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더더더 선행학습에 선행을 더해야 합니다. 과도하게 경쟁을 하고, 그래야만 루저가 되지 않는다고 도깨비를 만들어냅니다.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있습니다.
- 생명과 나눔의 이벤트
01_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들을 만들어가기를 원하실까요? 유월절 사건이든, 오병이어 사건이든, 죽음의 이벤트가 중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님께 감사로 드려지며 기억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02_이번 추수감사절에는 특별히 나눔을 결단하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나도 부족하고 나눌 게 없는데, 어떻게 하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가 만든 기적을 기억하십시오. 유월절의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을 기억하십시오.
03_예전에 어느 분이 제게 돈을 빌렸습니다. 아주 절박해했습니다. 한참 전의 일이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아시는 분들은 알 겁니다. 혹 나쁜 생각이나 하지 않을지 걱정돼서. 어느 날 밤 문정동 일대를 헤매며, 그를 찾아 밤새 돌아다녔다는 것을 알 겁니다. 아내 몰래 빌려주었습니다. 마침 사례비가 있어서 급하게 쓰고 갚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일이 잘 해결돼서 한참 만에 갚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미자립 교회 목사가 여윳돈이 있는 줄 압니다. 도와 달랄 때, 척척 도와줄 수 있는 줄 압니다. 교회와 제게 큰 상처를 남기고 떠난 뒤에도 아쉬울 때면 전화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한 가정의 생계를 빌려준 것입니다. 한 가정의 행복을 빌려준 것입니다. 한 식구의 눈물을 빌려준 겁니다. 힘든 형편에도 영혼을 먼저 생각해서 했던 일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 후 나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04_우리의 형편, 각자의 형편도 어려운데, 교회적인 형편도 어려운데, 이웃과 나누고 베푼다는 것이 쉽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뭔가 있는 줄 알지도 모릅니다. 넉넉할 때 나눌 수 있으면야 좋지만, ‘진짜 믿음은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누고 베풀 수 있는 게 진짜 믿음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래서 일어난 것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래서 더 복되게 하시고 은혜 주시고, 안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되게 하신 줄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주님은 오병이어를 감사함을 받으셔서 더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베품에는 세 종류가 있다. 아까와 하며 베푸는 것, 의무적으로 베푸는 것, 감사함으로 베푸 는 것이다.”(로버트 N. 로덴 메이어)
오늘 제단에 드려진 과일들은 이 건물에 입주해있는 업체들을 축복하는데 사용되길 바랍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버팀목처럼 지키고 있으니 힘을 내시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05_작년 이맘때를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이전을 준비하느라 금전적으로 한 푼이 아쉬울 때, 어느 장애인 단체에서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셔서 그곳을 돕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더 큰 은혜로 돌아왔습니다. 기한을 지키기 어려웠던,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들이 해결되고, 정말 신기하고 재정적인 문제가 제날짜에 착착 이뤄졌습니다.
이번에도 전화가 왔어요. 그나마 정기적으로 돕고 있던 기관과 단체와 교회들마저도 코로나로 어렵다며 후원을 끊었답니다. 솔직히 우리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06_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오병이어가 없겠습니까? 무교병이 없겠습니까? 말라기3:10에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씀했습니다. 물론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었지만 더 크게 보면, 과부, 고아, 나그네를 섬기는 일을 외면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07_그러고 보면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의미와도 잘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이웃을 초대하여, 나눌 수 있는 것. 기억하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이벤트에 동원된 사람이 아니라 생명과 나눔의 이벤트에 초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