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와 풍차(이사야6:8-13)

그루터기와 풍차(이사야6:8-13)

 

2020년 11월 1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11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들이 가을의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계절에, 주님의 온유한 음성에 취하고자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지치고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치유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응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

 

 

  • 아름다운 자취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빈다. 주 중에 김성금 권사님이 가을하늘 풍경을 담은 사진을 단체카톡방에 올리셨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다. 곱게 물든 단풍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SNS로 나누곤 하는데, 코로나 상황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갈구하는 것 같다.

세상은 척박하다지만, 우리를 아름다운 영혼의 빛깔로 채색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충만히 채우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를 그 손끝으로 아름답게 빚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곱게 물들여지기를 바라신다.

 

오늘은 그루터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 예고된 심판

이사야6:11-13을 보면,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게 되며, 토지도 황무하게 되고, 곳곳에 황폐함으로 넘쳐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90%를 지나, 나머지 10%마저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듯, 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자녀에 대해 속상하고 슬픈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비행의 길을 걸을 때. 이사야1:2에,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나를 거역하였도다.” 말씀한다.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녀는 혼자 큰 줄 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그와 같다.

무엇이든 잘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위기가 지나간 것 같지만 하나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

 

히스기야 시대를 예로 들어보자.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위협에도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앗수르에 포위됐고, 다음날이면 성이 함락될 뻔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다. 랍사게의 협박과 조롱와 위협 속에서, 먼저 힘주시고, 능력주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찾았다.

다음날 폭풍 뒤의 찾아온 평온함처럼, 앗수르는 물러갔다. 벼랑끝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 사람들은 숨돌릴 수 있었고, 이어서 태평함과 형통함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는 시편127:1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없이 그렇게 된 것 아니고, 위기가 완전히 사라져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그렇게 된 줄로 알고 지냈다. 자녀의 불행을 바라는 부모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도 똑같다. 그런데도 못된 길을 걷는 자녀처럼 이스라엘이 그랬다. 뻔한 결말을 모르겠는가?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늘 사모하며 의지하시라.

시편18편“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의 고백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분이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망각한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던 사람이, 영적인 문제가 생기면 가장 많이 늘어놓는 변명이 무엇인 줄 아는가? “교회 안 나간다고, 하나님 안 믿는 것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권면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신앙생활 하기 싫다는 말이다. 자기 좋을 대로 신앙생활하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된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서로 지체됨을 통해서 섬기고 섬김을 받으면서 믿음을 지키고 자라가며,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사명을 다함으로 하나님 뜻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 나간다고, 하나님 안 믿는 것 아니다.”라는 말은 배은망덕해진 이스라엘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요즘 교회를 등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걱정하는 목사님들이 많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세상 교회들의 실망스러운 모습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기기만이다. 멀쩡한 자기 교회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어서 하나님을 귀찮게 여기는 속마음을 보이는 것 같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과 이유로 핑계를 더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면, 설령 교회를 등지고 하나님을 더 잘 믿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기뻐하실까? 은근히 하나님 없이 살만하다고 자만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 말씀하셨다. 땅에서 매인 것을 풀어가는 것이 천국의 열쇠일텐데, 응당 풀어야 할 것을 매이게 만드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간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크기와 열정만큼 이시간 하나님께서 충만한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 믿음과 용기

이사야는 세상의 정사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주의 백성들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

 

“포도원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두르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이사야5:2)

 

이사야5:7이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라.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명철하다고 여기며 ‘무지함에 사로잡힌 줄’도 모르고 행한다. 다 양과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가고 있었다.

 

누구도 말리거나, 설득하거나,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사야는 답답하고 마음이 슬프고 정말 괴로웠는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주셨다.

 

첫째 그가 받은 용기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을 사모하는 용기이다.

 

이사야6:8,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인간적인 용기, 무모한 용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현존하심으로 인해 얻게 된 용기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눈을 뜬 자가 갖게 된 용기였다.

그는 천상의 모습을 보았다.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이 3박자는 믿음을 확신케 하는 완전한 박자이다. 의심, 불순종으로 인해, 용기를 뒤덮고 있던 불안의 천막이 걷어졌다. 천막에 덮인 용기는 죄의 밧줄에 묶여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발휘하지 못할 때가 많다. 천사들이 제단의 숯불을 그 입술에 대니,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고 사용하시고자 하는 부르심에 용기가 났다. 성전에서의 이 환상은 바로 그 안에 갇혀 있던 용기가 꺼내지는 체험이 된 것이다.

 

어느 집에 모여 문을 틀어 잠그고 불안에 떨던 있던 제자들이 주님께서 불어 넣어주신 성령의 숨결에 갇혀 있던 용기가 터져나오는 체험을 하게 된 것과 같은 신앙현상이다. 그들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됐다.

