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4일 주일예배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주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홍의 단풍이 파란 잎사귀를 물들이기 시작하는 때에, 심령의 변화를 꿈꾸며 주님 앞에 섰사오니,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닦여지고 부서지고 녹아져서,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께 열납 되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창시자시요,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가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16:17)
- 커다란 의문부호
마태복음19장 25절을 보면,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다녀간 뒤에, 주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말씀하니까,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놀라며 말한다.
요한복음6장 66절에서도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전하고 있다. 사람들이 주님의 상징적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따름이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말이 쉽지, 실상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의 말씀도 이에 한 몫 하는 말씀이다.
경제적으로 희망적이거나 좋을 때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계가 달린 문제다. 부도, 폐업, 실직의 벼랑 끝에 있는 경우가 많다. 소상공인들이 시름하고 있고, 차라리 폐업을 하면 좋을텐데, 임대계약기간 때문에 그마저 쉽지 않다. 약 한 달 전에는, 코로나 유행이 극에 달했을 때, 카페를 운영하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작 27살밖에 안된 여성이었는데, 얼마나 절망감과 괴로움이 컸을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의문부호를 품을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있다. 얼마나 주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있을까?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숨은 참 중요한 것인데, 우리의 선택적 가치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주님은 “너희의 목숨이 이 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묻고 계신 것을 기억하라.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생계 걱정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된 때 들려주신 말씀이 아니다.
로마의 수탈은 날로 더해갔다. 단편적으로, 갈릴리 근처에 염장산업이 기획되기 시작하면서, 어부들은 처음의 기대와 달리, 오랫동안 생계터전이었던 곳에서 어업권을 박탈당하고, 점점 더 어려워졌다.
토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계 은행에서 무리한 대출을 쉽게 해주고,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할 때, 가차(假借) 없이 경매에 넘겨, 일본인이 헐값에 사들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서, 토지를 가졌던 사람들은 저당 잡혔다가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소작농은 날품팔이로 전락하게 됐다. 그마저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포도원의 품꾼 비유는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포도원주인이 제 11시(오후5시)에 일꾼을 구하러 나가보니,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품꾼들이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말한다. 일반적인 편견처럼 게을러서 늦게 나온 사람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조차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지금보다 더 먹을 게 없고, 생계가 막막하고, 사회적 보장이나 안전장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대에 주님은 오늘의 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시다.
- 염려하지 말라.
25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염려는 선택적인 차원이 아니다. 선택적인 차원이란 주부가 저녁식탁에 어떤 메뉴를 정할지 고민하거나 오늘 외출할 때 어떤 옷차림으로 나갈지 고르곤 하는데, 그런 차원의 염려가 아니라는 말이다.
염려하다는 뜻을 가진 ‘메림난’(μηριμναν)이라는 단어는 ‘두려움’을 포함하는 걱정을 의미한다. 제 2정경으로 여기는 집회서(시락서)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딸은 아비에게 남모르는 근심거리여서 딸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적도 많다. 딸이 젊을 때에는 시집을 못 갈까 걱정이고, 시집을 가면 소박을 맞을까 근심이다.”(집회서42:9) 그리고 집회서30:24에는 “질투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근심 걱정을 하면 빨리 늙는다.” 즉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몸이 쇠약해지고 늙는 말로 쓰였다.
생계의 위기가 찾아오고, 폐업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실직을 당할지도 모르고, 어디에서 돈을 꾸기조차 어려워지며, 빌린다고 하더라도 부채는 계속 늘어가고 이자를 갚기도 힘들어지는 상황, 헐벗은 사람처럼 사회적인 체신과 도리를 지키기조차 힘겨워지는 상황에서 어떻게 염려하지 않고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가슴이 답답하고, 잠을 잘 수가 없고, 살길이 망막해서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찾아온다.
그런데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 30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갈등과 번민과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해서 얻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것일까? 굳센 믿음과 기도가 없어서 그렇다는 꾸지람이신가? 기도하면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며, 갑자기 뭔가 큰 변화가 찾아오고 잘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신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견책하시는 것이다. 왜 그런가 보자.
26절과 28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8-29)
청중들이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반응이 어땠을까? 마태복음7:28-29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말씀이 신선하고 새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동안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어서도 아니다.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던 말씀이 있다.
욥기12:7을 보면,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슬픔을 당했다. 그 고통과 괴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진 것을 다 잃었다. 가족, 자녀, 재산.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자녀의 목숨은 재산을 잃은 것에 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과연 짐승들은, 공중의 새는 무엇을 가르치며 말하여 줄까? 사실 욥 역시도 알고 있는 말씀일 뿐, 깨닫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다. 화두만 삼을 뿐 율법에 빠져있느라 아는 척하고 말만 번지르르 했지 실제로는 몰랐다.
