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구르는 낙엽을 보며 중심이 없어 흔들리는 삶을 반성하게 되는 계절에, 주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채워지게 하여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오,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

 

  1. 주의 품에 거하는 시간

01_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02_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모습이, 어미 닭이 새끼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 날개 아래 모인 것 같다. 우리 중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좋은 결과를 맞은 분도 있고, 사람 때문에, 일 때문에 당했던 마음고생은 있었지만 잘 마무리를 하고 오신 분도 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용기와 새 힘을 주시기를 축원한다.

 

03_여러분 아시는 대로 주권사님 따님, 은경 자매가 출산했다. 산모(産母)도 아기도 모두 건강하다고 한다. 코로나 상황에서, 얼마나 노심초사(勞心焦思) 했겠는가?

아무 것도 쥐어본 적이 없는 갓난아기의 손이 엄마 손가락을 처음 붙잡았을 순간을 생각해봤다. 본능이라지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사랑의 특별한 유착이 시작된 것이다.

 

이사야49:15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처음 붙잡았을 때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붙들고 계시다. 하나님 품을 사모하며 거하는 자마다 그 영광을 노래하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란다.

 

 

  1. 예배의 자리에 섰을 때

01_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원하신다. 오늘 말씀은 단순한 초대가 아니다. 예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마음이 담겨있다. 기복적인 인간의 공로와 희생제물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것만이라면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갈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품을 의지하고 승리하기를 바라신다.

 

02_아브라함은 노년까지도 변변치 못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지시하신 땅에서 순종하며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했다. 이삭은 그랄 사람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고, 괴롭힘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갚아주심을 체험하며 그 눈물의 자리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했다. 야곱은 길을 잃은 인생의 노중에서, 천사들이 하늘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고 단을 쌓아 예배했다. 고되고 척박한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견디며 이루어졌다. 예배는 그런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는 은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위로와 용기를 얻는 감사,

출애굽은 구원과 해방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예배하는 백성이요, 족속 되기를 바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예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03_예배는 모든 피조물 위에, 그것을 초월해 계신 분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분께서 아버지라는 인격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요,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신다. 출세와 성공을 거두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제 몫을 의미 있게 감당하는 것 아닌가?

 

 

  1.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

01_그런데 어떤 사람은 벌 받지 않을 만큼만 신앙생활(예배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복을 넉넉히 받을 만큼 신앙생활(예배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과 진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 사울과 다윗 이야기로 적용해 볼 수 있다. 아벨이 후자의 사람이라면 가인은 전자의 사람이다. 다윗이 후자에 속한다면 사울은 전자에 속한다.

 

02_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 성경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문화적인 차이를 반영했다고 설명한다. 가인은 농경민이고, 아벨은 유목민이다. 하나님은 피의 희생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경작물로 드리는 소제도 받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 말씀을 근거로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믿음 없이 드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얼핏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가 분하게 생각하고 안색이 변한 것처럼 말이다. 평소의 행실과 영적인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3_성경이 명시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암시적인 게 있다. 창세기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낯을 들 수 없는, 어쩌면 하나님과 시선조차 제대로 맞출 수 없는 서먹한 상태로 예배했다.

짐작하시는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던 것처럼, 겉으로는 하나님께 제사하고 예배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피하며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다. 사람들 있을 때는 잘해주는 것 같다가 사람이 없을 때에는 함부로 해하는 사람. 겉으로 보이는 것과 안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이다. 그와는 제대로된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 아닐까?

겉으로 하나님께 예배는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미 그의 태도에서 드러나지 않는가?

 

04_‘가인이,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 제사는 안받으신다고, 얼굴에 분을 드러내고 안색이 변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든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민반응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가인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같은 반응이 거북하다.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면 서운하고 속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고 되돌아보고, 다시 받으시도록 고치거나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얼굴에 분(忿)이 가득하다. 염치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 탓을 자주한다. 가인이 이렇지 않은가?

