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7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계절에, 마음을 잠근 자물쇠를 풀고 마음껏 주님을 호흡하기 원하여 주님 전에 나왔사오니, 주님이 주시는 새롭게 하심의 물결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채취로 물씬 적셔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66:22)

 

  1. 인사

원근각처에서 이 영상으로 예배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시편84편 시인의 노래에 크게 공감이 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다가 쇠약해졌나이다.”

 

여러분 비슷한 심정인가?

 

하나님께서 그 사모하는 마음을 아신다. 그리고 은혜를 채워주신다. 시인의 고백은 바로 그것이다. 비록 주의 궁정에 나갈 수 없는 처지일지라도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동일한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원한다. 이 시간 하나님은 우리의 영이 소성케 되기를 바라신다.

 

 

  1. 위기의 시간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24장에서, 앞으로 벌어질 세상의 일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에 연이은 말씀이다.

 

24장의 내용은 이렇다.

 

①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게 된다.

②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 자칭 그리스도라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③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④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난다.

⑤ 주의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미움을 받게 된다.

⑥ 불법과 죄악은 만연되고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식어 냉랭해진다.

 

이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된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마24:28)

 

이어서

 

⑦ 환난의 행동요령

⑧ 그리스도의 재림

⑨ 마지막 때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마음을 어둡고 비관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이런 환난과 재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24:13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언제 끝나는가?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

 

요즘 들어 자주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 맞이하는 세상은 지금 보다 더 좋은 세상이 되며, 다음 세대에는 더 많은 비전과 꿈들이 실현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데,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시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과 기후는, 그동안 인간이 함부로 다룬 결과로, 인간에게 더 큰 재앙들을 가져다줄 것이고,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우리에게 벌어질 지도 모른다. 과학자들은 세계의 빙하가 녹으면서, 그동안 봉인돼 있던 바이러스들이, 해제되어, 인간을 끊임없이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AI기술이 인류의 행복과 변화된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들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가 될지도 모른다. 시뮬레이션이기는 하지만, 요양원에서 중증 치료를 받는 노모를 AI 간병인이 죽이는 내용도 있다. 그가 내린 행복에 대한 결론이 때문이다. 존재 자체만으로의 의미, 그것은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의미를 알 리가 없다.

 

마24:38-39을 보면 주님께서 “대홍수 사건 이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하신다.

 

이처럼, ‘정말 우리가 그와 같은 처지를 만난 것 아닌가?’ SF영화나 소설처럼 정말 지구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아니 이 말은 잘 못된 것 같다. 인류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인간, 인류가 없어도 자연과 우주는 그 섭리와 이치와 법칙을 따라 움직일테니 말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텐데, 주님은 몇 가지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신다.

① 15절,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리고 괄호가 쳐져있다.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괄호가 쳐져 있는 이유는, 어떤 위협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② 32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것처럼 인자가 가까이 이른 줄 알라.

 

주님은 위기의 시간 속에서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깨어있기를 바라신다.

 

깨어있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가? 반대로 깨어 있다면 어떤가?

 

 

  1. 깨어 있으라.

열 처녀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열 처녀는 신부의 친구들이다. 꼭 처녀일 필요는 없다. 역할이 중요하다. 신부를 신랑에게 인계하는 것이다. 그 순간을 영원히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잔치는 밤에 벌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등(燈)이 필요했다. 그런데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을 가졌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했다. 다음은 신랑의 행차가 늦어졌다. 그러자 처녀들이 졸다가 자게 되었다. 이것이 주님께서 설정(設定)해서 들려주신 비유의 전반부 내용이다.

후반부 내용은 갑자기 신랑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급박하게 됐다. 기름이 준비되지 않은 처녀들이 다급하게 빌려달라고 한다. 9절을 보면, 슬기 있는 자들이 그러다가는 모두가 부족하게 돼서, 이도저도 안되니 차라리 파는 곳에 빨리 가서 쓸 것을 사오라고 한다.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벌써 신랑이 왔다. 슬기로운 다섯 명은 혼인식을 빛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명은 그러지 못했다. 잔치문은 이미 닫혀있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신랑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거절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부터 알아보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천국을 맞이하는 일에 대해서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세상의 징조가 어두울 때, 잠들지 말고 깨어있으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다. 함께 기도하기를 바라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눈이 피곤하고 무거워 자고 있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계속 졸고 있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Are you still sleeping and resting?)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환난과 재난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 주님이 바라시는 바는 무엇인가? 깨어있기를 바라신다. 여기서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잠에서 ‘깨어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 것이다. 5절을 보라. “신랑이 더디 옴으로 다 졸며 잘새” 다섯 처녀는 졸고 있었고, 다섯 처녀는 깨어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가 졸며, 자고 있었다. 그러니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세상의 소란과 소문에 국민들의 영혼이 참 피곤한 때다. 믿는 자들은 어느 때보다 영적으로 잠들기 쉬운 때이다.

