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6일 주일예배실황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9월의 첫 번째 주일에 저희를 부르셔서,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잘 아십니다. 그 답답한 마음과 무거운 마음, 괴로움, 걱정, 염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섰습니다. 성령으로 저희와 함께 하셔서, 위로와 새힘과 소망이 넘쳐 남으로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시고, 마음을 담대하게 하시며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저희 예배가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오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5:9)
지난 주에 ‘더욱 힘써 굳게 하라.’는 제목으로 베드로후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를 사랑을 더하라.”(벧후1:5-7)는 말씀을, 교회가 맛을 잃고 길가에 버려진 소금같이 된 코로나19의 현실에서, 실천하자고 했는데, 그 중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덕이란 무엇이며, 믿음에는 왜 덕을 더하라고 말씀하는 것일까?
바울은 바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결별했던 적이 있다. 복음의 전초기지였던 안디옥에서, 제 2차 전도여행은 준비하고 나설 때였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 다녔던 각 지역에 다시 가서 교회를 점검하고 믿음을 돋우자고 했다. 바나바도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쉽게 뜻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때 바나바는 조심스럽게, 마가(요한)를 다시 수행원으로 데리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이 달랐다. 1차 전도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중도하차하고 되돌아갔던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단호했다. 바울은 이성과 논리 중심의 사람이었고, 바나바는 인간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바나바는 누구라도 다시 기회를 주고, 굳게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여겼다. 처음부터 완전한 사람이 어디있는가? 베드로도 실수 했고, 다른 제자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등졌던 적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바울은? 이 자체로만 보자면,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의아한 것이 있다. 이 정도의 문제 가지고 갈라섰다는 것 말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의기투합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문제로 다투어 갈라서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물론 사람인지라 의견 차이로 살짝 다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경은 단순한 다툼 정도가 아니라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다. 바울이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바나바도 이런 것 가지고 속 좁게 생각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됐을까?
교회 안에서 교우들 간에 오해와 갈등이 발생했을 때, 믿음이 있다면 어떻게 돼야 하는가?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양보하며 화합해야 하지 않는가? 서로 자기주장과 고집을 내세우다가 갈라서고 등 돌리는 일이 있다면 누가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부끄러운 모습이다. 객관화 시킬 줄 알아야 한다.
하물며 바울과 바나바이다. 이런 정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전도여행 중에, 더 큰 십자가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는 것은 사실 좀 실망스러운 대목이다. 이런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 사건은 믿음은 있지만 덕이 없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마가의 동행 여부에 대한 문제’는 발단일 뿐, 본질은 아니었다. 본질은 바나바에 대한 바울의 깊은 실망감 때문이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어도, 바울은 바나바에 대해 크나큰 실망감을 갖고 있었다.
들어보라.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다. 여기서 이방인들과도 너나들이 하며, 함께,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의 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장벽과 막힌 담이 무너지고 이방인들과도 복음의 형제자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흐뭇하고 좋았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선입견과 편견 속에 있거나 소외된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죄인, 세리, 부정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소중한 자녀로 보셨다. 어느 학자는 타자와 함께 허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초월의 경험과도 같다고 이야기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편해 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말이다. 정말 예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인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하는데,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 믿음을 갖게 되었고,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고 자백하는 바울은 예전 자신의 모습과도 같았던 이런 모습에 대해 질색했다. 심지어 배설물로 여길 정도였다.
이때 갑자기 야고보의 사람들도 이곳에 내려왔다. 베드로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함께 있던 이 지역 유대인들은 마치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예루살렘 회의를 주목해보자. 그 결론은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 문제는 민족적인 정서나 감정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과 말씀으로 판단할 문제라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사람들이 막거나 자기들이 부정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야고보 또한 자신의 감정과 정서와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주를 믿게 된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히나 할례와 율법에 대한 신념은 여전했고. 특히나 야고보 사람들은, 굳이 말하자면, 강성 유대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인이라고는 하지만 유대적인 것이 매우 강했다. 그러니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겠는가? 만약 이들이 베드로와 안디옥의 유대인들, 바나바, 바울의 식탁을 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생각해보라.
때로는 매우 사소한 일도 어떻게 바라보고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사달이 나곤 한다. 우리는 언론매체들에서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숱하게 보고 있다.
다시 한 번 상황을 간추려보자면, 베드로는 자리를 슬쩍 피했고, 좀 온건한 편이었던,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유대인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야고보 사람들 앞에서 행동했다. 바울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베드로의 모습이 비겁해 보였고,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아 보였다. 온건한 유대인들은 가식적으로 생각됐다.
