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3일 주일예배실황
길고 지루했던 여름날을 거두시고 선선한 바람과 함께 맑은 하늘을 펼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오늘 복된 주님의 날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더 높아진 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가는 양떼구름으로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온 때에, 코로나로 지치고, 지나간 태풍에 큰 수해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의 손길이 분주한 때에, 하나님의 위로와 명령에 새힘과 새각오를 가지기 원하며 주님 앞에 섰사오니,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저희 예배가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롬1:6)
이 시간 좋은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질문부터 던지겠다. 제자들 중에서 서열을 정하자면, 1순위는 누구였을까? 흔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주님의 수제자라고 말한다. 누구였을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자기들끼리 이런 문제를 논했는데, 주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말씀하셨다.
얼마 후에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란다. 단순히 좌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씩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
베드로가 어이없었겠다. 예수님의 수제자나 마찬가지였다고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의 일에 가장 열성적으로 앞장섰던 사람이었고.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졌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니까,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며 주님을 따랐다. (모두 떠날 때, 그대로 끝까지 곁에 남아 있는 사람을,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베드로의 신앙고백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수제자 다운 신앙고백이다.
‘누구는 이런 부탁을 할 줄 몰라 안했겠는가?!’ 조금 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 잠자코 있었을 뿐이다. 이들이 이러니까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 불쾌해 하는 제자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정말 주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주님에 대해 무지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오랫동안 주님과 함께 했더라도 말이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정치적 메시야됨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 청탁과 관련해서 주님은 또다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막10:43-4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다.”(45)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지도 못하고 마실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던가를 알 수 있다.
주님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이 밖에도 더 있다. 사람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시기를 바랐을 때, 못하게 한다. 성경은 제자들이 부모들을 “꾸짖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실 때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붙들고 항변까지했다. 어느 아비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은 엉뚱하게 서기관들과 논쟁에 빠져있었다. 또 주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더라며, 그것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과의 대화 뒤에, 자기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근심하고 돌아가니까, 주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러면 구원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하는 마음을 품었다. 어쩌면 재물로 부요해지는 것이 제자들의 감춰진 이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세상에서 부유하게 되고 성공한 사람이 구원받고 복받은 사람이라는 의식이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이 말에는 이런 제자들의 속내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맹인 바디메오가 주님과 제자들이 지나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주님을 애타게 불렀을 때, 무리들이 나무랐는데, 제자들은 옳게 여기거나 당연하게 여기고 방조했다. 모두 주님의 생각과 뜻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오래 함께 했더라도 주님을 잘 모르는 모습을 보면 오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예수, 예수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무지하게 됐을까?” 대형화되고 권력화되고 정치화되고 유명해지는 것을 구원의 증거,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증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정신과 뜻과 말씀보다도 대형교회 목사님의 말씀이 더 주님의 말씀다운 현실이 됐다.
특별히 주님에 대해 무지하게 만드는 것 중에, 이것 만큼은 꼭 기억하고 조심하라. 혐오나 증오를 부추기고 편 가르기를 하며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영적 교만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말이다. 근본주의자들과 맹신적인 문자주의자들이 사람들에게 이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불안을 심어주고, 마음을 도둑질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 조지 오웰이 쓴 우화 ‘동물 농장’이라는 작품을 보면, 양들에게 “네 발은 좋고(동물) 두 발은 나쁘다(인간).”라는 노래만 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농장의 동물들이 어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꽥꽥 소리지르듯이 그 말만 복창한다. 시끄러워서 성숙한 토론이나 진지한 회의는 할 수 없었고,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리 조용하도록 주의를 줘도 이미 그렇게 훈련이 됐기 때문에 소용없다.
‘A는 좋고, B는 나쁘다.’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혐오와 증오가 정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한편에서는 조롱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난받는 자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뽑고 있을 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다. 이 정도의 사랑과 용서와 포용력을 닮기를 원하시지 않을까? 스데반처럼 말이다.
나는 선, 너는 악, 우리 편이 아니면 적군, 이런 식의 공격적인 태도 어디에도 주님을 찾아 볼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주님은 사랑의 성숙과 완성을 기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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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의 원인은 무엇일까?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나 지식과 무관하지 않다. 한 단면만 살펴보자. 세상 어디에나 서열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기도 하다. 서열이 높으면 좀 더 편하고 대접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세상적인 지식과 상식이 정작 주님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고, 오해하게 만들고, 이율배반적인 믿음을 만들어 낸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막10:42-43a) 제자들이 세상적인 상식과 지식에 기인해서 주님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 역시 주의해야 한다. 세상적인 지식과 상식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 주님의 말씀과 뜻 보다도, 그것으로 주님의 은혜를 치환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동물농장(조지 오웰)에 등장하는 스퀼러와 같은 언론에 길들여지고, 성공과 출세의 담론에 길들여지고, 물질만능주의 세상이 말하는 행복론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는 욕심에 길들여지고, 사나운 이기심을 키워내며 검증되지 않거나 조작된 유튜브지식에 쉽게 녹아든다. 세상의 것에 익숙해지는 사이에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하게 됐다.
