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0일

 

끊임없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으로 피조물을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거룩하게 구별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위기를 겪고 있는 자연현상과 질병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과 자세의 변화를 요구받는 때에, 요셉을 양 떼처럼 인도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변화까지도 인도하실 줄 믿으며 주님 앞에 섰사오니, 주님이 주시는 새롭게 하심의 물결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채취로 물씬 적셔지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 인사

이 시간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기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연속설교를 하고 있는데,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이라는 주제에 이어, 오늘은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1. 라면 형제와 예수님의 눈물

 

‘하나님, 하나님께서도, 슬프십니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진지하게 물을 수밖에 없다.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두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가 화재를 냈고, 지금 위중한 상태입니다. 그 어린 것들이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코로나로 학교 급식은 기대할 수 없고, 허기를 달래고자 불 위에 라면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여름이 지나가고 밤공기는 시원해졌다. 그동안 코로나로 답답했다. 이제 맑은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 이제는 예레미야의 탄식 같은 소리를 들을 일이 없기를 바라는데, 여전히 제게 들려오고 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20-22)

 

힘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들이 재난과 위기의 상황에 더 취약하고, 불쌍한 일을 당하는 현실을, 예언자 자기 아픔으로 느낍니다.

 

119에 다급하게 도와달라고, 어찌할 줄 모르고 구조요청을 했습니다. 8살, 10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그때 느꼈을 절박함과 공포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내 마음도 상했다고 하는, 예레미야의 눈물이 어떤 것인지를 공감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슬프십니까?’

 

 

애 엄마는 아이들을 방치했고, 아동학대의 의혹을 받고 있다. 큰 불길이 덮치자 형은 동생을 감싸 보호했다고 한다. 그 어린 것이 ‘뭘 안다고?’ 말이다. 누구도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흔히들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이신 하나님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 아가페적인 사랑을 대신 하도록 했다는데, 화마에 당하는 순간 엄마가 없었다.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정치인 중에는 이것마저 정치화하고 정쟁으로 삼는 것을 보면서, 정말 철없다고 여겼다.

 

울고 계신 주님을 보셨는가? 예수님은 울고 계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자매들과 유대인들 친인척들이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그것을 보시고 예레미야처럼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시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나사로를 살리고 부활의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이 아이들이 빨리 의식을 되찾고 회복되어, ‘불에서 건져낸 막대기 같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것처럼, 부활의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

 

 

  1. 두 여인의 이야기

두 개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모두다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먼저는 솔로몬에게 찾아온 두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가 자기의 갓난아기 위에 누운 지 모르고 자다가 아기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여인이 낳은 아기와 바꾸었습니다. 산모는 얼마나 조심하게 되는데, 깊이 잠들어 아기를 깔고 자는지도 몰랐을까요? 아기의 숨소리 변화만 느껴도 깨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게 산모다. 서로 진실공방이 벌어집니다. 솔로몬은 칼로 반반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신원하는 여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여자가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자.”고 말합니다. 이미 이 여인에게는 모성애란 거짓되거나 없었다.

우리 사회가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갓난 생명을 조심히 돌보듯 해야 하는 조심성은 사라진 대신에, ‘내 것도, 네 것도 되게 말자.’는 비뚤어진 의식이 존재와 존재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사마리아가 아람 군대에 의해 둘러싸이자 극심한 굶주림을 당한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 비둘기 똥이 5세겔에 팔리는 때였다.(은 1세겔은 4일정도의 품삯이다.) 그 때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온 두 여인의 이야기이다. 한 여자가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제안을 한 여자가 남의 집 아들을 잡아먹더니 자기 아들을 숨기고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남의 자녀를 희생물로 잡아먹고 자기 자식만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자기의 어리석음을 피해의식으로 바꾸어 남의 자녀도 내놓으라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일이 오늘날에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딱 맞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천 오토바이 배달 사망사건에서, 동승자가 약간은 강압적으로 음주운전을 교사했다고 한다. 경찰에 자기를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해주면 뒤를 봐주겠다는 식이었다는데, 생명과 죽음에 대한 경외심이나 도덕적 윤리적 양심을 잃어버렸다. 대신에 처벌 받지 않고 아랑곳 없이 살 방도를 먼저 생각한다.

 

나의 생명과 타자의 생명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돌보고 살피는 일이 평화인데, 평화가 사라진 세상의 비극은 생명에 대한 존엄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을 지키는 일에 경각심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사명과 소명의식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교회가 자기들 끼리만의 잔치상을 벌여놓고 고성방가하는 집과 같다고 지탄 받고 있다. 예전에 교회가 사회적인 역할들을 많이 해왔지만 지금은 국가에서 여러 기관에서 다 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존재 이유까지 공격당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가, 마치 이스라엘 왕이 자식을 잡아 먹은 여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국가와 사회가 하지 못하는 게 있다. 쉽게 안되는 게 있다.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한 경각심과 경종을 울리는 일이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복음의 종을 울리는 일이다.