그런데 바울을 결정적으로 실망스럽게 한 것이 있다. 바나바의 모습이었다.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믿음의 동역자가 됐고 정말 가까워졌다. 바나바를 잘 안다고 생각했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바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멘토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렇기에 바나바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바나바도 그랬다. 갈라디아서2:13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공동번역, even Barnabas was fooled.) 그렇다. 뭔가 다를 줄 알았던 사람에 대한 실망감은 큰 것이다.
나중에 바울이 게바(베드로)에게 따져들었다. 갈2:11절을 보면, 그것을 “책망하였노라.”라고 적고 있다. 이방인의 사도임을 자처했던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바(베드로)가 바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때로는 논리적인 말로 다 설명이 안 될 때도 있다. 말 자체가 변명이 될 수도 있고, 설명해도 설명이 안되는 때도 있는 법이다. 말은 맞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닐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때 차라리 바나바에게도 그렇게 했더라면, 그런데 너무나 실망한 탓일까? 경솔하지 않으려는 신중함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차라리 말하고 나면 괜찮을 문제도 혼자 생각을 키우다가 오해가 증폭되고, 오해는 실망감으로 바뀌며, 실망감은 단절로 이어지곤 한다. 결국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발단으로, 참아 두었던 것이 폭발하고 말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서로를 돌아보아 뉘우치고 화해하는 마음도 주시고, 회복하는 마음도 주시고, 더 새로워지고 단단해지는 비결도 주신다. 사람의 실수에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연약함, 부족함, 부끄러움을 오히려 누군가의 영혼과 생명을 감싸는 싸개로 사용하시기도 한다.
고린도전서10: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인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시장에 유통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상관 없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께름칙하고 불길해서, 먹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믿음으로 보자면 먹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별개의 문제다. 인도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둘 다 먹을 수 있다. 사실 식탁과 밥상의 문제는 문화적인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바울도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혹시 먹는 것이 자유하다고 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걸려넘어지게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울은, 그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젠은 달라진 바울의 보습을 볼 수 있다.
자기는 자유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야고보의 사람들은 사실 아직 뼛속 깊은, 유대주의가 강했던 것이지 믿음이 강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에 대한 믿음은 약했다.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안디옥의 온건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에 실족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괜한 분란과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자리를 피하고,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리를 수습했던 것이지 가식적이거나 거짓된 모습 때문이 아니었던 것 아닐까?
바울은 자기도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당하자, 이전 일이 떠올랐다. 아니 그 전부터 자신이 편협하게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나중의 바울은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을, 혹은 사람들(베드로, 함께 있던 유대인, 바나바)까지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서로 거리낌 없는 화해와 용서를 하고, 심지어 마가에 대해서는, 디모데에게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나의 일에 유익하다’고, 빌레몬에게는 나의 동역자라고까지 말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일에 순종하고 충성하면서 알게 되었다.
굳건한 믿음만 가지고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전하거나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대신에 믿음에 덕을 더해야 한다. 그는 용서를 알게 됐고, 이해하는 마음을 넓혀갔다. 자기 고집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됐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대신, 예수님의 눈으로 가급적 깊은 곳을 보려고 했고, 자기 뜻에 누군가를 맞추려 하기보다 그의 심령을 조심스럽게 여기면서 맞추어주려고 했다.
고린도전서9:19-22,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됐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배려하고,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섬기고, 눈물로 참아내고, 때로는 지혜로우면서, 덕을 세워갔다.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말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영혼과 생명을 감싸는 싸개로 사용하신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고백한다.
덕을 더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말씀이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이런 점에서 우리 시대에 교회가 덕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사회가 비대면예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영적 대면예배”라는 말로 바꾸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코로나19시대에 이웃들에게 유익을 구하는 게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다.
‘영적 대면예배’라는 말을 쓰고 싶은 이유는 이렇다. 비대면 예배는 서로 마주보지 않고 예배한다는 것인데, 세상의 용어와 관점은 그럴지도 모르나 우리는 영적으로 대면예배를 늘 하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유일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듣고 우리의 생각, 세상적인 것들, 감추었던 우리의 모습을 벗고,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마주하길, 주님이 바라신다고 믿는다. 비록 우리가 한 공간 안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저는 한 주간 교우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가상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영적으로 바로 옆에 있는 것이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일은 결코 남을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아름다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탄식과 상처와 울분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 요즘 같은 때, 영혼을 감싸는 생명싸개의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하며 믿음에 덕을 더하라.