 

 

  1. 믿음의 준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어떻게 등(燈)을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전쟁터에 총을 들고 나가는 병사가 총알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올바른 이해를 위해 자세히 살펴보자.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말한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니까 신랑이, 올 때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랑을 맞이 하기 위해 등불이 켜져 있는 상태였다. 신랑을 맞이할 만한 기름이 있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신랑이 더디 왔기 때문에 생겨났다. 기름이 떨어졌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들은 만약을 위해 여분의 기름이 준비돼 있었다.

슬기로움과 마련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준비됨이다. “여기까지 인가 보오!” 하며 기한이 지나면 언제든 포기 가능한 상태가 아니라, 넉넉히 기다리고 견딜 수 있는 준비됨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에 나타났던 열광주의자들이 생각난다. 주님이 곧 오시리라는 열광주의적인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신앙생활에 쏟아부었다. 대신에 노동을 비롯한 일상적인 삶을 내팽개치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생겨났다. 그래서 데살로니가후서3:11-1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위태로움을 발견했고 미련함을 읽어냈다. 열광주의와 광적인 믿음에 빠진 사람들은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듯 했지만, 자기들이 기대했던 시간들이 빗나가자, 결국에는 견딜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열광주의에 빠져 들떴던 마음은 터진 풍선이 되어 돌아왔다. 실망감은 빨리 찾아왔고 곧 떠나갔다. 바울은 누차 그 시가와 때를 사람이 알 수 없다고 주의 말씀을 일깨웠지만 알면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자와 같았다.

반면에 때와 시기를 사람이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듣고, 주님이 다시 오심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난이 지속되더라도 의연하게 신앙을 지키며 삶을 지탱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잘 버텨나갔다. 빌립보서1:5-6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

 

요즘 주변 목사님들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다. 교회에서 열성을 보이던 사람, 절대 믿음과 신앙이 변치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코로나가 지속되자 오히려 가장 먼저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있더라고 말이다. 많은 이유와 변명으로, 교회와 목회자와 교우들에 적대적으로 대하더라고 한다. 참 안타깝다.

 

9절 말씀을 보면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이기적으로 보인다. 좀 나누어 달라고 할 때, 나누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부족할까 하노라.’ 이런 이유이긴 하지만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냉정하다. 주의 말씀을 듣던 청자들이 놀랐을 것 같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대목인데, 주님은 왜 이렇게 이야기를 구성하셨을까?

영적인 진리는 사람들의 귀를 듣기 좋게 하는 게 아니다. 진리는 단호한 법이다. 기억하라. 믿음이란 누군가에게 나누어주거나 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신 것이다. 음식은 나누어 주고 피도 나누어 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든 근육과 살은 나누어 줄 수 없다. 이처럼, 은혜는 나눌 수 있고, 간증도 나눌 수 있고,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고 기도할 수는 있다. 신앙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든 믿음은 얼마큼을 떼어 나누어줄 수 없다. 부모의 믿음을 자녀에게 떼줄 수가 없다.

그러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믿음이 자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이웃, 지인의 믿음도 자라게 해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똑같이 되어 믿음의 불이 꺼지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 모두는 슬기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10절에,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말씀한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구하러 갔다. 성공했을까? 못했을까? 늦은 시간을 감안하면 말이다. 11절을 보면 구입했을 것이다.

 

“그 후에 와서” 다행이다. 기름을 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더 들어보자.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애원한다. 성공은 했지만 이미 잔치문은 닫혔다.

 

이 대목 역시 청자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혼인잔치는 7일간 지속됐고 그 기간 동안 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잔치문이 닫혔다고 말씀하신다. 말씀하시려는 목적을 위해서이다.

 

유대적인 배경에 있었던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이 대목을 매우 강력하게 받아들였다. 이사야22:22과 누가복음13:25은 각각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못하노라 하리니.”

뒤늦은 신앙적인 후회는 소용이 없다.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마24:38-39) 홍수가 나서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생명의 문, 구원의 문은 닫혔다.

 

경각심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7:22-23과 곁들여서 이해해야 한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전에 신앙이 좋았다고, 봉사와 헌신과 섬김을 많이 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면 말이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도록 우리 믿음을 지키며 깨어있는가 말이다. 신앙적인 자만에 취해 오히려 믿음이 사라지고 성령이 소멸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당할 일을 경계하기 위해서 말이다.

 

신랑은 주님이요, 신부는 교회다. 우리 믿음의 지체들은 처녀들과 같은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신부된 교회가 주님을 잘 맞이 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하고, 순종과 충성을 다해야 한다.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혼란과 어려움의 시대, 말세지말의 시대 준비된 믿음으로 끝까지 승리하여, 모두가 천국문, 주님의 복 주시는 잔치에 참여하기를 주님께서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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