우리가 어떤 것에 길들여지는 지, 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물으며 깨달으며 자각하고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도 회개다. 어쩌면 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다. 죄책감 앞에서 늘 마음의 부담을 덜고자, 그러면서도 여전히 삶의 방향은 세상적인 지식과 방식에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회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메타노이아), 이것이 참다운 회개가 아니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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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에 식견이 생기기를 빈다. 베드로후서1:5은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더하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지식’이라는 단어는 ‘그노시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오늘 성경본문에서 읽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구절에서 ‘알다’라는 단어에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지식’은 세상의 풍부한 지식이나 교과서적인 지식, 머리로 알게 되는 지식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서3:8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계속해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고린도교회에는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갈등을 빚고 다투고 상처 주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한다.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많이 안다는 것, 지식의 교만 때문에 화합하지 못하고, 이웃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며, 그것이 자기를 높이는 줄로 착각하는 것. 덕에 지식을 더하라는 말씀은 결코 이런 지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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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로 알고 이해하며 믿는 바로미터는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이다.
마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들 사이에 특별히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의 모습을 삽입하고 있다. 주님은 세 번씩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 하신다. 제자들은 그때 마다 그 의미를 모르고 행동한다.
어린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세 번이나 등장한다.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심, 주님의 이름으로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임, 어린 아이들에 대한 축복이 그렇다. 십자가는 여린 생명을 지키고 돌보는 온전한 사랑의 완성이다.
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세 번 나온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섬기는 자가 되야 한다.”,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있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이 그렇다. 십자가는 섬김의 강력한 능력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다. 세 번의 수난예고 바로 앞뒤에, 마치 그 이야기를 감싸기라도 하듯이 전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마가복음8:22-26 벳새다 맹인을 고치시는 내용, 마가복음10:46-52 맹인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는 내용이다.
의도하는 바가 무엇일까?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자,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알려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에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하면 영적으로 맹인과 같다. 주님은 맹인을 고쳐주셨듯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 영적인 눈을 뜨기를 원하신다. 권세 있는 자보다도 소자, 작은 자를 섬기고, 타인(타자, 타종교)에 대한 우월감과 그 비교보다도 겸손함을 갖고, 세상의 집권자들이 길들여지길 원하는 것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마셨던 희생과 헌신의 쓴 잔을 함께 마시는 것, 그것이 주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바울은 세상이 가르치고 있는 그 교훈에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을 버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시도록, 예수님 안에 있기를 사모하며 노력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예수를 바로 알고 좇아간 사도가 되었다. 전도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이전에 길들여졌던 것을 바울은 배설물처럼 여겼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중의적이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또 사람들에게도 그 삶의 실천과 모습으로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 말이다.
고린도교회가 거짓 선생들이나 이단, 그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영적으로는 교만해져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며, 세상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기는커녕 그릇된 길로 가고 있었다. 고린도전서의 저작 동기는 이래서였는데,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들어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의 십자가 사랑이 곧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라고 강변했다. 바울의 마음은 답답했고, 무거웠다.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으나, 이 근심과 염려로 심령이 편치 못하여, 디도가 오는 길목이었던 마게도냐까지 갔다. 드디어 디도를 만났다. 그가 가져온 소식은 고린도교회가 회개하고 제자리를 되찾고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바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기뻤다. 세상에 길들여진 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모르는, 예수 없는 사람 같던 이들이, 그래서 교우들 간에 세상법정에서까지 치열하게 다투고 싸우던 이들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뜻을 깨닫고 뉘우치며 회개했다는 소식은, 영적인 승전보와도 같았다.
게다가 또 좋은 소식이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극심한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소아시아와 유럽의 교회들이 마음을 모았다. ‘각처에서 그리스도을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고백은 이런 점을 반영한 것이다. 자기들도 많은 환난과 시련, 극심한 가난이 있었지만 더 어려움에 빠진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연보금을 모았는데, 고린도 교회도 동참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모습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 그리스도를 아낸 냄새이다.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고 있다. 시간상 더 많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바울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넉넉히 채워주시고 갚아주시고 은혜 주시는 것도 증거하고 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된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의미도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기독교인의 티를 내는 어떤 것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봉사와 섬김과 나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17절의 말씀으로 오늘의 말씀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예수님의 대한 신앙과 믿음마저도 이데올로기와 섞여 혼잡하게 된 오늘날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위기를 겪고 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겸손, 섬김, 실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질서 있게 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 일을 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