주님의 말씀은 욥기 38장에서 41장의 내용을 하나로 간추려 본질을 직파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수고도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너희들은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말씀하신다.
욥기 38장에서 41장이 말하고자 했던 것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시라. ‘욥은 이것들 보다 귀하다.’ 마6: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화려한 영광을 꽃피우다가 덧엎는 인생으로 마감하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돌보시고 살피신다. 10:31에서도 “두려워 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12:12에서도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나님이 부르시고 찾으시고 돌보신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 주님의 말씀은 바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한 사람들을 꾸짖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심을, 지키고 계심을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욥은 38장에서 41장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귀에 들려주시는 구체적인 음성을 듣고서, (여기서 욥기문학의 진수가 드러난다.) 42장에 가서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백한다. 귀로 듣기만 하였던 신앙은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이다. 그러나 눈으로 주를 뵈었다는 신앙은 체험의 신앙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고, 전능자의 주권과 권세가 여전히 욥을 붙들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이었다.
-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주님은 결단을 촉구하신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란 무엇인가? 열왕기상3:13을 보면,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말씀하신다. 솔로몬의 공로와 업적이 아니라 “네가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도” 즉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아시고 주신 선물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바꿔 말하자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라”라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라.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목마를 때, 반석에서도 물을 내셨다. 길을 알지 못하고 밤에 찾아오는 광야의 추위와 적막함, 한낮에 찾아오는 타는 듯한 뜨거움과 숨막힘, 그 가운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전능자의 주권과 권세가 우리 모두를 붙들고 계시다. 돕고 계시다. 살피고 계시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살펴주셨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3)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그래서 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말씀하고 있다.
-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는가?
요즘 아르바이트로 대리운전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던데, 어느 분이, 비가 많이 오는 날, 3만 원을 받고 운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출발지와 도착지가 아주 외진 곳이어서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손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고 인격을 모독했다. 그러더니 운행도중에 5천원도 아깝다며 돈을 안주겠다고 했다. 편의점 알바생 1시간 시급이 만원도 안되는데, 그 보다도 못하다면서 30분 운전했으니 5천원 주는 것도 아깝다는 것이었다. 거지취급을 하며 비하했다.
못들은 척하고 가자니, 폭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리고 자꾸 굴종시키려고 했고 모욕적인 언사를 멈추지 않았다. 화가 났다. 차를 도로변 안전한 곳에 세우고, 다른 사람 불러서 가든 말든 하라고 운행을 거부하려고 했다. 돈은 고사하고 인격을 모독하는 언어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됐을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초래되게 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부담을 갖는다. 막연하게 느낄 때도 있다.
여기서 ‘구하다’는 뜻으로 사용한 ‘제테이테’(ζητειτε)라는 단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구하라는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34절에서 주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초래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조차도 따지고 보면 내일에 대한 염려다. ‘구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현재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일상의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임하고 있음을 믿도록 구하라는 의미이다.
그의 마음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를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있지만(그것은 그의 자유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혹여나 그가 음주운전을 하거나 그러다가 사고가 나면, 개 같이 굴망정 ‘술 취한 사람을 버려두고 갔다는 것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혹 그가 다른 사람을 부른들, 그 역시 똑같은 수모를 당할텐데, 그런 상황이 오도록 만드는 것은 옳은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상황을 만들거나 윤리적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고 여기고 끝까지 운행을 했다고 한다.
고급 승용차에 고급 주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편에서 생각해보면 그는 추하고 볼품 없는 버러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누가 더 부자요,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아무리 그가 모욕을 당하고 비하되고 짓눌려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가 났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기를 바랐고, 술 취한 망나니 같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했기에 끝까지 무사히 운행할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마음의 고생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바로니, 하나님께서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뿌듯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귀하게 여기시고, 모든 것을 더하시지 않으실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를 돌보심이라.”
기억하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돌보시는 분이 계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고 돌보심을 마음의 중심에 세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통치)와 의가 여러분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을 믿으며 승리하라. 우리에게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끊임없이 보살펴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신다. 지금 당장은 손에 아무것이 없을 수도 있지만, 당장 내일 무너지고 끝이 날 것 같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캄캄하지만 “새들도, 꽃들도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v.26)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않으시겠는가?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겠는가?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그러기에 우리에게 쓸 것이 부족해도 나눌 수 있다. 섬김을 받지 못해도 섬길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