 

어느 분이 작년에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자녀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고 한다.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는데, SNS에 하와이에 여행 중인 친구가 사진을 올렸다. 그것을 본 아내의 기쁨이 반감(半減)되더라고 한다. 여행을 망치고 돌아왔다. 그는 기본적으로 시기, 질투가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리고 있는 행복까지도 망치기 십상이다.

 

가인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열등감(劣等感), 시기(猜忌), 질투(嫉妬)가 대단한 사람 같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일 정도로 말이다. 시기 질투하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를 도리어 불편한 뭔가로 바꾼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예배까지도 망치기 일쑤이고, 원망하고 불평하기 쉽다. 교회 안에서 예배 잘 드린 후에, 친교를 나누는 과정에서 시기, 질투 때문에 받은 은혜를 빼앗기고 예배를 헛되게 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05_어쩌면 더 근원적으로 잘못된 모습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 3자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과 가인과의 관계에서 뭔가가 있다. 불순종, 가식, 음란, 탐심, 거짓.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는 ‘뭔가’ 말이다. 영혼을 부끄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지만 속절없이 죄에 사로잡혀, 곤고하게 만들었던 육신의 법 같은 것 말이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발설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가인에 대한 배려다. 누군가의 추문을 드러내서 앙갚음하려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그 추문을 감춰주면서도 그가 바로 잡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경고하셨다.

 

06_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중요한 것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이중적 그리고 자기중심적. 어떤 사람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니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가지고, 그것에 취해 있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한다. 아론이 황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이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했던 것처럼, 자기가 세운 우상을 위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할 수도 있다. 자기중심적 차원은 하나님께 자기를 맞출 생각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맞추라는 태도다.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예배한다.

 

07_사울은 사무엘이 오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먼저 예배를 드렸다. 말은 그럴싸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원하시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필요에 의해서 예배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뜻과 방법을 따라) 예배했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삼상13:13)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

자기 욕망과 명예를 위해 예배를 드렸다. ‘순종이 제사보다 났다.’고 사무엘이 말한다. 순종과 제사의 우열관계나 우선순위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이미 무효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다. 사울이 전리품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변명을 모르실 리가 있을까? 사무엘이 호통을 치는데도, 사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삼상15:30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을 지라도,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이 말만 들어서는 안된다. 뭐라고 말하는가?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체면을 생각해달라는 말인데, 무엇이 없는가? “진정성”이 없다. ‘나를 높이사’이 말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사울에게 예배란 자기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심지어 그는 사무엘이 죽은 후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도 없다. 하나님보다 세상 것들이 더 좋으니,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내려놓을 수도 없다. 죄에 사로잡혀 있으니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마음은 멀리 도망가있고, 하나님의 부르시는데도 응답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숨어있다. 사울은 시기, 질투에 휩싸여 다윗을 추격하다가 막을 내린 인생과 같았을 뿐, 자신의 예배를 하나님께 받으시도록 마음을 쏟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복음 가운데 서야 하는가?

  1. 오호라.” 탄식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시라.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긍휼한 마음으로 부르신다. 목마른 자들과 돈 없는 자들을 부르셨다. 인생의 곤고함으로 갈증을 느끼고 자격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보충하지 못하는 이들을 부르셨다.
  2.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와 은혜로 채우고 충만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대가를 지불하는 게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신 지 어떻게 아는가? 이런 충만함과 채움이 바로 하나님 예배받으신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를 깨달으면 예배를 받으신 것이다. 약할 때 강함되심을 믿게 되면 예배 받으신 것이다. 안되는 것 같아 보이고 안되는 것 같아 보여도 되는 것을 보게 되고 믿게 되면 예배 받으시는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게 하시면 예배 받으시는 것이다.
  3. 이 한 구절 안에 ‘오라’는 말씀이 네 번씩이나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야 한다. 낯을 들지 못할 일이 있으면 회개하면 된다. 이중적인 마음이 자기 안에 갈등하게 된다면 정결함을 사모하라.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지만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어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시라.

Leave a Comment

빠른 문의

이메일로 문의를 남겨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연락드리겠습니다.

Not readable? Change text. captcha 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