 

 

 

 

 

  1.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그곳을 너희가 아느니라.” 말씀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말하니까, 주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도마는 “주님 우리가 그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반문했다. 질문은 좀 다르지만 도마처럼 혹여나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부활의 예수님이 달려가고 있는 곳을 모른 체 하고 외면하면서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묻는 동안 주님은 빌립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우리에게 물으신다.

 

 

어떤 사람들 네 명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중풍병자였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문 앞에 모여 있었다. 지방 서기관이나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무리들이었다. 여기서 무리들(오클로스)은 단순히 인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일반적인 백성을 뜻하는 단어는 ‘라오스’이다. 여기서는 오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오늘의 개념으로 바꾸자면, 생계의 사각지대에서 그 걱정거리와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그마만큼 오클로스들이 많았다는 것은 Pax Romana, 로마의 평화라는 미명하에 일어났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주님은 높은 곳을 찾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낮은 곳을 향해서, 섬김을 받는 자리를 찾아가신 분이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고, 절박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나눌 수 있는 곳을 향해서, 또 사람들의 환대와 칭찬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힘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기도의 자리에 머무셨다.

 

네 명의 친구들은 더 이상 무리들을 비집고 주님 앞으로 갈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질게 뻔했다.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혜와 용기를 냈다. 지붕에 올라가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웠던 침상 채로 달아서 내렸다.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중심이 맞지 않아 떨어질새라 네 명은 한 호흡으로 협동하여 친구를 내렸다. 주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고쳐주심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주님은 무엇을 보셨는가? 5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친구들의 믿음과 용기였다. 자기들만의 구원과 유익을 위한 믿음이 아니었다. 동료나 이웃인 한 사람의 구원과 질병이라는 삶의 병통이 해결되기를 바랐던 친구들의 마음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었다. 그것은 타자를 포함한 믿음이었다.

 

제자들이 때로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 못하고 행동할 때도 많았다. 반문했다. 또 주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지 않은 것에 대한 말씀인 줄로 여기고 걱정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 교훈을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세상이 우리에게 당연시 하듯 길들이고 있는 교훈에 익숙해지고 있지는 않는가? 정당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소외시키거나 제쳐놓고, 발전을 위한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그 영혼에 상처를 주고,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차별을 정당화 하며, 자기 의를 위해 누군가를 정죄하며, 자기는 비판받기 싫어하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에 티만 보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너그러움으로 사람을 대하셨다. 자비와 긍휼과 섬김의 눈물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셨다. 이것이 신비이고 신앙의 눈이다.

 

그러기에 나중에 배상을 하더라도 지붕을 뜯고, 병든 친구를 주님께 달아내린 친구들의 모습은 주님의 마음과 너무나 잘, 합하는 것이다.

 

이 친구들은 평상시에도 우애가 대단했던 것 같다. 환상의 콤비를 이룰만큼 평소의 협력이 없었다면 친구를 안전하게 달아내릴 수 있었겠는가? 평소에 호흡을 맞춰왔기에, 정말 도움과 협력을 필요로 했을 때,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형제의 우애를 더하라는 것은 이런 의미 아닐까? 단순히 자기들끼리 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합력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숙련된 우애의 힘 말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다. 요한이 전하는 서신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1서4:7-8) 말씀하고 있다.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며, 사랑의 계명에 따라 살고 화목한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단순히 이런 사랑의 감정만 더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사랑의 협력이 믿는 자의 실력이 되고, 사랑으로 생명을 지키는 능력이 믿는 자의 실질적인 Power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요한1서3:18에서도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의 규모를 보며 작고 부족하다고 여길 지도 모른다. 규모만 크고 모든 것이 채워져 있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주님의 마음에 합하며 주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우리 교우들이 이런 우애와 협력의 힘을 키우기를 바란다.

 

어느 교회들에서 보여지고 있는, 정치에 동원되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떼거지로 달려들어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협력은 진정으로 주님 바라시는 협력이 아니다.

 

이웃을 위해 우애해야 한다. 그것은 사명이고 소명이다.

요즘 재정적으로 이전 보다 어려운 상황이다. 아마도 모두가 다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이전에 힘들 때도, 지금까지 미혼모들을 후원하고, 정말 미약하지만 제3세계 어린이를 꾸준히 돕고 있고, 때때로 큰 슬픔과 고통을 당한 이들을 돕곤 했다. 교회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한 번도 직접 언급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우리가 힘을 내어 목적헌금을 내고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 힘써주시라. 이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풍성하고 부요하게 하셨음을 기억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해주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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