 

이 시간 동일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귀하게 사용하길 원하신다. 용기를 내시라. 뿐만 아니라 전도에도, 선교에도,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든 일에 용기를 내시라. 믿음의 눈을 뜨고 허락하신 용기를 따라,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결단하다.

 

 

  • 그루터기의 희망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희망의 눈을 뜨게 하신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고, 숲이 사라졌다. 산하와 들녘이 황폐하다. 오랜 세월 자라고 성장해오고 지킨다고 지켜온 무엇인가가 사라졌다. 성전, 신앙공동체 뿐만 아니라 모든 명성과 업적과 공로가 사라졌다. 기대가 사라지고 소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루터기가 남아있음을 발견하게 하신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은 훼파되고 가옥들은 불타고 멀쩡한 사람들은 죄다 바벨론의 포로와 노예로 끌려갔다. 더 이상 이전처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고, 신앙공동체에 뿌리를 내리던 삶의 방식이 부서지자, 곧 개인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는 무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바벨론은 너무나 낯설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바벨론의 신문명은 열등감을 느끼고 주눅들게 만들었다. 전쟁에 능한 신이라고 하는 조각을 깎아 만들어 놓고는 그 이름을 마르둑이라고 했는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신상들이었다. 패배자들과 포로들을 압도하는 현실이었고 실상이었다.

 

그러나 그루터기와 같은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저것은 사람이 깎아 만든 조각에 불과하다. 영적인 눈을 바로 떴다.

수많은 조각상과 신상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요, 유일한 하나님 한 분이시다.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함께 포로로 잡혀온 다른 사람들에게도 퍼져가기 시작했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던 사람들의 심령에까지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루살렘에 있을 때처럼 마음껏 제사하고 예배할 수는 없지만 회당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고 적용하면서 오히려 믿음이 더욱더 뜨거워졌다. 대표적으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생각하라.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상황에서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 기도하고 감사를 드렸다.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정서와 날카로운 풍자를 시적인 언어로 들려주기로 유명한 알퐁스 도테가 어느 마을에 있었던 한 영감의 비밀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마을은 제분업으로 유명했다. 반경 40km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밀을 빻기 위해 몰려들었다. 도시는 항상 활기찼고, 저녁이면 노래와 연주와 춤, 풍찻간 주인들은 포도주를 내어 잔치를 즐겼다.

어느 날 증기제분소가 들어섰다. 사람들은 점차 밀을 풍차 방앗간 대신 이곳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갚 싸고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이다. 풍찻간은 하나둘 씩 문을 닫게 되었고, 조랑말 모습이나, 포도주 잔치, 윤무 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코르니유라는 한 영감만 끝까지 풍찻간을 운영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늘 일거리가 많은 것처럼 말했고, 실제로 풍차는 한 번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도 이곳에 출입하거나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수상쩍어하며 아마도 돈포대가 엄청 많을 거라며 소문이 무성하게 됐다.

어느 날 한 마을 사람이 자신의 아들과 할아버지의 손녀가 결혼하도록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사실이 드러났다. 방앗간은 텅비어 있었다. 밀을 빻을 때 풍기는 훈훈함도 없었고, 축대는 먼지로 덮였고, 빈 방아만 돌고 있었다. 풍차의 위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랬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대충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이곳으로 밀을 가져오는 행렬들이 이어졌고 다시 풍찻간 천장에는 고운 밀가루가 피어올랐다.

풍찻간은 이 마을의 정체성이였고, 자존심이었으며 행복의 상징이었다. 풍차가 활기차게 돌기시작할 때 마을 사람들이 잊고 있던 진정한 소중함, 행복, 기쁨이 동시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 아닐까? 성공에 능한 신이라고 사람이 정교하게 만든 수많은 담론들을 좇느라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등지기 쉬운 때다. 혹은 풍요와 편리함에 신앙생활이 귀찮아지고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살기 쉬운 때다. 사실은 그 때문에 세상이 황폐해지고, 불행해지며, 무한경쟁속에 내던져져서 무거운 삶의 짐을 각자도생이라는 말처럼 외롭게 지고 가야 하는 처지에 빠진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요즘 교회를 등지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하지만 그루터기처럼 교회를 지키고 믿음을 지키며 영적 사모함과 갈급함으로 더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도 많다. 바로 그루터기 신앙을 가지신 사람들이다. 저와 여러분에게 그와 같은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풍찻간 노인이 지키려고 했던 것을 통해 마을에 다시 활기가 찾아왔던 것처럼 믿음과 신앙을 지키는 그루터기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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